철학의 세계/과학철학

[스크랩] (14) 기술과 상징 : ‘프랑켄슈타인’을 두려워하는 이유 - 이지훈

ddolappa 2008. 8. 20. 02:57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의 상징이었던 ‘괴물’
정체를 몰라 이름도 없고 험오스러웠다
차가운 기술에 따뜻한 숨결 주자는 이분법에
시몽동은 “기계-인간 맞물리며 진화” 반박
중요한 건 ‘인간적’ 문명에 이바지 여부
한겨레
» 영화 <프랑켄슈타인>의 한 장면. 1931년 미국 제임스 웨일 감독 작품.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은 과학기술에 대한 19세기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한다. 이 괴물은 ‘익명’이며, 파괴되지 않는다.
기술 속 사상/⑭ 기술과 상징
 

어떤 노인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항아리를 안고 힘들게 물을 떠오고 있었다. 이를 본 젊은이가 왜 편리한 ‘기계’를 쓰지 않는지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기계는 기계로서의 기능과 효율이 있다. 여기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사람의 본성을 망치게 된다.” 중국의 고전 ‘장자’에 나오는 얘기이다. 어쩌면 우리는 여기서 근대적 기술비판의 원점을 찾을 수 있다. 기술의 편리함을 추구하다보면 사람이 기계에 종속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타나 있다.

 

그런데 물동이는 일종의 기술적 산물이다. 흙을 반죽하여 불로 구워낼 줄 알아야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노인 역시 기술을 이용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은 이때 물동이처럼 소박한 도구와 수차(水車) 같은 기계의 차이를 지적할 것이다. 도구가 자연에 순응한다면 기계는 자연을 이용하거나 거스른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부족하다.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장자 시절의 기계란 모두 자연력에 순응하는 것들이니까. 현대철학자 하이데거를 떠올려보라. 20세기를 무시무시한 ‘원자력의 시대’로 정의할 때 그는 수차 같은 옛 기계들을 얼마나 정겹게 묘사했던가? 여기에 물음이 있다. 장자에게는 괴물이던 기계가 하이데거에게는 낭만적인 사물로 바뀐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장자에게 괴물 하이데거에겐 낭만

 

하나는 분명하다. 대상의 정체를 모를수록 더 두렵고 혐오스러울 수 있다는 것. 근대기술을 둘러싼 이미지에도 이런 측면이 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현대의 프로메테우스>(1818년)를 생각해보라. 여기서 괴물은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하다. 몸은 ‘자연재료’로 되어있지만, 그 생명은 기술의 결과이니까. 그런데 괴물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름을 붙여줄 마음도, 여유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괴물을 만든 박사조차 기술의 정체를 몰랐다는 것, 그리하여 기술의 산물을 혐오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럴수록 괴물은 더욱 두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끝내 파괴되지 않았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마치 산업혁명과 기계파괴 운동 사이에서 표류하던 19세기 기술의 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지금도 사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과학기술을 국가발전의 원동력으로 추켜세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성 파괴의 주역인 것처럼 깎아내리는 사람도 있다. 혼란스럽다. 우리는 아직도 기술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못한 것이다. 이런 혼란은 어쩌면 인류가 처음 겪는 일이다. 전통사회에서 기술에는 나름대로 분명한 위치가 있었다. 가령 ‘사농공상’이라는 질서는 어쨌거나 당시 사회에서 기술이 차지하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과학기술의 의미는 괄호 속에 들어있으며 다만 그 효용과 부작용만 논의되고 있다.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멈포드는 이런 문제를 지적하며 상징 개념을 제기했다. 여기서 상징이란 인간의 정서적 소통을 비롯해 개성, 창의성, 상상력과 연관된 문화 활동을 포괄한다. 그가 볼 때 문제는 상징 능력과 기술 사이에 균형이 무너진 데에 있다. 기술이 너무 빨리 성장한 바람에 그 문화적 의미를 소화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그는 상대적으로 뒤쳐진 인간의 상징 능력을 북돋우어 다시 균형을 되찾자고 제안했다.

 

‘능동’적인 제안이다. 실질적으로 인문 예술을 좀더 발달시키자는 주장이니까. 그래서 ‘종합’적이다. 기술을 제한하기보다는 그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내성’을 길러, 한결 풍성한 문화를 만들자는 얘기이니까.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있다. 기술과 상징이라는 이분법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상징은 주관적, 개성적인 반면 기술은 객관적, 기계적이다. 즉, 기술 속에는 ‘의미 있는 상징’이 없고 기계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없다. 이렇게 차가운 기술에게 따뜻한 숨결을 불어주는 것이 상징 능력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사람처럼 기술 잠재력도 미지수

 

» 기술과 기계를 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질베르 시몽동(1924-89). ‘포스트 구조주의’에 까지 영향을 줬다.

