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이론/문화의 이론들

[스크랩]구조주의, 기호학, 그리고 문화연구

ddolappa 2008. 12. 13. 00:05

 

 

구조주의, 기호학, 그리고 문화연구

 

1. 구조주의라니요?
 
" 구조주의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언어활동(langage)과 기호체계(le code)의 법칙으로 이루어진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려주고자 하는 일종의 방법이다. … 구조주의의 세계에서 … 모두 한결같이 언어학을 학문적 방법의 공통분모로 갖게 된다. " 롤랑 바르트 
 
우리의 출발지점은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 곧 구조주의 일반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연구에 있어 하나의 방법론적 틀로 제시되는 구조주의적 접근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부터 그렇게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너무나 당연하게도) 구조주의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의 과정이 누락되는 식의 노정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다만 구조주의에 대한 이론적 체계화보다는 문화연구에 강세를 두면서 서술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의 갈 길은 제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길의 모두에서 한번 생각해보자. 다시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섵부른 대답은 그 서툰 질문방식처럼 위험하기 그지 없는 일임에 분명하다. 다만 여기에는 몇가지 전거들을 통해 그 모습을 개략적으로 그려가는 방식이 요구된다고 믿는데 우선 구조주의는 20세기 들어 이론사에 등장한 흐름이라는 것부터 명시를 하도록 하자. 곧 구조주의의 출발은 실존주의,현상학,해석학의 인간중심적인 사유의 방식에 반대하면서 시작된다. 곧 이들 학문이 체험과 정열, 시간성과 역사성, 의식과 자유, 정신적 의미를 중요시 한다면 구조주의의 사유는 실존적 인격의 은밀성 대신에 무인격성을, 자유의 윤리성 대신에 필연에의 인식을, 정신적 가치의 현존 대신에 물질적 체계의 법칙을, 주체의 자각 대신에 주체와 인간의 소멸을 내세우게 된다. 이 속에서 구조주의는 언어적 진술(담론)을 중요시하게 되는데 이는 담론을 모든 인식이 나타날수 있는 장소로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곧 언어활동이 인간의 의식적인 노력의 산물로서 이해한다기 보다는 인간의 의식적 실천이 언어활동에 의해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이므로 특화시켜서 후술을 하도록 하고 구조주의가 인간중심적인 사유체계에 대한 거부와 과학적 지식의 체계화라는 노력속에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우선 적시할 수 있도록 하자. 구조주의의 이런한 면은 문화를 인간의 실천적 행위의 산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활동을 위시한 제반 상징체계속에서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론적 원리를 제시하게 된다. 곧 문화를 의미활동의 체계로서 이해하는 것이다.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문화 그 자체가 의미화작업이고 그로부터 생산되는 것의 의미(홀)"인 것이며 이는 언어체계를 구성하는 원리들이 다른 종류의 커뮤니케이션 곧 의미체계signifying system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구조주의는 발전사관에 의한 문화의 동일화를 거부하고 변별적 차이에서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 이는 구조주의가 다양한 사건들을 시간적 인과관계나 계기적 연쇄성에서 탐구하지 않고 어떤 사건이 일어난 시대의 지층이 다른 시대의 지층과 어떻게 다른가. 그 지층의 특성을 어떻게 계열화시킬 것인가를 겨냥한다는 사실에서 확인된다.이 속에서 구조주의는 단절과 비연속성을 강조하게 되고 다양한 것들을 관계의 틀속에서 파악하게 된다.이로써 구조주의는 변별적 차이라는 측면에서 타자의 층위를 부각시키게 된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논법은 문화를 바라봄에 있어 이질적인 것의 상호공존이란 면을 예각시켜내게 된다. " 모든 문화는 그 나름대로 다 독특한 가치와 문제 해결의 능력과 그것을 위한 지식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문화는 각각 다양하게 제 나름대로 조제 방식이 다를 뿐이다.조제방식이 우리와 다르다하여 배척되거나 타기되어서는 안된다." 인류학적인, 그런면에서 가치의 다원성을 인정하고자 하는 이러한 논법은 구조주의적 사유로 하여금 문화를 다원적으로 바라볼수 있도록 한다. 곧 다르다고 하여 배척하지 말것.이라는 단순한 명법이 구조주의론적인 문화론에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단순한 결론 역시 매우 정치하고도 체계적인 사유의 방법론으로부터 도출되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구조주의 사유는 또한 의?앞서 무의식의 논리를 개발해낸다. 곧 의식, 모든 독립적인 개체와 자유 자체로서 여겨지는 의식은 나와 타자들간의 얽혀진 그물 조직 속에서 용해가 되는 데 그 흔적 혹은 잔여물이 기호체계나 규칙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의 체계가 집단적 사유의 범주라 한다면 무의식은 이 속에서 타인과의 교환을 가능하게 하며 상징적 사유를 정초하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무의식에 있어 상징체계 곧 언어적 체계가 부각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곧 언어는 이러한 인간의 무의식적 사유체계를 그대로 드러내는 장소로서 작동하게 되며 수다한 경험적 사실들을 근원적이고 통일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틀로서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칠게 말한다면 구조주의는 언어에 대한 연구를 통해 무의식의 구조, 곧 사회적 무의식이라는 구조론적 무의식의 세계를 드러내려 한다. 이 구조론적 무의식의 세계가 어쩌면 문화론에서 말하는 문화에 대당한다고 볼수 있다. 역시 문제는 이 구조론적 무의식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형성되는가에 대한 자세한 지형도를 그리는가에 있다고 볼수 있는데 이 문제 역시도 후술의 문제로 나두어야 할 것만 같다.
 
