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47>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ddolappa 2008. 12. 10. 10:09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47>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지지 않으면

 

 


무한도전  133회 081206 : 2009 달력 특집

 


2008년을 돌아보며


작년에 이어 올해도 계속된 무한도전의 '달력 특집'은 수익사업에 쓰일 달력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무려 1년 간의 긴 촬영기간을 갖고 완성된 특집이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인 편집이 매끈하지 못하고 약간 늘어지는 듯한 흠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그러한 단점을 충분히 커버할 만큼 뛰어난 오락적 재미와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에어로빅 특집'에서 문제로 거론되었던 '자막'이 다시 예전 수준으로 돌아온 것 역시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그간 무한도전이 보여준 역량에 비추어봤을 때, 연출, 자막, 편집 등 전반적인 면에서 수준미달이었던 '에어로빅 특집'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일부 제작진의 부재할 시 언제든 반복해서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무한도전 제작진이 앞으로도 꾸준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과제로 남을 듯하다.

 

 



'2009 달력 특집'에서 눈여겨 봐두어야 할 또 다른 대목은 '무한뉴스'를 통해 올해 동안 무한도전이 지나온 길을 가감없이 평가 및 정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부와 모략이 판쳤던 3주 암흑기'였던 '박반장 시대'로 시작해서, '자아와 시청률을 동시에 상실했던' '인도특집', '모래와 욕만 야무지게 섭취했던' '중국 황사 특집', 현재는 원작자가 고소를 취하해서 원만하게 해결된 상태이지만 '안타깝게 법원행'을 가야 했던 '100회 기념 개사' 사건, '목소리가 커서 슬픈 정준하가 기차 탑승'을 해 논란이 일어났던 '돈가방 특집'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개별 에피소드들을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무한도전 장외에서 벌어진 논란 역시 빼놓을 순 없는데, '박반장' 박명수 아고라 퇴출 서명 사건, 숭례문 화재 성금 기부 논란, 보좌주교의 무한도전 비판 사건, '라인업'에 대한 언론들의 일방적인 여론몰이와 무한도전 초심 타령 기사, 하하의 공익 근무 논란, 무한도전을 이용한 작가 임성한의 네거티브 마케팅 논란, 노홍철 피습 사건, 무한도전 청와대 방문 논란, 결혼 이후 박명수의 부진 논란, 노홍철의 코디 임금 사건, 여성팬들에게 식음을 전폐할 정도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유재석의 결혼 발표 등 참으로 버라이어티한 논란과 사건이 그 어느 해보다 뜨겁게 일어났던 한 해였다.

 


대중문화의 축복이자 비극


여기에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무한도전이 일개 오락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나의 '문화적 현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한도전이 '라인업', '무한걸스', '1박2일', '우리 결혼했어요', '패미리가 떴다' 등과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를 표방하는 후속 프로그램을 양산했다는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한도전은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에서 제작, 유통, 소비되는 대중문화 전체에 대한 전방위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논쟁적이고 뜨거운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올해 무한도전을 특징짓는 세 가지 키워드인 '사전제작', '이종교배', '시사성 강화'는 열악한 방송 제작 환경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온 나름의 해결책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제작되고 또 가장 많이 사랑받는 드라마가 여전히 쪽대본과 초치기 촬영에 의해 제작되어 '미드'와 '일드'에 한껏 높아진 대중들의 눈높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반면, 무한도전은 오락 프로그램 최초로 '사전제작'을 시도해 그 완성도 면에서 다른 오락 프로그램들과 질적으로 차별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영화, 스포츠,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들과의 접목을 통해 오락 프로그램이 다룰 수 있는 소재의 폭을 넓히는 한편, 환경보호, 대체에너지 개발, 명절 증후군 같은 시사적 문제도 무한도전식으로 풀어내 오락적 재미에 깊이를 더했다.


하지만 무한도전에 담긴 진지한 문제의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오직 시청률로만 모든 것을 평가하려 했고, 무한도전 초심 타령, 정준하 욕설 파문 같은 거짓 논란만 부추겼던 인터넷 언론은 저급한 TV 비평의 수준을 그대로 노출시키며 대중문화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언론 자신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입증해 보였다. 

