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39> 삐딱한 시선이 세상을 명랑하게 만든다

ddolappa 2008. 11. 22. 18:27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39> 삐딱한 시선이 세상을 명랑하게 만든다

 

 


무한도전 125회 081011 : 대한민국을 디자인하다

 


무한도전 최초의 지적인 도전 과제


무한도전은 오락 프로그램에도 성장과 진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최초로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프로그램의 성장을 가로막았던 커다란 장애물 중 하나는 '초심 타령'으로 일관된 연예 기사들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일명 '쫄쫄이'(타이즈)를 입고 '몸개그'(슬랩스틱)를 하는 수준으로 이해했던 엉터리 초심론에 맞서 무한도전은 보란 듯이 '기네스 특집'을 기획해 건재함을 천명하기도 했고, 김태호 PD가 나서서 "무한도전의 초심은 실험성이다"고 주장하며 왜곡된 시선을 교정하기도 했다. 인터넷 언론의 가짜 초심론은 TV 비평이 프로그램 제작에 생산적인 피드백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도리어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손꼽을 만하다. 만일 사이비 초심론이 팽배하던 시절 '디자인 특집'이 방영되었더라면 '초심 타령'을 하던 기자들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사뭇 궁금해진다.

 

 

 


출연자들의 창의성과 센스를 살펴볼 수 있는 '디자인 특집'은 무한도전의 도전 과제가 육체적인 것에 한정될 필요가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다소 정적인 과제라 할 지라도 '무한 창의력 퀴즈', '수도꼭지 디자인 대결'과 같은 부수적 장치의 도입, 팀간 대결 구도 설정, 인터뷰 형식을 차용한 내러티브의 입체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오락적 즐거움이 창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문 디자이너들로부터 조언을 받아 디자인 설계, 제작의뢰, 부스 설치 등 디자인 공모전에 필요한 전 과정을 출연자들이 직접 총괄한 것 역시 '도전'이란 의미에 정확히 부합한다.


따라서 무한도전의 초심인 '실험성'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아우르는 고도의 창조성과 새로움을 지향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제작진에게만 요청되는 가치가 아니라 출연자들 전체에게 요구되는 덕목이기도 하다. 실제로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편에서 정석권 실장을 통해 몰래 돈가방을 들여오려던 박명수의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창조적인 과제 해결로 '돈가방 특집'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건 노홍철의 기지 덕택이었다. '몸개그' 역시 익숙한 동작의 반복이 아니라 창의성이 발휘될 때 더 큰 웃음이 유발된다는 사실 역시 잊어서는 안된다.

 


도전은 기회다


새로운 도전과제는 매번 출연자들을 시험에 빠뜨리고 당혹스럽게 만들지만 숨겨져 있던 그들의 재능과 새로운 면모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출연자들의 디자인 감각을 알아보기 위해 마련된 '무한 창의력 퀴즈'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냈던 사람은 정형돈인데, 익히 알려진 그의 지적 능력보다 놀라움을 주었던 것은 사물을 바라보는 그의 독특한 시각이었다. 수학의 무한대 개념을 이용해 문제를 풀이하는 그의 모습은 흡사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화가 신윤복(문근영 분)이 천재성을 드러냈던 장면을 연상케 했다.


평소에도 남다른 패션 감각을 소유한 노홍철은 말할 필요도 없고, '수도꼭지 디자인 테스트'에서 박명수가 보여준 기술적 개념('터치 시스템')에 대한 이해나 색채 감각 역시 그가 지닌 의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 '먹는 것'과 '바보 연기' 외에 별다른 재능이 없는 줄 알았던 정준하가 전문 디자이너도 인정할 정도로 놀라운 미술 재능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 역시 그의 능력이 발휘될 수 있는 과제가 제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점에서 과제는 출연자들의 재능, 성격, 캐릭터를 알아볼 수 있는 시험 무대이다. 무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하기도 하고, 능력에 따라 그들의 서열이 재배열되기도 한다. "로스트" 같은 미국 드라마에서 매회 출연하는 인물들 각자를 내세운 에피소드를 방영하듯 무한도전에서는 누구나 그 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다만 드라마의 경우 전체적인 시놉시스를 고려해서 촛점을 맞출 중요 캐릭터가 정해지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지향하는 무한도전에서는 모든 것이 출연자의 역량과 우연에 전적으로 맡겨져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지닌다.