2 구조주의의 방법론적 특질 : 하나
 

주지하다시피 구조주의의 시발은 현대 언어학의 체계적 정초자라 평가받을 수 있는 소쉬르이다. 무론 그는 구조라는 표현 대신에 체계라는 말을 대신했지만 그의 언어학을 구성하는 방법론적 논리는 정확히 구조주의의 그것과 닮아있다. 이 자리에서는 구조주의적 사유의 가장 기본이 되는 몇가지 방법론적 특질에 대해 정리를 할 수 있도록 하자.
 
우선 명시해야 할 사실은 구조주의의 탐구가 언어에 대한 탐구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곧 구조주의는 언어활동이라는 사실로부터 모든 것을 연역해낸다. 물론 이 목록속에 인간의 행위가.문화가.사회가 녹아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쉬르의 출발 역시 여기서 비록된다. 그에 따르자면 언어활동(le langage)은 언어(la langue)말(la parole)로 구성된다.이때 언어는 언어활동의 사회적 측면으로 언어활동의 객관화된 측면을 의미한다. 그리고 말은 개인적인 언어활동의 측면으로 개인적인 발화를 의미한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사실은 말이 언어에 의해 종속당한다는 사실이다. 곧 말은 변할수 있고 변하는 속성을 가지며 지역성에 의해 다르게 나타나지만 언어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다. 단순한 이 사실은 그러나 말 이상의 함의를 지닌다. 곧 구조주의는 이렇게 근원적으로 변하지 않은 어떤 체계 곧 구조를 전제하고 상정한다. 또한 이러한 구조는 시간성에 의해 가변적이지 않는, 그런면에서 공시성을 드러낸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본적으로 공시언어학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있다.곧 공시성에 그 주안점을 두는, 언어에 대한 연구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개념은 기호학으로 전화하게 된다.

 

바르트에 의한다면 언어가 기호학에서는 기호체계(le code)로 말은 전언내용(le message)로 전화한다.이는 후술을 할수 있도록 하고 소쉬르 역시 언어학이 기호학으로 확장해야할 필요성을 느낀다. 여기서 제시되는 것이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이다. 전자는 하나의 청각적 이미지를 의미하며 후자는 기호의 개념적 측면을 의미한다. 이 측면의 키워든는 양자의 자의성테제이다. 곧 시니피앙은 시니피에를 가져가는 것은 아무런 연관성(필연성이라 해두자: 타동적 인과율)이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의성 테제이외에도 양자간에 가져가는 비분리성 역시 중요하게 생각을 해두어야 할 문제라 보여진다.구조주의는 사유체계는 이렇듯 차이를 말하면서도 차이가 생성하는 일정한 체계를 상정하게 된다.
 
