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과학철학

[스크랩] (17) 통신기술의 발달 : 한 글자 전송에 10만원 “기사 길게 보내면 잘려!” - 홍성욱

ddolappa 2008. 8. 20. 02:59

1837년 전신 발명으로 ‘통신-교통’ 첫 분리
해저전신 깔린 덕분에 대영제국 통치도 가능
비싼 전신료 탓 ‘신문기사 6하원칙’ 발달
인공위성 뜨자 전화요금 800달러→0.2달러로
국제화·지구촌·세계화…보이지 않는 줄에 꽁꽁
한겨레
» 지금 서로 떨어져 있는 연인들이 인터넷 채팅을 통해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하듯이 19세기에 전신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이어주기도 했다.
기술 속 사상/(17) 통신기술의 발달
 

근대 유럽에서 마차가 다니는 도로가 수도와 지방을 연결하고, 특히 철도가 생기면서 사람이 물건을 나르는 속도가 비할 수 없이 빨라졌다. 이에 비례해서 사람이 메시지를 전송하는 속도도 빨라졌지만, 메시지의 전송 속도는 교통수단의 최대 속도 이상을 낼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메시지가 항상 ‘메신저’라는 사람에 의해 전달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837년 영국의 엔지니어 쿡과 휘트스톤, 그리고 미국의 가난한 화가 모스에 의해 동시에 발명된 전신(電信, telegraphy)은 통신을 교통에서 분리시킨 최초의 발명품이었다. 전신이 발명되면서 메시지는 구리 도선 속을 빛의 속도에 가깝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1843년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를 따라 슬로(Slough)와 런던 사이에 첫 전신선이 놓였다. 전신이 놓인 직후에 슬로에서 살인을 저지른 존 타월이라는 사람은 기차를 타고 런던으로 도망쳤는데 그가 런던에 도착하기 전에 살인을 알리는 급전이 먼저 도착했다. 타월은 런던에서 기다리던 경찰에 의해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고 바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전신 덕분에 경찰은 기차를 무대로 한 소매치기들도 쉽게 검거할 수 있었다. 메시지가 가장 빠른 교통수단인 기차보다도 더 빨리 전달되기 시작했음을 극적으로 보인 사건들이었다.

 

전신, 기차보다 빨라 살인범 체포

 

초기에 전신에 대해서는 오해가 난무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신선 속이 텅 비어서 그 속에 편지를 넣어 날려 보낸다고 생각했으며, 어떤 사람들은 전신선을 통해서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다. 전신선을 통해서 액체 상태의 메시지가 흐른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있었다. 전기의 효과를 이용해서 순식간에 메시지를 주고받는다는 생각은 당시 일반인들에게 무척이나 기묘한 것이었다.



누가, 왜 돈을 내고 메시지를 빨리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는가? 전신의 첫 고객은 신문사였다. 영국의 <타임즈>는 1844년에 빅토리아 여왕의 둘째 아들의 출산을 전신을 이용해서 속보로 보도했고, 이 소식을 담은 신문을 공식 발표 40분 만에 런던 시내에 가판으로 깔 수가 있었다. 미국의 경우에도 언론이 첫 고객이었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소식을 전달하는 데에는 7일 정도가 걸렸는데, 1846년에 발발한 멕시코 전쟁은 전신 덕분에 실시간 보도가 가능했다. 전신의 고객은 신문사로부터 주식가격 정보를 좀더 빨리 알기를 원하는 은행, 투자기관으로 확산되었고, 곧이어 군부, 정부, 철도회사로 늘어났다.

 

전신의 용도는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도 발견되곤 했다. 사기꾼들은 경마대회 우승마에 대한 정보를 전신을 통해 지방으로 보냄으로써 경마 사기를 치기도 했다. 이러한 정보의 송수신은 법적으로 금지되었지만, 사기꾼들은 자신들만이 알아보는 암호를 사용해서 법망을 피해갔다. 체스광들은 전신을 이용해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체스를 두기도 했으며, 부모의 반대를 피해서 전신 메시지를 이용해 결혼한 부부도 당시 유명한 사건이었다.

 

» 19세기 말엽에 세계를 거미줄처럼 덮었던 전신은 ‘국제화’(internationalization)를 가능케 했다.

1850년이 되면 영국 내에 이미 2000마일의 전신이 가설되었으며, 미국에도 1만 마일이 넘는 전신이 가설되었다. 게다가 1852년 영-불 사이의 해저전신을 시발로 1860년대에는 영국-인도, 영국-미국 사이에 해저전신이 개통되었다. 초기 해저전신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보내는 메시지는 단어 한자 당 1파운드를 받았는데, 지금 돈으로 따지면 대략 10만원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또 전신은 모국과 식민지를 연결함으로써 식민지 통치에 결정적인 수단을 제공했다. 19세기 말엽, 영국과 인도 사이에는 매년 2백만 통의 전보가 송수신될 정도였다.