따라서 새로운 과제에 도전하는 일은 자신이 지닌 새로운 능력과 면모를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기회이다. 자취를 하는 정형돈을 위해 집에서 음식물을 가져다 주고, 힘들 게 딴 야자 열매를 동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줘 잠시나마 정준하가 '훈남' 캐릭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도전이 가져다준 선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도전 과제가 캐릭터의 식상함을 탈피할 수 있는 만능열쇠가 아니라는 사실 역시 정준하를 통해 증명될 수 있다. 어느 순간 멈추어버린 그의 자기 탐구는 '식신'과 '동네 바보형' 캐릭터를 넘어선 매력적인 이미지를 더 이상 만들어내지 못한 채 진부한 자기 복제만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특전사 특집'이나 '창작 동요제'에서 볼 수 있듯 그와 동료들 역시 이러한 문제점을 충분히 인식은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작년 연말부터 준비해온 '베이징 올림픽 특집' 같은 거대한 프로젝트에 매진하다 보니 정준하를 비롯한 다른 출연자들의 캐릭터를 정비하는 일을 미룰 수밖에 없었고, '지못미 특집' 등 비교적 최근에 이르러서야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정준하의 태도 변화에서 가장 분명하게 감지된다.


'지못미 특집'에서 정준하는 '서울 구경 특집' 때와는 달리 대중과 접촉하는데 지극히 소극적 태도로 일관되고, 심지어 주눅이 들어있는 모습이 집중적으로 포착되고 있다. 이는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촬영도중 발생한 소위 '기차 사건'으로 인한 것으로 카메라는 위축된 그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비추며 그가 반성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디자인 특집'에서 정준하는 이상하리만큼 명랑하게 더욱 모자란 모습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 전에 방영된 'PD 특공대' 편에서 자신의 바보 캐릭터에 대해 푸념을 늘어놓던 것과는 전혀 상반된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는 심지어 자신에 대한 부정적 어조의 기사를 언급하며 자신은 딜레마와 싸우고 있다고 말하기조차 한다.1) 

 

 



문제를 회피하는 듯한 소극적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노출시키고 이에 맞서는 적극적 태도 변화는 전에도 언급했듯 일종의 승부수라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이 출연자들을 아름답게 포장해온 프로그램도 아니고, '좀비 특집'처럼 실패한 촬영분을 과감하게 새로운 오락적 재미로 만들기도 했던 대담함을 보여왔기 때문에, 정준하의 캐릭터에 대한 처방은 어떤 면에서 지극히 무한도전다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준하 스스로도 '딜레마 사우루스'로 변신해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지극히 바람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문제를 회피하기 보단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해결의 실마리를 비로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지금 정준하가 싸움을 벌이는 상대는 자신의 행동을 유머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이나 '정준하 딜레마'같은 기사를 써대는 언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놓은 나쁜 이미지 혹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르겠다.

 


진실과 허구 사이


'디자인 특집'에서 캐릭터의 변화가 눈에 띄는 또 한 사람은 바로 유재석이다. 유재석은 자신과 콤비를 이루며 활동해왔던 '2인자' 박명수로부터 버림을 받고, 디자인 팀장의 자리 역시 '굴러들어온 막내' 전진에게 내주고 마는 수모를 당했다. 개인 인터뷰에서 유재석은 섭섭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표출하기도 했는데, 사적 감정을 잘 내색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그로서는 의외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그것은 그의 진심이었을까, 아니면 캐릭터를 연기한 것일까?