기호의 두 측면의 연관성속에서 의미가 발생한다. 곧 의미는 시니피앙(기표)/시니피에(기의)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기서 가치의 문제가 제기가 되는데 가치는 의미와는 다르다. 가치는 다른 단어와의 관계에서 파악되는 체계나 조직의 사물을 의미한다. 따라서 언어는 순수하게 차이에 의하여 구성된 가치의 체계에 다름아닌 것이며 기호의 가치는 다른 가치들과의 관계에서 맺어지는 위치의 소산이다. 가치가 의미보다 구조언어학에서 훨씬 더 중요하게 부각된다. 하나의 가치는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만 성립하는 위상의 개념을 도출시키게 된다. 기호의 내적 관계로서의 자의성과 외적 의미체계로서의 가치의 개념이 구조주의와 기호학을 접합시키면서 문화연구에 있어 양자를 인입시켜내게 된다. 이렇듯 구조는 기표와 기의에 의미작용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것이며 이때 의미작용은 상호간 차별화의 과정속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구조는 기표와 기의의 위치를 규정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창조하게 된다. 그리고 구조는 차이의 체계이다.
 
이상의 몇가지 측면에서 구조주의는 다음의 특징들을 가져간다.
 
(삐아제의 정리) 우선 전체성으로 모든 구조는 요소들의 집합으로 구성된다.
이 요소들은 전체 체계를 구성하고 있는 법칙에 종속된다. 그리고 이 법칙은 누적적인 연상심리법칙에로 환원되지 않고 전체 체계에 대하여 각 요소들과 다른 성질을 부여하게 된다. 두번째로 변형성으로 이는 전체 구조의 본질을 탈바꿈 시키지 않은 범위에서 요소들을 치환하거나 교환시킬수 있음을 뜻한다. 세번째로 자체조정으로 이 규칙은 구조가 자기 내부에서 자기 규칙을 스스로 분배해 내는 내재성의 원리와 통한다.
 
2-2 구조주의와 언어학
 
구조주의가 차용하는 언어학의 문제는 구조주의로 하여금 보편성과 일관성 그리고 체계화된 과학성을 부여하게 된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 언어는 문화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그 문화권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조건지워주게 된다. 또한 그에게 있어 신화의 연구는 신화의 언어에 대한 연구이면서 신화의 기호체계에 대한 탐구인 것이다. 이 속에서 소쉬르가 한 기호의 가치가 다른 기호와의 관계들에서 맺어지는 위치의 위상학속에서 정립되어지듯이 신화의 기호는 이항대립된 기호의 변별적인 차이에서 의미를 형성한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이 바로 레비스트로스의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원리들은 언어질서를 문화무의식에 대당시킨다. 그리고 이것들의 목록은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신화연구를 통하여 말하고자 한 것에 다름아닌 곧 신화 그것인 것이다. 또한 레비스트로스에게 있어 신화는 단일한 것이 아니라 언어처럼 차이들과 대립의 문집으로서만 이해될수 있는 것이며 이런 면에서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언어의 문제는 아나키르메르가 말한 바 대로 "언어의 형식이 문화의 본질을 구성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한 언어는 문화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하는 진리의 장소에 다를 바 없다."

 

이런식의 사유는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도입하는 문화연구에 있어 문화현상이 그 자체로 의미작용의 산물로서 작동시키게 된다. 곧 자연과 문화의 중심적인 범주들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구별점(자연/문화)은 바로 문화의 산물, 즉 의미작용의 활동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구조적 체계는 고정점이 없고 고정점의 설치가 그 체계의 끊임없는 변형 가운데의 일 계기인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주의의 방법론은 주체를 구조의 변형의 놀이 속에 한정시킨다. 곧 주체형성의 문제에 있어 구조주의는 상징적 체계에 의해 종속된 것으로 보게 되는데 이러한 구조주의의 사유는 앞서 제시한것처럼 인간중심적인 현상학, 실존주의, 해석학등의 학문에 반동한 결과라는 것을 다시금 보여주게 된다. 물론 이 과정이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짐작이 가는 사실이지만.
 