 

 



하하가 인도 특집에 입고 나왔던 상의에 새겨진 '죽지 않아'라는 문구가 일반적인 디자인이 아니라 하하가 수년 동안 노래와 유행어를 통해 소개해 잘 알려진 '하하의 특화된 디자인'이라는 사실을 근거로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무한도전에 경고를 주었던 사건은 판단 근거도 납득하기 어려웠을 뿐더러, 방송에서 간접광고(PPL)를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현재의 방송 환경에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필요로 하는 사건이었다. 100회 기념 개사 사건 역시 패러디 문화가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활성화되고 있는 현상황에서 저작권 보호법의 보완과 수정을 필요로 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킨 사건이었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언론에서 전혀 비중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그 어느 해보다 풍성하고 품격있는 에피소드들을 선보였던 무한도전의 발자취가 자조적으로 희화될 수 밖에 없는 풍경은 무한도전이 수용되고 있는 우리 대중문화의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을 시청할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인들에게 축복이지만, 무한도전이 제대로 평가받고 있지 못한 현실은 우리 대중문화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빛나는 뚝심


올해 무한도전을 특징짓는 세 가지 키워드 중 하나인 '사전제작'의 성과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는 '달력 특집'은 기획 자체만으로도 그 가치가 빛나고 있다. 한 치 앞도 예측하지 못하고 단발성 공약과 미봉책 수준의 정책만을 남발하고 있는 정부 정책이 국민들의 혼란만 가중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일개 오락 프로그램이 1년여 년의 장기 프로젝트를 세워 제작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놀라움을 주기 때문이다. 일정한 광고 수익을 발생시킬 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으면 수개월 만에 프로그램 폐지를 단행하는 현 상황에서 이처럼 장기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진행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제작진의 거시적 안목과 뚝심, 그리고 출연자들의 희생 덕택이다.

 

 



제작진의 치밀한 촬영 계획과 사전 조사가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적게는 3,4개에서 많게는 8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시키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프로그램을 위해 일주일에 4,5일 이상의 스케줄를 비워두고 꼭두새벽에 나와 밤 늦은 시간까지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해 냈던 출연자들의 희생과 열정이 없었다면 그러한 기획 자체가 불가능했을 지 모른다. 그들이 이처럼 무모하게 느껴지는 계획을 세우고 뚝심 하나로 밀어붙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단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싶다는 목표. 물론 그러한 노력이 매번 성공을 거두었던 것은 아니지만, 단 10분량의 방송을 제작하기 위해 정규 촬영일 이외 시간과 인력을 추가로 투자하는 것과 하루 동안의 촬영을 해서 2,3주 가량의 방송분을 만드는 것은 프로그램의 질에서 차별화될 뿐만 아니라 제작 마인드 자체가 전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세 가지 비밀


'달력 특집'의 경우 1회 방송분으로 연장해도 될 만한 분량의 촬영 에피소드들이 응축되어 전체를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형식과 내용 면에서 그 자체로 독립적인 자기 완결적 구조를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달력 특집'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문학에서 이러한 형식을 '단장'(Fragment)이라 부르는데, 대표적인 예로 비평가 롤랑 바르트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사랑에 관한 단상들을 묶어낸 "사랑의 단상"(Fragments d'un discours amoureux)이 있다. 혹은 '달력 특집'을 '달력 사진 촬영'이란 소재로 묶인,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2005) 같은 옴니버스 영화로도 볼 수 있다.

 

 



'달력 특집'을 시청하는 또 다른 방식은 마치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처럼 남겨진 단서와 증거를 수집해가며 감추어진 메세지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이제는 이미 많이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무한도전 제작진은 DC 무한도전 갤러리에서 제작된 리뷰북을 교묘한 방식으로 '인증'해주었다. 팬들을 향한 제작진의 은밀한 배려와 감사의 표시가 그 첫 번째 비밀인 셈이다.


두 번째 비밀로 현재는 군복무 중인 하하가 '별똥별'이 그린 2009 달력 그림에서 빠짐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2010 컴백'이란 내용으로 하하의 친필사인이 담긴 달력의 일부가 공개되기도 했는데, 이는 예능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김태호 PD의 평소 신념이 반영된 것으로 출연자에 대한 무한도전의 가족애 혹은 형제애를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비밀은 '무한뉴스'의 나레이션 안에 담겨 있다. "아부와 모략이 판쳤던 3주 암흑기"였던 '박반장 시대'를 나레이션은 "소 뒷걸음 치다 쥐잡기로 '이산 특집'에서 시청률 30% 돌파에 성공했지만, 진행미숙, 리더십 부족, 팀 분위기 저해 등으로 재신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라고 정리한다.