 

 



타이라 뱅크스의 '도전! 슈퍼 모델'이나 '프로젝트 런웨이' 같은 해외 인기 리얼리티쇼에서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흔히 인터뷰 형식을 사용해왔다. 참가자들은 일종의 증인 자격으로 호출되어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하고 당시의 상황을 전달하며 쇼에 리얼리티를 불어넣게 된다. 동시에 인터뷰 형식은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치로 활용되기도 한다. 서로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출연자들의 인터뷰를 교차편집해서 형식화된 쇼의 포맷에 생기를 불어넣기도 한다.


무한도전이 '모델 특집', '무인도 특집', '댄스스포츠 특집', 'MT 특집' 등 다양한 에피소드들에서 사용한 인터뷰 형식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 결혼했어요'의 인터뷰 형식을 패러디한 'MT 특집'은 예외적 경우라 할 수 있다. 패러디된 인터뷰 형식은 사실성을 높이거나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웃음을 주기 위한 형식의 패러디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디자인 특집'의 인터뷰 형식은 조금 기묘한 구석이 있다. 출연자들은 과장된 몸짓으로 각자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인터뷰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적 요소로 볼 수 있다. 출연자들은 상대의 실수나 행동을 비난하고 음해하며 '무한이기주의'를 몸소 실천한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출연자들 간의 갈등 양상은 디자인이란 정적인 소재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며 사건을 입체적으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능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정색을 하며 섭섭함을 토로하는 유재석의 인터뷰나 진지함 자체가 캐릭터인 전진의 인터뷰 등은 그것이 진심인지 아니면 연기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박명수의 영어 스펠링 실수를 비아냥거리는 노홍철의 인터뷰 역시 충분히 납득할 만한 근거가 제시되었기 때문에 1g의 본심도 섞여 있지 않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무한도전이 '리얼'의 요소를 다루는 방식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다. 그 이전까지 '리얼함'은 허구적인 쇼에 긴장을 일으키는 요소 정도로 받아들여졌다면, 이제 '리얼'은 허구적 요소와 뒤섞여 분간하기 어려운 어떤 것이 되어버렸다. 더 나아가 '리얼'함은 실제와 허구 사이에 있는 어떤 것이 되어, 다시 말해 옷감과 옷감 사이로 언뜻 내비치는 살결처럼 위태로우면서도 매혹적인 신기루의 형상을 하고 시청자들을 유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있기 때문에 위험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강한 유혹의 손길로 관심을 끌어모으게 된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는 현상은 출연자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 편에서 노홍철은 박명수가 촬영인지 실제인지 구분하지 못하고 돈가방에 집착하는 행동을 보여 더 이상 함께 촬영하지 못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또한 '우리 결혼했어요'에 부부로 함께 연기하는 출연자들이 실제 결혼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 때도 있고, 심지어 자신의 상대가 다른 이성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질투심이 생길 때가 있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던 것 역시 동일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시청자들이 소위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시청하며 느끼는 쾌감 역시 그것이 단순히 '리얼'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연출된 상황 속에서 연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것이 사실일 지 모른다는 일종의 혼란과 착각이 눈을 뗄 수 없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와 허구 사이의 균형이 깨져서 모든 것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쇼의 즐거움은 환멸로 경험되고, 반대로 '리얼'한 요소만을 강하게 주장하게 될 때 가학적 혹은 선정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최근 '1박2일'이 받았던 비판은 후자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명하다고 생각했던 실제와 허구 간의 경계가 느슨해지고 있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것은 위기의 한 징후이고, 따라서 '리얼 버라이어티쇼' 혹은 '리얼리티쇼'는 그러한 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지목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선 우리가 분명하다고 알고 있는 현실 혹은 실제는 사회-문화적 구성물일 뿐이다. 쉬운 예로, 천동설이 보편적 진리로 통용되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이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지동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시대에 현실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서로 동일하지 않다. 뉴튼적 역학이 지배하던 시대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의 원리가 관철되는 시대의 현실 개념 또한 서로 다르다. 개를 식용으로 하는 문화와 그렇지 않은 문화 역시 서로 상이한 현실관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사람의 목소리가 주도 미디어인 시대에 살았던 사람의 현실과 라디오, 텔레비전, 인터넷과 같은 전자기 미디어가 생활 환경을 구성하고 있는 시대의 사람의 현실이 동일하게 지각되지 않을 거란 사실 역시 분명하다. 따라서 '현실'이라고 간주되는 것을 판별할 수 있는 초시간적이고 초월적 기준 같은 것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한 사회의 역사, 문화, 경제, 정치, 미디어 등 복합적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움베르토 에코의 대중문화 비판서인

