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40> 페넬로페의 천짜기

ddolappa 2008. 11. 24. 10:12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40> 페넬로페의 천짜기

 

 


무한도전 126회 081018 : 대한민국을 디자인하다 2부

 


상황극을 넘어 드라마로


무한도전에서 '서사' 혹은 '이야기'라 불릴 만한 것은 대개 캐릭터 간의 조밀한 관계에서 만들어졌다. '아버지' 박명수와 '어머니' 정준하가 말다툼을 하면 '주간 시트콤 하와 수'가 되었고, '늙은 악마' 박명수와 '젊은 악마' 노홍철이 대결을 펼치면 '데블매치'가 이루어졌다. 도전 종목이 바뀌더라도 정교하게 다듬어진 캐릭터는 거의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무한도전은 성격 변화가 거의 없는 시트콤의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한 회 방송분은 짧막한 꽁트같은 상황극 몇 개와 말장난 같은 재담, 시시때때로 터지는 몸개그로 구성되었다.


조금 더 긴 호흡의 이야기는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와 '28년 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원안대로 진행이 되지는 않았지만 대략적인 스토리 라인을 갖춘 시놉시스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돈가방 특집'에서도 시트콤적 요소가 여전히 발견되고 있지만 이야기의 처음과 끝은 일정한 논리적 인과관계를 맺고 있는 내러티브를 갖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시청자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시청한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형식으로 찍은 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돈가방 특집'은 무한도전이 호흡이 긴 이야기의 매력을 발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디자인 특집'이 '돈가방 특집'과 연관 관계를 맺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데, 제작비 전액을 걸고 대결을 벌이는 두 팀 간의 팽팽한 신경전이 정교한 편집을 통해 서사적 통일성을 갖춘 한 편의 이야기로 직조되고 있다. 디자인 올림픽 공모전을 준비하는 다소 정적이고 딱딱한 과정들은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 혹은 이야기를 내용상 구분하는 챕터의 역할로 소급되며, 그러한 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연관성 있는 스토리에서 오락적 재미가 생겨나고 있다.

 

 



전국체전 도전이라는 거대 프로젝트에 도전한 '에어로빅 특집'이 그 이전에 했던 '모델 특집'이나 '댄스 스포츠 특집'과 차별화된 지점 역시 이러한 내러티브 전개 방식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이전의 대형 특집들이 '리얼리티'의 성격을 강조하다 보니 극적 내러티브는 부족했다. 반면 '에어로빅 특집'의 경우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구성 요소들이 다수 도입되고 있는데, 대표적으로 종암동 에어로빅 강사는 출연자들을 독려하는 정신적 지주로 상징화되어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수시로 등장해 극적 긴장감을 만들어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왜 내러티브가 중요한가?


무한도전이 이처럼 호흡이 긴 내러티브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표방하는 여타의 오락 프로그램들과 차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대본을 최소화하고 출연자들의 재량에 의해 진행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연속성을 갖춘 사건의 흐름을 만들어 내기란 어렵다. "패미리가 떴다"의 경우 집주인이 정해준 '해야 할 일들'과 챕터의 소제목을 통해 부분적인 통일성은 유지되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부재한다. 쉽게 말해, 짧고 불연속적인 이야기에서 "그래서,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는데?" 하는 질문 자체가 불가능할 뿐더러 무의미하다.


하지만 노홍철과 동맹을 맺고 있다가 그에게 속아 돈가방을 빼앗긴 박명수의 다음 행동은 충분히 호기심을 유발할 만한 것이며, 그가 노홍철로부터 돈가방을 다시 빼앗는가 혹은 못 빼앗는가에 따라 사건 전체의 전개 방향이 달라지게 된다. 또한 시시각각 변화하는 출연자들의 감정 상태나 심리의 변화를 풍부하게 담아내는 데도 긴 이야기가 보다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충분한 길이의 이야기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세월의 흐름에 따른 인간의 변화를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에어로빅 특집'에서 박명수는 딸이 태어나기 이전에 촬영된 1탄에서의 모습과 출생한 이후의 모습이 점차 달라지고 있다. 급기야 3탄에서 그는 노홍철과 유재석에게 직접 음식을 떠먹이는 '부정'(父情)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장면에서 그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고 자막 역시 전과 달리 장난스럽지 않고 진지하게 그 모습을 다루고 있다.

 

 



김태호 PD는 "캐릭터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감이 없어진다거나 하는 때도 있는데, 어떻게 그걸 보여주느냐가 걱정이다. 이 사람들의 본질이 변한 것은 아니다. 이제는 그런 내부적인 것들을 끄집어내고 싶다."고 말한 바 있는데, 시간의 형식으로서 내러티브에 대한 관심은 결국 삶 그 자체를 화면 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팬들과 함께 늙어가고 싶다는 그들의 소망은 보다 긴 호흡의 이야기 구조를 차용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통해 무한도전의 탐구 영역은 보다 넓고 깊어진 삶의 심층적인 영역으로 뿌리를 확장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토끼와 거북이


'디자인 특집'의 핵심적 이야기는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기본 구조로 삼고 있다. 디자인 부스 설치작업에서 상대적으로 앞서 있다고 생각한 박명수 팀으로부터 비웃음과 멸시를 받은 유재석은 근면과 성실함으로 승리를 거둔 거북이처럼 자신들이 승리할 거라며 응수한다. 카메라는 열심히 부스 꾸미기에 한창인 전진 팀과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박명수 팀을 대조시키며 유재석의 말을 시각화하고 있다. 실제 결과에서도 전진 팀이 간발의 차로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우화의 교훈은 재확인된다. 그래서 '토끼와 거북이' 우화는 '디자인 특집'의 전체 서사를 집약해서 반영하고 있는 '이야기 속 이야기'(mise en abyme)이다.