3- 기호학
 
"세계란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기호라고 보는 기호학은 우리에게 모든 사실에, 그리고 가장 세속적인 사실에도 천착할 필요성을 가르쳐야 한다.그리고 '그게 무슨 의미냐?'하고 물어야 한다. 마치 그리스인들이 모든 나무와 냇물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었듯이 우리의 짐꾸러미, 광고, 정치 슬로건, 자연을 대체해버린 우리의 일상용품들에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내러티브들은 입이 말하는 것 밖에서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있다. 이 분야의 핵심어는 다음과 같다. 즉 그 내러티브들은 자신들의 메시지를 자연화한다."
 
기호학은 사회내에서의 기호의 삶에 대한 과학이다. 이 간략한 정의는 소쉬르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소쉬르라는 위치는 구조주의와 기호학 양자에 걸려있는 시원지로서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강조점은 다름아닌 사회내에서의라는 한정어 이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소쉬르의 기호학은 그 확장의 계기만을 남긴체 체계적인 연구는 수행하지 않는다. 다만 소쉬르가 기호라고 생각한 것들의 목록 기호의 여러가지 확장된 측면과 그 사회내 존재로서의 측면은 이후 기호학에 있어 주요한 측면으로 자리하게 된다. 다시말해 사회적 의미작용의 체계적 속성에 대한 탐구가 기호학의 주요 관심사로 부각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선 기호를 무엇을 대신하는(퍼스식) 의미작용의 체계 정도로 잠정정의를 하자.
 
이렇게만 봐도 기호로 묶어질 수 있는 것들의 목록은 확장이 되게 되는데 이런 면에서 바르트의 다음의 말은 경청할 만하다.


" 기호론은 그 실체와 한계가 무엇이든 간에 기호의 어떤 체계를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삼는다. 이미지, 제스처, 음악소리, 대상들 그리고 이런 모든것들이 연합되어 제식, 관습, 혹은 대중오락이 구성된다. 비록 언어는 아닐지라도 이러한 것들은 최소한의 의미작용 체계를 구성한다."
 
모든 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 곧 사회내 모든 것들이 의미작용의 소산이라는 것. 저 들녁에 놓인 작은 꽃 한송이 조차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문화연구에 있어 기호학을 끌어들이는 이유인 것이다. 곧 모든 문화현상이 의미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호학은 단순히 어떤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가르쳐주지만은 않는다. 곧 어떤것이 어떻게 의미작용을 하는지에 대해 그 의미가 만들어지고 생성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한다. 이 측면이 중요하다. 이런 선상에서 바르트의 신화론에 대한 탐구는 하나의 전형으로 자리할 것 같다.곧 바르트에게 있어 신화는 역사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을 자연스러운 것이나 자명한 것으로 가장시키는 가짜 자명성인 것이고 이런면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이 신화는 초기 바르트의 기호학에 있어 이데올로기가 드러나는 방식을 분석할 수있는 개념장치들을 만들어낸다. 거짓된 것. 곧 자명하게끔 여겨지는 의미작용의 체계와 산물들이 바르트에게 있어 신화적인 것들의 목록인 것이다. 이속에서 바르트의 신화분석은 사회구성의 지배적인 관념이 어떻게 보편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되는가를 설명한다. 신화가 만들어지는 매커니즘은 습관적인 표상들이 일상생활의 대상과 실천 속에 얽혀서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를 자연적인 것으로 보이게 하고 그러한 대상과 실천이 상식적으로 현실화된 것으로 보이게 하는 방식인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을 해보자.여기엔 매우 유명한 용례가 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여기 한장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 사진은 프랑스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는 흑인에 관한 사진이다. 이 사진의 외연은 한 흑인 병사가 프랑스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1차 수준에서의 의미작용은 기표(사진영상)과 기의(프랑스 국기에 경례하는 흑인 병사)이며 양자의 합성에서 내포된 의미는 식민지주의자의 국가주의와 군국주의의 합성에서 발생한다.곧 이때의 내포된 의미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이다. (당시 프랑스와 알제리는 내전중이었으므로 흑인 병사의 프랑스국기에 대한 경례는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주의자의 충성을 의미한다.) 바르트가 신화분석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미는 이렇듯 하나의 기호가 갖는 이중적인 역할이다. 곧 '신화는 이중적 기능을 가진다. 무엇인가을 지적하고는 이를 알려주며,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이해시킨후 이를 강요한다." 이러한 신화적 의미가 생성하게 되는 것은 기호의 생산과 소비에 있어 공유되는 약호가 문화적 약호라는데 있다. 곧 내포의 전제는 기호의 생산과 해독과정에서 공유되는 문화적 의미가 전제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이렇게 전제된 문화적 의미의 산출은 언어적 차이의 체계에 종속된다. 곧 기호가 의미화되는 순간, 즉 그것이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 그것이 언어의 차이체계속에서 복속된다는 주장이며 이런면에서 바르트의 신화론에 대한 탐구는 구조주의적 방법론을 가지게 된다.바르트는 이러한 구조주의의 방법론을 접수하여 신화분석을 통해 어떻게 의미가 현상되는 지에 대해 탐구를 하고 그 속에서 이데올로기와 권력이 작동하는 가를 밝히려 한다. 이런면에서 그가 생각하는 신화는 세계를 개념화하고 의미화하는 특별한 과정 즉 지배질서가 자신을 자연적 질서로 여길 필요성에 의해 동기화된 과정으로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바르트의 신화분석은 기호학이 어떻게 해서 문화분석에 있어 유용한 방법론적 원리로 제시되었는가를 설명해준다. 곧 의미가 만들어지는 방식에 대한 기호학의 여러 개념적 틀은 문화분석에 있어 일정한 잣대를 제공해준다.이런 면에서 기호학은 문화현상을 분절적인 의미체계와 그 것이 짜여지는 방식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를 도모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속에서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권력이 개입하게 되는 지의 여부를 밝혀내게 되는데 이는 문화연구에 다름아니다. 문화현상 역시 하나의 기호로 작동하게 된다면 말이다.