"묵시론자와 순응론자"(한국어 제목 : 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


연출과 실제 간의 경계 해체를 대중들이 쇼 오락으로 소비하는 우리 시대의 모습은 분명 낯설지만 새로운 문화적 풍경이며, 따라서 성급한 비판과 맹목적 열광 어느 쪽도 새로운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이다. 이 두 태도는 움베르토 에코가 이미 1960년대에 제시한 바 있는 "종말론적 태도"와 "순응론적 태도"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원제-종말론자와 순응론자; 한국어판 제목-스누피에게도 철학은 있다) 전자가 대중문화를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대신에 몰락의 징후로 해석하고 있고, 그래서 구체적 현실에 대해 무지한 모습을 보인다면, 후자는 주어진 현실에 매몰되어 전체를 통찰할 수 없는 맹목의 상태에 놓여 있게 된다. 에코는 이들 간의 "대중문화의 얄타 협정"을 체결해 대중문화를 분석할 것을 제안한 바 있는데, 이는 현재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요청이라 할 수 있다.

 


삐딱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라!


디자이너 김영세가 디자인을 "엉뚱한 일을 하는 것"으로 정의하며, 무한도전의 출연자들과 디자이너들 간의 공통점을 지적한 것은 어떤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코미디언과 디자이너는 평범한 일상적 관찰 시각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산 정상에 올라서 식사를 하려고 할 때 구조헬기가 일으킨 흙먼지 바람 때문에 당혹스러워 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도 희극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코미디언의 시선을 송창의 PD는 "삐딱한 시선"으로 부른 바 있다.2)

 

 

 


무한도전에서 주변의 사물을 갖고 개그 대결을 펼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의 시선 속에 '옷걸이'는 옷을 걸어 두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아코디언과 운동기구로 변신한다. '변기 커버'도 화장실에서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라 의자, 의료 보조기구, 유아용 놀이기구, 악기 등으로 다양하게 변형된다. 일상에 파묻혀 살아가는 성인들에게는 쓰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던 사물들이 호기심으로 가득찬 코미디언들의 시선 속에서 도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유희의 대상으로 전환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코미디언의 행동은 흔히 아이들 장난처럼 유치하다거나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러나 '아이의 시선' 혹은 '광인의 시선'처럼 보이는 엉뚱한 발상이 20세기 예술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은 남자용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여 세상에 내놓게 된다. 기성 예술에 대한 조롱과 도발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예술작품과 일상적 사물 간의 경계 나누기에 의문을 던지며, 예술의 대상이 될 만한 특별한 속성을 지닌 사물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사물도 '변용' 과정을 거쳐 예술작품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마르셀 뒤샹의 "샘"(1917)

 

뒤샹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앤디 워홀의 "브릴로 상자"(1964)

참고로 "브릴로"는 세제 상품명이다.