 

전신은 국제기구를 출범시켰다. 1865년 국제전신연합(ITU)이 서로 다른 나라들 사이에 전신의 절차, 표준, 가격을 결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ITU는 1870년대 이후에 출범한 우편연합, 국제도량형기구, 국제선로협약, 국제저작권협의기구, 국제철로협약, 국제무선협약의 모델이 되었다. 1850~70년 사이에는 17개에 불과했던 국제협약이 1900~10사이에는 108개로 늘어났다. 이러한 국제협약은 세계를 하나로 묶는 출발이었다

.

경마 사기·전신 데이트도 등장

 

전신이 활성화되면서 떠오른 것이 이른바 ‘정보산업’이라 불리던 통신사들이다. 프랑스 의 전신인 <아바스(Havas)>가 1835년에 설립되고 이후 독일의 통신사 <볼프(Wolff)>와 영국의 <로이터(Reuters)>가 뒤를 이었다. 미국의 통신사는 각각 1848년, 1907년에 설립되었다. 이 통신사들은 전지구적인 ‘정보시장’을 분할해서 독점했다. 1차대전 이후에는 미국의 (이후 UPI)가 부상했고, 2차 대전 이후 지금 우리가 보는 <로이터>, , , 그리고 4대 통신사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전신은 글쓰기에도 변화를 가지고 왔다. 특히 신문의 ‘6하 원칙’이라는 독특한 문체는 전신 때문에 발달했다. 원래 신문기사는 소설처럼 늘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기자들이 비싼 전신을 이용해서 기사를 송고하는 일이 잦아지고 특히 미국의 남북전쟁 중에 전신선이 자주 절단되자 기자들은 기사 첫머리에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했는지 간단히 요약하고, 그 다음 문단에 이를 조금 서술하고, 다음 문단에 더 자세한 서술을 붙이는 피라미드 형태의 문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신과 같은 새로운 통신기술은 정치, 외교 행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1914년 6월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대공(Archduke Ferdinand)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후에 유럽의 위기가 고조되었는데, 이 시점에서 세르비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 영국의 지도자들과 외교관들은 전신을 통해서 각국의 의견을 전달했다. 그런데 외교관들이 서로 만나서 복잡한 문제를 협상하던 과거와는 달리 전신을 통해서 전달되는 뉴스는 각국의 여론을 들끓게 만들었고, 정치인들과 외교관들은 이러한 여론에 떠밀려서 상대에 대한 최후통첩을 급박하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신중하게 생각하거나 흥분을 냉각시킬 기회를 잃어버린 채로 신속하게 최후통첩을 주고받던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았다.

 

전신은 경제활동의 스피드를 증가시켰으며, 경제를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를 반영하듯이 19세기 말엽에 경제신문들이 창간되었고, 1899년에는 미국의 현대적 광고회사 <제이 월터 톰슨>이 유럽의 기업가를 겨냥해서 영국 런던에 지부를 냈다. 미국의 본부와 영국의 지부는 전신을 이용해서 정보를 교환했음은 물론이다. 당시 국제화가 어느 정도로 진척이 되었는가하면, 독일 주식 시장의 주가가 전신을 타고 송신되어 러시아의 한 시골에서 반시간마다 그 동향이 게시될 정도였다.

 

19세기 경제의 국제화에 필수불가결했던 것이 전신이었다면, 20세기 후반의 세계화는 라디오, TV, 전화, 팩스, 데이터 네트웍, 컴퓨터 네트웍 등 미디어와 정보통신 네트웍의 세계화에 의해 가속되었다. 1962년 통신위성 텔스타(Telstar)가 유럽과 미국을 위성으로 처음 연결했으며, 1964년 미국과 유럽의 19개국이 서명한 인텔샛(Intelsat)이 발족했다. 얼리 버드(Early Bird)로 불린 인텔샛 1호가 1965년 발사되었고, 같은 해에 소련도 공산권 국가들과 인터코스모스(Intercosmos)라는 독자 위성체계를 만들었다. 인공위성은 그 이전까지는 일국에 국한되던 TV와 전화를 국제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빠른 통신이 ‘1차 대전’ 부채질

 

»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1956년에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해저 전화선이 놓였고, 전화선이 놓인 지 불과 10년 뒤에 100여년 맹위를 떨치던 대서양 전신 케이블이 해체되었다. 인공위성과 해저 전화 케이블 덕분에, 1950년께 3분에 800달러이던 미-유럽 전화는, 지금 0.2달러로 떨어졌다. 위성을 통해 미국에 방송된 월남전 실황을 보고 미디어학자 마셜 맥루헌이 ‘글로벌 빌리지’(global village) 즉 ‘지구촌’이라는 용어를 만들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이미 1970년대에 세계 경제를 ‘글로벌 쇼핑 센터’, ‘글로벌 공장’이라는 개념을 사용해서 묘사했다. 통신기술이 지구의 곳곳을 실시간으로 연결하기 시작하면서 세계화 즉 글로벌라이제이션은 실질적으로 가능해졌던 것이다.

 

홍성욱/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

출처 : Freiheit in mir
글쓴이 : 김문정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