기호학으로 인해서 상징, 의미체계의 연구가 사회과학의 분석의 중요대상으로 부각된 것이며 언어체계와 이데올로기, 사회구성체 사이의 관련성 그리고 인간주체의 형성과 언어체계간의 관련성등에 대한 규명을 통해 사회구조와 그 역학에 있어 상징체계가 차지하는 중추적 위치를 드러내 주게 되었다. ((문화가 현실의 표상을 통해 사회 현실에 대한 인식을 구축해냄으로써 이데올로기 생산과 재생산의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입장에서 문화연구는 그것이(문화가) 기존의 불평등 관계를 강화하고 기존의 구조적 모순을 재생산하는데 기여하는 방식을 밝히고자 한다.))
 
4. 텍스트와 맥락
 
"문화연구가 발전시킨 가장 중요한 이론적 전략은 문화상품과 사회적 실천, 제도들을 하나의 텍스트로 해독했다는 점이다."
 
기호학적 분석을 통해 미디어 메시지의 정치 사회적 의미들이 구체화되자 텍스트의 위력과 텍스트 생산의 수용이 발생하는 사회, 정치적 맥락이 갖는 중요성이 새롭게 인식이 되어지게 됬다. 텍스트를 둘러싼 의미작용의 연구는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 준하게 된다. 곧 텍스트는 커뮤니케이션 모델에서의 전언message에 대당하는 기호학적 명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메시지, 텍스트, 담론등이 서로 유사하게 쓰여지는데 문제는 개별적인 개념들의 정의에 놓여있다기 보다는 그것들의 의미화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의 측면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말을 풀어 가보도록 하자.
 