그런데 과거에 있었던 사실에 대한 논평이기 때문에 과거형 시제가 사용되어야 맞겠지만, 이 문장은 "커지고 있습니다"라는 현재형 문장으로 끝맺고 있다. "진행미숙, 리더십 부족, 팀 분위기 저해"라는 표현 역시 심상치 않기는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 '박반장 시대'는 끝난 게 아니라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진행미숙, 리더십 부족, 팀 분위기 저해"라는 부덕으로 인해 "재신임"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부연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이것이 어떤 메세지를 전달하는가는 분명하다.

 

 


 

'좀비 특집'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을 통해 정치적 메세지가 전달되었다. 백신 개발자인 김보민 박사는 죽으면서 "(2달전) 한국에서 시작된 분노 바이러스가 이제 전 지구,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라는 메세지를 녹음해 두었다. 여기에서 "2달전"은 자막이 아닌 성우의 목소리로만 전달되고 있는데, 그녀의 사망일이 1980년 7월 19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분노 바이러스가 한국에서 시작된 날짜는 2달 전인 5월 19일, 즉 광주에서 참혹한 학살이 자행된 바로 다음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1980년 광주는 2008년 현재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된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중요한 내용이 자막화되지 않고 공중에서 흩어지는 목소리로만 전달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현 정권에 반대하는 목소리는 무조건 "좌빨"로 몰아 입막음하는 질식할 것 같은 정치적 상황을 돌파하기 위한 최후의 회피수단이 아니었을까? 무한도전의 첫 번째 비극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는 저급한 문화수준이었다면, 두 번째 비극은 이처럼 언론 탄압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표현의 자유가 말살된 억압적 정치문화라 할 수 있다.

 


연출된 무대로서 시간


2008년 1월에 2009년 12월달 달력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을 2008년 12월에 TV로 시청하는 기이한 상황. 노홍철은 피습 사건 직후라 여전히 갈비뼈가 낫지 않은 듯 촬영 중간중간 상처 부위를 어루만지고, 박명수는 2세가 태어났는 지 아닌 지 혼란스러워 하고, 유재석 역시 자신이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는 지 아닌 지 난감해한다.

 

 

 


이처럼 '달력 특집'의 가장 중요한 긴장요소는 촬영 시점과 방영 시점 사이의 불일치에 있다. 시간의 간극은 대개의 녹화 방송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상황이지만, 방영 여부조차 불투명한 연초에 연말 상황을 예측하며 녹화에 임해야 하는 부조리한 시간성이 '달력 특집'에서는 출연자들이 연기를 펼치기 위한 무대 자체로 연출되고 있다.


따라서 '달력 특집'의 묘미는 달력 사진촬영 과정에서 발생하는 희극적 상황 뿐만 아니라 예측 불가능한 시간이란 무대 위에서 출연자들이 시간 상의 균열을 메우기 위해 펼치는 재담과 연기에 있다. 더욱이 카메라 앞에서의 발언은 시청자들 앞에서 하는 공개적 약속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연말 예상 상황극은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효과적인 조건으로 활용되고 있다.

 

 



정형돈이 집을 팔아서 연말에 통째로 기부했다거나 노홍철이 장기를 기부했다고 제 멋대로 예측해서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유재석, 박명수, 정준하로 이어지는 선행 릴레이를 정형돈이 정확하게 예측하자 '형돈이 얘 신기 있나 보다'나 '참 신기하게 맞아 떨어지네'와 같은 능청스런 자막을 통해 맞장구를 쳐주는 장면 역시 예상 상황극의 묘미를 잘 살린 부분이라 하겠다.


그런데 정형돈의 예측이 상대방을 당혹스럽게 만들기 위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루어졌던 것일까? 가령 정준하가 소아암 환자를 돕기 위해 6,000만원을 기부한 것은 이미 그 전에도 있었던 일이고, 유재석은 10년 전부터 익명으로 꾸준히 기부를 해왔고, 박명수 역시 5년간 매달 300만원씩 기부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4년 가까이 무한도전에 출연하며 그들과 함께 생활을 해왔던 정형돈이나 연출자가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그래서 정형돈의 기부 예측을 신통하게 생각하는 자막은 능청스럽다.