뒤샹의 도발적 상상을 통해 예술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예술작품으로 지각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문제로 전환되었다. 나아가 모든 일상적 사물들이 예술작품으로 변용될 수 있다면 그러한 사물들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잠재적으로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예술의 민주화를 뜻한다. 전통적 의미의 예술 혹은 예술가가 죽음을 맞이한 순간 모두가 삶의 예술가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 사물을 생산하는 디자인의 문제는 우리의 삶과 직결된 문제이다. 어떠한 디자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질과 인생관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디자이너가 자신의 직업을 눈에 띄는 외양과 현란한 색감으로 상품을 장식하는 일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에 따라 생산된 제품은 일시적인 유행을 만들어 경제적 이익을 산출하게 될 지 모르겠지만, 이윤 창출을 위해 빠른 소비를 부추겨 결과적으로 주변환경을 산업 쓰레기로 뒤덮는데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지 모른다. 한 마디로 "삶을 파괴하는 디자인은 폭력이다."3)

 

 



'디자인 특집'에서 아쉬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무한도전이 도전한 공공 디자인은 도시 공간의 효율적 배치와 미관을 살려 도시의 특성을 표현하는 작업을 일컫는다. "주변과의 조화는 공공 디자인의 기본"이나 "사회와 함께 하는 공공 디자인"과 같은 자막들은 공공 디자인의 정의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담고 있다. 그리고 정형돈이 개성이 넘치는 서울의 거리로 나가서 현장답사를 하는 장면도 무심코 지나쳤던 주거공간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디자인 강국이 경제 선진국입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결말을 맺은 것은 전체적인 문맥과도 어긋날 뿐더러 디자인을 자본의 이윤 극대화를 위한 고부가가치의 수단으로 다시 끌어내리고 있는 오류를 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동물이 주어진 환경에 그대로 적응하는 반면, 인간은 자신의 요구에 따라 환경을 변화시키면서 적응하는 존재이고, 그래서 디자인은 인간과 환경 간의 인터페이스를 구축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마지막 장면에서 다시 끌어들이고 있는 디자인 개념 안에는 우리 사회가 맞이할(아니면 이미 맞이한!) 재앙의 씨앗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천박하게 이해된 디자인 개념에 근거해 형성된 사회적 인터페이스는 생명을 죽이는 반생태학적 도시공간의 비전만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원된 청계천의 모습

 

환경 친화적으로 설계된 양재천의 모습

 

           독일의 본(Bonn) 시내를 가로지르는 라인강의 모습



대표적인 예로 복원된 청계천은 디자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저급하기 짝이 없는 디자인 철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연스러운 물길을 콘크리트를 처발라 인위적으로 만들고, 분수 같은 조형물들이 빼곡히 들어앉은 하천에서 생명이 숨쉴 여유 따위를 찾아볼 수는 없다. 세계의 어떤 도시에서도 도심을 가로지는 하천를 조야한 조경 공사로 치장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이 인위적으로 덧붙인 장식물보다 세월 따라 자연이 만드는 풍경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대로 된 하수도 시설이 마련되지 않아 악취와 녹조류 현상과 같은 환경문제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자연스러운 하천의 흐름을 막아놓아서 한강물을 인위적으로 끌어와 정화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관리 유지비가 해마다 증가해 2008년에는 79억의 예산이 책정되었다고 한다.4) 다른 나라에서는 수년간의 시간을 두고 해야할 치수사업을 불과 2년 만에 마쳤다 하니 대표적인 전시행정에 졸속행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청계천 밑에 있던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수표교 역시 제대로 복원되기는 커녕 개발지상주의의 이데올리기 앞에 무참히 파괴되거나 유실될 운명을 맞이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추진했던 사람의 디자인 철학에 역사란 개발의 걸림돌에 불과했던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뉴라이트의 등장은 수표교가 처한 운명에서 이미 예고되었던 것인지 모른다. 21세기의 국가적 비전이란 것도 다시 7,80년대의 개발독재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라는 사실 또한 청계천 복원 사업이 이미 보여주었던 것인지 모른다. 2000년부터 청계천 복원 사업을 구상해왔던 고 박경리 선생이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진행되고 있는 사업에 대해 우려하는 기사를 쓰자 "그걸 본인이 썼겠냐"며 대문호를 조롱했던 저질 디자이너에게서 미래를 내다보는 긴 안목과 문화의 본질을 내다보는 투시력 따위를 기대했다면 큰 오산이다.5)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 조감도

 

생태계 복원이란 명목 하에 자라고 있던 수풀을 잘라내고

철근 콘크리트로 막아놓은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의 일부 모습

 

갈대, 물억새, 수양버들 군락으로 유명한 암사동 생태보존 지역이

지금은 생명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황무지로 변했다.