텍스트는 한 마디로 이미 쓰여진 글이다. 곧 이미 주어져 있는 의미체계의 산물인 것이며 이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바탕이 맥락context인 것이며 텍스트는 이 바탕위에서 생산encoding(부호화)되고 소비decoding(약호해독) 된다. 약호생성과 해독의 방식은 텍스트가 만들어지는 코드화에 의해 결정이 되는데 문제는 이 방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에 달려 있다. 이하의 글은 영국 문화연구에서 전개된 텍스트를 둘러싼 여러 입장들을 정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며 진행된다. 필자의 판단에 의하면 이런 텍스트연구가 문화연구에 있어 좋은 범례를 드러내 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영국문화연구는 텍스트가 생산-소비 되는 과정에 관심을 갖고 이에 대해 천착한다. 다만 영국문화연구의 강조점은 주로 텍스트의 소비의 측면에 대한 강세를 가지며 진행되는데 이 측면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선 스튜어트 홀은 '텔레비전 담론에서의 부호화와 해독'이란 글에서 메시지의 생산과 소비가 중층결정됨을 보여준다. 곧 미디어가 사용하는 담론, 담론이 관련된 맥락, 그리고 메시지 전달에 사용되는 기술의 상황속에서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자연발생적이지 않음을 강조한다. 즉 메시지는 전달되기 전에 먼저 구성되었다는 것이며 그 수용 역시 혼합된 수용자층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단순하게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과정은 오해와 왜곡이 발생되는데 이는 메시지의 의미가 다의적이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오해와 왜곡의 과정 곧 부호화와 해독간의 불일치의 과정에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개입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메시지의 의미가 문화적 부호에 의해 완전히 미리 결정된 것은 아니라 할 지라도 받아들여지는 부호들에 의해 지배되어지는 체제 안에서 그 의미가 구성되어 질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곧 메시지의 의미가 다의적이라 할지라도 다원적이지 않은 이유는 이처럼 메시지가 해독되는 과정에 있어 지배적,선호적 의미가 부여되기 때문이며 이 과정은 지배 문화질서가 구성되는 과정에 다름아니다. 문제는 이처럼 선호된 의미가 발생하는 방식. 다시말해 지배적인 의미들이 불가항력적으로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호'된다는 데 강조점이 놓인다. 그리고 메시지가 만들어지는 부호화 과정은 해독의 범위와 수준을 제한하는 과정에 그친다. 홀은 텍스트가 해독되는 과정을 세가지 층위로 보고 있는데 우선 지배적-헤게모니적 해독(선호해독)의 과정과 교섭적 해독대항적 해독(대안적인 준거틀에 의해 메시지가 재해석) 으로 구분을 한다.이 과정은 서로 혼합되어 맛물리는 과정이며 그런면에서 대체적인 해독은 교섭적 해독의 층위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이런 면에서 텍스트의 해독은 복합적이며 담론들의 투쟁의 과정이 내재된다. 곧 메시지의 구조적인 다의성은 어떤 한 시점에서 그 메시지에 대한 특정 해독을 지배적인 의미와 부차적인 의미간의 정치적 투쟁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단순하지 않다. 곧 위의 설명모델은 문화텍스트가 가지는 여러가지 측면을 단순하 시킬 우려가 있고 무엇보다도 텍스트 해독과정의 생성적 측면과 저항적 측면을 봉쇄시킬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기력한 수용자를 상정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그런면에서 초기의 텍스트 연구가 합의의 구성 즉 현상유지의 재생산속에서 지배적 의미가 불가항력적으로 전달되는 측면에 관심을 갖고 진행된 면에서 벗어나 텍스트가 가지는 모호성 곧 텍스트가 특정 문화적 태도를 일방적으로 찬양하거나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문화권 내에서 평형유지를 위해 반드시 존재한 수많은 모순적인 요인들이 야기하는 긴장상태를 반영시키게 된다. 이속에서 부각되는 것은 수용자의 참여와 일탈적 해독에 대한 강조이다.

 

이런 면에서 리처드 다이어'스타-이미지와 기호'는 수용자 내의 하위그룹들이 스타의 이미지를 해석하고 그것을 새로운 맥락 속에 투입함으로써 새 의미를 만들어낸 방식을 잘 설명하고 있다. 이는 이후 영국 문화연구의 텍스트에 대한 논의의 변환점을 예시하는데 단적으로 말하자면 초기의 텍스트 결정주의로부터 벗어나 기호와 담론의 다의성과 해독과정의 의문성과 확장성에 그 관심을 가지고 연구가 진행된다.