 


엿듣기의 즐거움


무한도전 담당 연출자로 추정된 인물을 상징화된 '궁서체' 자막은 성격과 개성을 지닌 인격적 캐릭터로 기능하며 프로그램 전체의 분위기를 이끈다. 다소 까칠한 성격의 그 목소리는 횟집 수족관에 "산소통 메고 들어가냐"고 묻는 유재석에게 "왜? 잠수함 타고 들어가지?"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삼행시는 짓지 말아 달라고 요구하는 정준하에게는 "그럼 거짓말하란 소리네."라고 말해 그가 칭찬할 만한 점이 별로 없는 사람인 것처럼 희화화한다. 또 정준하가 정형돈에게 재치가 부족하다며 타박을 하자 "너나 재치 좀 휴대하세요."라며 시청자들보다 먼저 그를 꾸짖기도 한다.

 

 



이처럼 출연자들의 면면을 잘 알고 있으면서 그들을 놀리기도 하고 때로는 꾸짖기도 하는 자막의 존재는 시청자들로 하여금 친구들 사이의 대화를 엿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궁서체 자막이 구어체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역시 이러한 환상을 불러 일으키는데 일조하고 있다.


따라서 무한도전을 시청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러한 목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는 "눈"이다. 자막으로 시각화된 음성은 상황에 대한 설명이나 단순한 정보 전달의 기능을 뛰어넘어 프로그램 전체의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기 때문에, 문자를 머리 속에서 재빨리 음성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궁서체 자막을 '음성'으로 느끼고,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현존'한다고 인정할 때, 출연자들과 목소리의 주인공이 나누는 대화를 엿들으며 즐거워 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영상에 제목을 붙이는 능력


무한도전의 독특한 자막 활용 방식은 문자언어와 음성언어, 영상과 문자 간의 이분법적 경계를 해체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흔히 재치있는 말장난이나 상황을 재미있게 포장하는 수단으로 오인되어 온 자막 이해 방식은 영상 이미지와 문자 간의 엄격한 구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상황과 아무 상관 없는 재치있는 자막이 영상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은 아니며, 재미없는 상황이 자막 때문에 재미있게 느껴지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이해방식은 문자를 시각 이미지로, 영상을 의미 전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현대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반면에 무한도전의 자막은 이미지와 언어 간의 상호작용을 방송 3사 중에서 가장 뛰어나게 활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가령, 물고기 공포증이 있는 노홍철이 횟집 수조에 담긴 붕어를 보고 놀라 "이건 붕어가 아니잖아 상어 아냐!"라고 외치자, 자막은 그 광경을 '지금 돌+I 눈엔 멸치도 꽁치!'라고 표현한다. 노홍철의 표현 속에 담긴 '붕어 : 상어'의 관계는 자막에 의해 '멸치 : 꽁치'의 관계로 치환되어 그가 느끼는 공포감을 희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영상 속에서 노홍철의 공포감을 읽어내고 그의 표현법을 활용해 쓴 자막의 언어로 그의 심리상태를 재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자막은 '영상을 읽어내는 능력'과 그것을 감칠맛 나는 언어로 '표현하는 능력'을 동시에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막이 영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포착하는 능력만이 아니라 문자로 쓰여지지 않은 것, 즉 영상을 읽는 능력을 요구한다는 사실은 스머프 분장을 한 출연자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그것에 붙인 익살스런 제목들에서 다시 확인할 수 있다.

 

 

 


가가멜 분장을 한 박명수가 입을 벌리고 찍은 사진에는 '구취'라는 제목을 붙여 놓았는데, 이는 그 전에 노홍철이 박명수의 입냄새를 맡고 질색한 사건에서 연유한 것이긴 하지만, '가가멜 분장'과 '구취' 간의 부조화가 웃음을 유발하고 있다. 호탕하게 웃는 김신영의 사진에는 '호연지기'라는 제목을 붙여 그녀의 '여성성'과 어울리지 않은 남성다운 호방함을 대비시키고 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분명한 사실은 오락 프로그램에서 '영상을 읽어내는 능력'과 '제목을 붙이는 능력'은 비극적 상황에서도 희극성을 발견해낼 수 있는 '삐딱한 시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박명수의 사진을 보고 '가가멜 분장을 한 박명수'라는 제목을 붙인다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고 있긴 하지만 웃음이 유발되지는 않는다. 물론 우스꽝스러운 분장 때문에 웃을 수는 있겠지만, '구취'라는 제목을 통해 발생하는 유머는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자막의 언어는 시청자가 영상을 기존의 지식을 갖고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영상을 코미디의 관점에서 재해석할 것을 요구한다. 엉뚱한 제목은 영상 이미지에 대한 관습적 해석을 중단시키며 시청자들을 일종의 충격 상태에 빠뜨리게 되는데, 이 때 발생하는 심리적 부조화 상태는 웃음을 통해 균형을 되찾게 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보'와 '오락'의 이분법을 넘어서