비슷한 시기, 프랑스의 철학자 시몽동(Simondon)은 대조적인 얘기를 했다. 기계도 인간적이라고 한 것이다. 이 생각을 이해하려면 먼저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 언뜻 보기에 기계는 마치 생물의 기능 가운데 하나를 고정해놓은 듯하다. 안테나는 곤충의 더듬이, 음파탐지기는 박쥐를 본 땄으며, 말 그대로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한 기능을 확정하는 것은 단지 처음 단계일 뿐이다. ‘인공지능’을 보라. 오히려 외부 환경에 따라 기능을 조절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 어떤 상황에도 똑같이 작동하는 기계는 초보단계이다. 기술이 발달할수록 외적 정보(상황)에 민감하며 상호작용하는 기계가 나온다. 기능이 다원화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른 기계들, 나아가 인간들과 접속하는 관계도 다원화된다. 서로 끊임없이 연결, 해체, 수렴한다. 이런 측면을 두고 시몽동은 ‘비결정성’이라고 불렀다. ‘열려있다’는 뜻이다.

 

그는 기계의 진면목이 이런 비결정성에 있다고 보았다. 여기서 기계의 잠재성은 끝이 없다. 새로운 관계망 속에서 연이어 변화, 생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 또한 그렇지 않은가? 사람의 손은 악수를 할 수도 있고 컴퓨터를 다룰 수도 있다. 한 가지 기능으로 국한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에 잠재된 능력은 아직도 미지수이다. 한계를 확정할 수 없다. 기계 속에 인간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특정 기능을 닮은 게 아니라 인간의 비결정성과 생성을 닮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과 기계는 모두 생성한다. 더욱이 함께 ‘공진화’한다. 가령 네 발로 기던 사람이 직립하여 도구를 쓴다고 하자. 여기서 ‘앞발’은 이동 기능에서 벗어났지만 다시 특정한 도구와 연결되었다. 인간/기계는 이런 식으로 접속하며 변화한다. 혹은 서로 헤어져 또 다른 접점을 찾아 떠나기도 한다. 이것을 시몽동은 변환(transduction)이라고 불렀다. 이후에 들뢰즈가 ‘탈영토화’ ‘재영토화’ 등으로 발전시킨 개념이다.

 

인간/기계가 이렇게 맞물리며 진화한다는 말은 결국 인간의 정신활동이 기술과 더불어 형성된다는 말이다. 이런 관점은 인간/기계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주관/객관, 기술/상징의 이분법도 벗어난다.

 

너무 낙관적인가? ‘장자’와 같은 심오한 비판을 너무 쉽게 여기는가? 물론 장자에는 일리가 있다. 지나치게 기능과 효용에 매달리면 인간성이 메마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오직 기능과 효용을 위한 괴물로서 기술을 바라본다면 이것 역시 지나치다. 실제 장자의 생각도 그렇지는 않을 듯하다. 어떤 백정의 우화를 기억해보라. 사물의 자연스런 ‘결’을 거스르지 않았기에 19년이 넘도록 칼날을 갈지 않고 소를 잡았다는 이야기. 어쩌면 인간/기술의 창조적 공존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을 저마다 본성에 맞추어 대접하자고 했다. 기계의 고정된 기능에 맞춰 사물을 획일적으로 대하지 말자고 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시몽동과 통하지 않는가? 자신의 ‘외부’에 맞춰나가는 기술, 혹은 비결정성 개념과 닮지 않았는가?

 

기술문명 전체 그물망 성찰해야

 

» 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기술도 세계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그래서 기술은 이미 하나의 상징체계이며 주관성을 띤다. 실제로 기술은 석기시대 이래로 다양한 상징과 아름다움을 표현해왔으며 상상력, 종교적 의미, 미적 유희를 기술혁신의 중요한 동력으로 삼았다. 요컨대 기술에도 개성과 주관성이 있다. 그리고 사람은 기술이라는 상징체계와 더불어 세계를 파악하며 살아간다. 그럼으로써, 세계와 맺는 관계망을 바꿔나간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체’의 관점이다. 전체로서의 인간/기술 그물망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하여 이 그물이 엮어내는 문명이 말 그대로 ‘기계’적인지 ‘인간’적인지, 다시 말해 세계를 고정된 관점에서 획일화하는지 아니면 인간의 창조적 자유와 생성에 이바지하는지를 성찰해야 한다. 그럴 때야 기술은 익명의 괴물이 아니라 ‘현대의 프로메테우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Freiheit in mir
글쓴이 : 김문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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