 

 



박명수 팀과 전진 팀의 구성원들을 비교해봤을 때에도 박명수 팀이 '토끼'의 역할에 보다 적합한 것처럼 보인다. '수도꼭지 디자인 테스트'에서 의외의 실력을 보여준 박명수, 무한도전 내에서 아이디어 뱅크로 알려진 정형돈, 평소 남다른 패션감각을 보여준 노홍철로 이루어진 팀 조합이 유재석, 정준하, 전진 조합보다 능력면에서 객관적으로 앞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LED, 태양열 전지, 터치 시스템 등 기술적 지식에서도 우월한 면모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자부심은 자신감을 넘어 자만심을 향하고 있었다.


반면 전진 팀은 유재석과 정준하가 초등학생들처럼 다투는 바람에 팀명도 제대로 정하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게 된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팀을 이끄는 박명수와 달리 굴러들어온 신세인데다 팀의 막내인 전진은 팀장이지만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정준하를 약올리는데 재미를 붙인 유재석에 동조할 뿐이다. 화면은 너무나 진지한 박명수 팀과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전진 팀을 대비시키며 두 팀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자막은 박명수 팀의 과도한 자신감이 일종의 '오만'일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상황을 '오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주지시킨다. 또한 팀리더인 박명수의 몇 가지 단점들을 열거하며,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고 있지만 언제든 '역전'될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한다.


박명수는 우선 팀회의를 진행하며 정형돈의 의견을 종종 묵살하는 모습을 보여 불화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정성 들여 만들어온 자신의 찰흙 모형이 팀원들로부터 거부당하자 그 자리에서 파괴하는 난폭함을 보여 공포 분위기를 조정하기도 했다. 박명수는 제작의뢰 과정에서 애초의 계획에서 벗어난 시안을 너무나 손쉽게 변경하는데 동의하고, 그나마 제대로 된 확인작업을 거치지도 않아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를 재연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각 팀의 제작모형이 배달되어 극적 전환이 이루어지는 장면은 중장한 배경음악과 긴박한 표정 변화 등을 통해 고대 비극에서 신이 모습을 드러내는 극적 '에피파니'(신의 현현)의 순간처럼 '과장'해서 표현되고 있다. 하지만 유재석 팀의 감격이 과장되었더라도 설득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 이전에 박명수 팀으로부터 철저하게 조롱당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인과관계에 기초해서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개연성'을 지닌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사건의 열쇠 박명수


그런데 사건이 '역전'되는 결정적 요인이 주의력이 부족한 박명수의 '캐릭터'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내러티브는 '성격극'의 특성을 지니게 된다. 박명수가 수정 시안을 꼼꼼하게 검토하지 않은 이유가 제작의뢰 업체나 제작진의 고의적 실수나 그럴 수 밖에 없는 어떤 필연적 상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한도전 내에서 그가 맡고 있는 '캐릭터'의 성격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명수가 현실에서는 능력있는 사업가이지만, 무한도전에서는 헛점투성이의 캐릭터라는 사실이 암묵적으로 전제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 전개라 할 수 있다.

 

 



이런 시트콤적 장치는 진팀이 이긴팀의 제작비 전액을 책임진다는 계약 조건에서도 발견된다. 이겨봐야 본전치기에 불과한 게임을 현실에서 해야 할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승리한 팀이 밝혀졌을 때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고 나몰라라 하며 회의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장면 역시 지극히 희극적 상황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디자인 특집'의 오락적 재미는 두 팀 간의 예측할 수 없는 승부가 다양한 서사적 장치를 통해 치밀하게 구성되면서 생겨나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우화, '오만'(hybris), '오인'(anagnorisis), '역전'(peripeteia), '에피파니'(epiphania)와 같은 플롯의 구성, '성격극' 혹은 '시트콤'의 요소 등이 적절히 배합되어 긴 호흡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야기의 끝은 죽음이다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가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에서처럼 사전에 준비된 시놉시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화면 편집과 자막에 의해 구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여러 날에 거쳐 이루어진 촬영분이 편집을 통해 조립되면서 서사적 텍스트로 직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성취를 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PD 특공대' 편을 통해 보았듯 TV 화면의 현실은 편집에 의한 결과이며, 그것은 실제 현실의 단순한 재현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이다.


페넬로페가 남편 오디세우스가 돌아오길 기다리며 자신에게 몰려드는 구혼자들을 물리치기 위해 천을 짰다가 풀어버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비극적 종말을 지연시켰듯이, 무한도전은 빨리 결과를 확인하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의 욕구를 인터뷰 형식과 다양한 편집 기술을 동원해 지연시키며 한 편의 촘촘한 텍스트를 엮어내고 있다. 이야기를 멈추게 되는 순간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세헤라자데의 운명처럼 평범한 사건의 전개는 왕보다 더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시청자들로부터 외면받아 죽음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떤 분야에 도전하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하는 점인지 모른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