영상 이미지을 희극적 관점에서 읽어내는 능력을 일상생활 속에서도 발휘하며 사는 사람들이 코미디언들이다. 그래서 노홍철은 큰 머리가 유머차에 끼여 괴로워 하는 정준하를 보고 고래가 '괴물'을 삼킨 모습을 떠올리며 환호한다. 정형돈은 노홍철의 어정쩡한 걸음걸이를 보고 룸바를 추기 직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구호를 붙이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관찰자이자 피관찰자인 셈이다.

 

 



그런데 무한도전의 자막은 출연자의 재치있는 멘트를 자막에 활용하는 경우가 많고, 연출자 및 조연출자 그리고 작가들에 의해 자막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다수의 시점과 목소리를 담고 있다.


5월달 달력 사진인 '바보 가족'을 찍기 위해 여장으로 분장한 정준하가 스튜디오로 들어오자 그의 건장한 체격에 놀라 '소도 때려 잡을 건강한 어머니', '밥샙 여동생인가'하는 자막이 등장한다. 정형돈이 정준하의 모습을 보고 만화 '달려라 하니'에 나오는 '고은애'를 떠올리자, 곁에 있던 유재석이 '안 고운애'라며 정정한다. 박명수도 그 광경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 지 '토 나온다'며 격렬한 감정의 언어를 쏟아내자 토하는 모습의 해골이 등장해 정준하가 느낀 굴욕과 충격을 시각화한다.

 

 



사진작가 역을 맡은 박명수의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모델 정준하의 모습 위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갈가리 찢어들고 가시옵소서'라는 김소월의 '진달래꽃' 패러디 자막이 등장하고, 사진 촬영을 마친 뒤 다시 분장실로 향하는 정준하의 느릿한 걸음걸이는 '한 건 하고 퇴근하는 장길산 발걸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정준하란 인물은 다양한 시선들에 의해 관찰되어 웃음을 유발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처럼 무한도전 자막의 주체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며, 따라서 개성 강한 자막의 창시자로 알려진 김태호 PD는 그러한 다수의 목소리를 관리하는 대표자로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에어로빅 특집'에 나타난 자막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김태호 PD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옳지 못하며, 제작진 전체의 관리 소홀로 보아야 한다.


자막이 복수적 시선에 의해 관찰된 결과라는 사실은 또 다른 중요한 결론에 도달하게 한다. 우선 정준하의 우스꽝스런 분장이 웃음을 유발하는 1차적 원인이라면, 그 모습을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한 언어적 표현들은 그 대상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정준하란 인물은 다양한 기호들로 해체되고, 그 기호들의 유희가 코미디의 대상으로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일반적 태도가 한 인물의 웃긴 몸짓이나 행동 혹은 재담이나 개인기를 보고 즐거워 하는 것이었다면, 무한도전은 이러한 전통을 지키면서도 코미디언을 관찰하는 시선 자체를 유머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전진을 이루어냈다고 할 수 있다. 즉 기존에는 시청자들이 코미디언을 보고 웃었다면, 무한도전은 그와 동시에 코미디언을 보고 웃는 모습을 보고 시청자들이 웃음을 웃도록 하고 있는 셈이다.


두 번째 사실은 '정보'와 '오락'을 구분하던 이분법이 무한도전의 자막에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준하의 여장 모습은 '이종 격투기'(밥샘), '만화'(고은애), '시'(김소월), '소설'(장길산) 등 다양한 담론적 지식을 동원해 희화화되고 있기 때문에, 자막을 즐기고 웃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지식, 즉 '정보'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흔히 기자들을 비롯한 교양계층에서는 '정보'와 '오락'을 철저히 대립되는 가치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느낌표' 류의 교양이 가미된 오락물을 오락 프로그램이 지향해야 될 최고의 가치로 선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무한도전의 자막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정보적 가치와 오락적 가치는 명확히 구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느낌표'는 정보와 오락이 접목될 수 있는 하나의 모범적 사례일 뿐 절대적 규범이 될 수 없다.

