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시속 150㎞와 300㎞ 수치상의 차이 뒤엔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가 있고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 뒤엔 열차를 타고 바라보는 경관의 차이가 있다 기관차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면 KTX에서 풍경은 영화의 스크린처럼 사라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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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속 사상/(16) 시대의 경관으로서의 철도기술
한국의 유일한 철도박물관인 경기도 의왕의 철도박물관에 가면 두 가지 흥미로운 전시물이 눈에 띈다. 하나는 철도기술연구원에서 만든 철도의 미래에 대한 모형이다. 도시의 일부를 재연하고 있는 이 모형은 항구와 고속도로, 고층빌딩을 한 장면 속에 묘사하고 있다. 철도는 이 것들을 연결하는 혈관 같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항구에 내려진 화물과 승객은 철도편으로 도시로, 더 넓은 세계로 옮겨 가며, 그 세계는 고층빌딩들이 솟아 있는 첨단의 장소이다. 철도가 꿈 꾸는 미래의 모습은 철도가 도시의 주요부분을 연결하는 핵심적인 회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자동차와 항공기가 보편화된 이후 철도는 항상 주변화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
기존 선로의 미래철도 ‘틸팅 열차’
또 하나 눈에 띄는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에 대한 것이다. 독일, 일본, 프랑스 등 각 나라가 개발하고 있는 자기부상열차를 소개하고 있는 게시물에 부속된 전시물은 자기부상열차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본의 신칸센 500계 열차의 모형이다. KTX가 자기부상열차인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로 있는 걸로 봐서, 일반인들의 뇌리 속에는 ‘미래의 고속첨단 열차=자기부상 열차’라는 등식이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것 같다. 박물관이 이런 일반인들의 선입견적 오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운데, 그것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철도기술의 현황과 실제 현장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일반인에게는 철도의 미래는 자기부상 열차라고 알려져 있지만 당장 실용예정인 다음 기술은 차체가 기울어져 기존선로에서도 시속 200킬로미터까지 안정성 있게 달릴 수 있는 틸팅 열차이다. TTX(Tilting Train eXpress)라 불리는 이 기술은 새로 선로를 깔아야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KTX와는 달리, 기존 선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속도를 향상시킬 수 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의 주요한 철도기술로 세계 각국에서 각광 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부터 충북선에서 TTX의 시험운행이 있을 예정이다. 철도기술이 향상하면서 우리 생활에서 철도가 가지는 위상도 변한다.
호남선 완행 타는 순간 전라도
사실 정보의 고속도로를 따라 정보들이 아무런 물리적 이동수단에 의존하지 않고도 순간이동을 하는 시대에 실제의 땅 위에 무거운 쇳덩어리를 써서 사람과 물건을 나른다는 것은 더 이상 급변하는 시대를 대표하는 표상도 아닌 것 같으며, 그에 대해 글을 쓰거나 학문적으로 접근한다는 것도 별로 신선한 주제가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탈근대의 첨단기술이 세상을 뒤덮고 있는 요즘이야말로 근대의 기술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프랑스의 비평가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같은 세기가 철도와 사진을 발명했다고 한다. 양자는 근대의 시각장치(vision machine)이며 이동성과 깊이 관계가 있다는 점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1870년대 미국 서부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헨리 잭슨은 사진과 철도를 결합한 사진가였다. 그는 철도를 이동수단으로 삼았을 뿐 아니라, 객차를 개조해 자신의 작품을 고객들에게 선보이는 갤러리로 쓰기도 했다. 사진과 철도의 이런 결합은 남북전쟁 이후 백인들이 미국 서부를 더 왕성하게 개척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잭슨에게 철도는 시작장치이기도 했다. 그는 무거운 사진장비를 나르기 위해 노새를 쓴 경우가 많았지만, 그가 사진 찍은 땅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철로를 따라 나 있었다. 자동차와 항공기의 발달이 근대의 풍경을 빠른 속도로 지워버린 것이라면, 철도가 근대의 풍경을 보존했다는 것은 무척이나 흥미로워 보인다. 누구나 잘 알다시피, 철도는 철저하게 근대의 산물이고, 근대를 가져 온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인간과 재화를 포함하는 물질의 순환이 빨라지고 규칙적이 되고 능률적이 되었다는 점에서 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속도감에 일대 혁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1825년 조지 스티븐슨이 만든 로코모션이란 이름의 증기기관차가 영국의 스톡턴과 달링턴 사이를 시속 24킬로미터로 주파했을 때 이는 이 세계를 다르게 보이게 할 만큼 경이로운 속도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 속도가 어지러웠다고 하니 말이다. 한국의 철도는 196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디젤 동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현재는 급속하게 전력화가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2004년의 KTX의 개통에 이은 전력화와 고속화 추세에 따라, 한국형 고속철도인 G7의 개발이 진행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발전이 현재 한국의 철도를 디젤동력으로 표상되는 과거와 전력화, 지능화, 고속화로 표상되는 미래로 갈라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는 디젤동력은 1960년대에 영원한 과거의 영역으로 사라진 증기동력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또한 옛날 철도모델을 그대로 쓰고 있는 서구와는 달리, 과거의 테크놀로지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한국의 철도 기술의 특성이기도 하다. 실제로 디젤기관차와 KTX는 아주 다른 패러다임에 속하는 기계이다. 그것은 최고속도 150킬로미터와 300킬로미터의 차이이기도 하고, 3천 마력과 1만6천8백마력의 차이이기도 하다. 디젤과 KTX는 단지 수치상의 차이일 뿐 아니라, 공학적 패러다임의 차이이기도 하다. 공기역학적 고려는 전혀 없이 직사각형의 딱딱한 디자인에 동력대차와 브레이크, 연료탱크 등 많은 기계부분들을 겉에 노출시키고 있는 디젤기관차와는 달리, 고속의 KTX의 설계에서는 공기역학적 구조가 아주 중요하게 고려되어, 차체는 항공기를 닮은 매끈한 유선형으로 되어 있으며, 전기를 받아들이는 펜타 그래프 외에는 어떤 것도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고속으로 달리는 KTX의 특성상 조그만 장애물도 큰 사고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주행상태를 점검하는 많은 수의 센서들이 열차 내외부와 선로 주변에 장치되어 있는 것도 KTX가 기존의 철도와 다른 점이다.
과거과 단절된 한국 철도기술
이영준/기계비평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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