국토를 갈기갈기 찢어놓으려는 음모가 여론에 떠밀려 잠시 주춤한 사이 이번에는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란 거창한 이름의 개발주의 망령이 다시 슬그머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내년 서울시 예산 중 2188억원이 책정된 이 사업은 여의도와 용산 이촌지구 등에 국제여객선터미널을 조성해 상하이, 톈진, 칭다오 등 중국 주요 도시를 관광할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라 서울을 '항구도시'로 완전히 탈바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6) 디자이너의 출신 성분이 섬나라 출신이라 물을 유독 좋아하고, 할 줄 아는 거라곤 땅을 파는 것밖에 없으니 틈만 나면 멀쩡한 국토를 뒤집어 엎을 계획 밖에 없는가 보다.


하지만 이 사업을 위해 보전 가치가 높다며 서울시 스스로 2002년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강동구 암사동 생태경관 보전지역을 포클레인을 동원해 갈아엎고, 녹화사업을 한다며 자연이 가꾸어 놓은 수풀을 다 베어버리고 시멘트 구조물 위에 부직포를 깔아놓은 광경을 고 박경리 선생이 목격하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 과연 이래도 디자인이 삶을 장식하는 활동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인가?

 

 

고 박경리 선생의 영정 사진 모습

 


“청계천 사업을 주관하는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맹세코 정치적 목적을 떠나 이 대역사를 진행하고 있는지…만일 정치적 의도 때문에 업적에 연연하여 공기를 앞당긴다면, 추호라도 이해라는 굴레에 매달려 방향을 개발 쪽으로 튼다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다.… 지금의 형편을 바라보면서 미력이나마 보태게 된 내 처지가 한탄스럽다. 발등을 찧고 싶을 만치 후회와 분노를 느낀다.” (박경리)

 

 

by ddolappa

 

 

1. ‘무한도전’, 정준하 딜레마? 시청자들 불만의 소리
http://media.daum.net/entertain/all/view.html?cateid=1005&newsid=20080927203021329&p=poctan


2. 오락프로그램의 대부 <세친구> 송창의 PD, 그가 만드는 웃음의 비밀
http://h21.hani.co.kr/section-021023000/2000/021023000200008090321084.html


3. 디자인올림픽에 유쾌하게 딴지 걸기 - 서울디자인올림픽 평가토론회, ‘삶을 파괴하는 디자인은 폭력이다’
http://culturenews.tistory.com/entry/디자인올림픽에-유쾌하게-딴지-걸기-서울디자인올림픽-평가토론회-‘삶을-파괴하는-디자인은-폭력이다’


4. 청계천 방문객 급감한 이유는?
http://media.daum.net/society/environment/view.html?cateid=100002&newsid=20081014112422384&p=nocut


5. [소설가 박경리씨 특별기고]청계천, 복원 아닌 개발이었나!
http://www.donga.com/fbin/output?f=ccs&n=200403050238&main=1


박경리 선생 “이젠 ‘청계천표 상추’ 를 꿈꾸자”
http://www.hani.co.kr/kisa/section-002004000/2005/09/002004000200509261900585.html


박경리와 MB, <토지>와 청계천 
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48


6. 서울 항구도시화 된다…한강르네상스 2차 프로젝트 공개
http://media.daum.net/society/affair/view.html?cateid=1010&newsid=20070701202007954&p=kukminilbo


[사설]생태 보전지역마저 갈아엎는 불도저 행정
http://media.daum.net/editorial/editorial/view.html?cateid=1053&newsid=20081121233322478&p=khan


잘 자라는 풀과 꽃 베어내는 것이 녹화사업?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80902120004123&p=ohmynews


암사동 생태보존지역 ‘갈대 실종사건’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others/view.html?cateid=100011&newsid=20081120203105796&p=han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