 


증오의 문화


'2009 달력 특집'이 방영된 지난 주말 포털 사이트 다음의 연예란 머리기사로 하하가 무한도전 달력을 통해 안부인사를 전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현재 공익요원으로 군복무 중인 하하가 2010년에 컴백할 거란 내용과 함께 그의 친필사인이 함께 게재되었다는 소식을 그 기사는 전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사에는 하하의 친필사인이 표시된 그의 캐릭터 그림 대신 군입대 직전에 찍은 하하의 사진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기사가 무한도전 '달력 특집'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음에도 그 다음날인 일요일까지 포털 사이트 메인화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용과 큰 관련이 없는 하하의 군입대 사진만이 담겨 있는 기사와 그 날 방영된 무한도전의 내용과 동떨어진 부차적 사실을 전달하는 기사가 포털 사이트 메인에 올라와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최근 공익근무를 마치고 소집해제된 김종국이 대중들로부터 '김공익'이라 조롱받으며 지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그 기사가 작성된 목적과 포털사이트 다음이 그 기사를 메인화면에 올려놓은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여기 공익근무 중인 하하가 있다. 돈 없고 빽 없어 억울하게 현역을 다녀온 자들이여, 와서 돌을 던져라!"


군복무 제도가 투명하게 운영되고 있지 못하다거나 개인의 희생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뒤따르지 않은 문제는 국민들이 국가에 항의해야 할 문제이지 매번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어 분풀이를 한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군대 문제를 남녀간의 갈등으로 치환하는 것 역시 군대 제도의 본질적 문제를 회피하게 만드는 교묘한 술책일 뿐이다. 남자 뿐 아니라 여자에게 군대의 의무를 지운다고 해서 평등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며 '기본권을 제약당하면서 2년을 강제 복무하는' 불합리성은 여전히 잔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 제도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불만을 상업적 이익을 위해 악용하는 것도 모자라 개인을 그 희생양으로 삼는 언론과 포털 사이트의 작태는 도를 넘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연예인이 자신에 대한 비방 때문에 자살이라도 하게 된다면, 그것을 빌미 삼아 악플러들을 점잖게 꾸짓는 기사를 쓰고 그 기사를 포털 사이트 메인에 올려놓으면 또 다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니 이 얼마나 편리한가! 하하는 그들이 섬기는 탐욕의 신이자 재물의 신인 마몬(Mammon)에게 바쳐진 '키 작은' 어린양일 뿐인 셈이다.


오락 프로그램들 간에 시청률 경쟁을 붙이고, 어느 MC가 어느 MC보다 우월하니 못하니 떠들어대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경쟁심을 부추겨 서로에 대한 증오로 눈을 멀게 하기 위함이다. 원한 감정에 눈이 먼 대중들만큼 돈벌이에 이용하기 쉬운 상대도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양질의 연예 정보를 제공하던 '매거진t'와 '드라마틱'이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무기한 휴간에 들어간 반면, 상업주의에 찌든 언론들은 본분도 잊고 양심도 팔아치우고 대중의 분노를 이용하는 파렴치한 행위마저 서슴지 않게 된 것이다. 물론 전에도 이러한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시장만능주의가 국가 이념으로 선전되고 있는 요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면서 더욱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올해 초 하하가 군입대를 할 당시에도 그의 공익근무를 두고 수많은 말들이 오고 갔다. 시간이 흘러 연말이 되어 또 다시 그러한 논쟁이 일어나는 광경을 목격하며 일종의 데자뷰 현상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눈을 비벼보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시간이 미래를 향해 흘러가지 못하고 한 곳에 괴어 썩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고 땅 속으로 끌어들이는 살아있는 늪과 같은 세계.

 

 

 


무한도전은 바로 그 척박한 땅 덩어리 위에 뿌려진 한 알의 밀알 같은 존재이다. 그리고 그것이 뿌리를 내려 풍성한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보호하고 가꾸는 의무는 온전히 시청자들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이 땅에서 살아가기 위하여.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