데이비드 몰리는 텍스트가 소비되는 맥락의 중요성과 수용자들에게 부과되는 상이한 사회적 상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논법은 하위문화연구에서 주로 부각되는데 하위문화연구는 지배문화에 대항하여 자신들만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하위그룹의 전략을 강조하며 지배의미와 교섭하거나 저항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지배의미를 유용하거나 변형시키는데 그 강조점을 두며 연구를 진행한다. 제퍼슨의 경우 문화가 부호화/해독 모델처럼 단순한 것이 아니라 상호 경쟁적이며 중복되고 갈등적인 많은 집단들로 이루어짐을 강조한다. 곧 하위문화를 이루는 복수적인 개개의 생활양식을 통해 이러한 과정이 수반된다는 것이다. 하위문화에 대한 연구에서 텍스트의 문제는 텍스트가 어떻게 경험되고 이해되며 해석되는가에 그 촛점을 맞추게 된다. 예를 들어 헵디지가 '하위문화'라는 책자에서 제시하는 스타일의 문제는 의미작용이 어떻게 정치적으로 기능하는 가에 대한 탐구인 것이며 이 속에서 스타일이란 상반되는 정의들이 가장 극단적으로 충동하는 장소로서 자리한다. 따라서 테드족이나 펑크족들의 반항의 복장과 헤에스타일은 하위문화집단의 스스로의 변별된 의미를 만들어내가는 과정인 동시에 그 과정은 지배적인 의미와의 충돌속에서 지배문화의 일방적 소통을 교란시켜내는 의미화투쟁에 다름아닌 것이다.
 
이 속에서 텍스트 개념은 확장된다. 의미의 생성에서 사회적 실천으로, 그리고 실천 자체보다는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부여하는 의미가 텍스트 문제에 부가된다. "이는 의미의 생산에 있어서 수용자/참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저항적인 사회적 위치를 통해 텍스트가 어떻게 핵심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해석되며 이것이 결국 지배적인 의미를 대체하게 되는가에 돤심을 두는 것이다." 이제 텍스트는 그 왕위를 박탈하게 되고 텍스틀 해독하는 주변적이고 모순적인 대중에게 왕권을 인도하게 된다. 이러한 텍스트의 모호성과 다의성은 저항적 해독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곧 텍스트는 다양한 의미로 채워져 있으며 선호해독의 경계선을 따라 수용자가 사회적으로 구성되며 이를 통해 다양한 의미와 쾌락이 생산된다는 것이며 안젤라 멕로비의 말을 빌리자면 '텍스트의 다의성이 표면화되면서 상이한 쾌락과, 상이한 기대감 그리고 상이한 해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일탈해독과 쾌락적 저항의 가능성이 텍스트문제에 부여되는 측면은 주목을 요하는 부분이라 생각이 든다. 곧 문화분석에 있어 텍스트론이 단지 지배이데올로기가 어떻게 부가되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논법을 넘어서 그러한 과정이 어떤식의 감성화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가를 살필수가 있다는 것이다. 곧 "쾌락에 대한 이론이 커무니케이션이 의미의 생성 이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다시 말해 커뮤니케이션 모델의 부호화와 해독의 과정을 미학화하여 사고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인데 이 측면이 필자가 관심을 가져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진전된 서술을 훗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다만 텍스트이론이 초기의 텍스트 결정주의에서 벗어나 이처럼 텍스트의 의미생성에 있어 다양한 의미들이 중충결정화되는 방식에 대한 탐구에 있어 수용자층의 여러 승인의 복합적인 과정에 대한 관심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을 적시하는 것으로 이상의 논의를 매듭짓기로 한다.

 

피스크와 베넷과 울라코트의 작업은 그런면에서 대동소이한 주장을 담고 있다. 곧 텍스트는 미리 주어진 그런면에서 이미 닫혀진 의미가 아니라 의미의 유동선을 따라 끊임없이 이동하는 것이고 해독의 상황속에서 여러 수용자들의 복합적인 작업에 의해 그 의미가 새롭게 생성되는, 이들의 말대로라면 끊임없는 변화와 다양한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변신이 행해지는 장소로서 자리하게 된다. 이 속에서 앞서 제시한 이데올로기와 권력의 작동이 흐른다는 것이 이들의 텍스트를 둘러싼 입장의 개요라 생각이 든다.
 
5.아직 끝나지 않은.
 
"대체로 모더니티가 직조해냈던 이론/실천상의 시공간의 파열과 봉합에 대해 주목한다.그리고 그 파열의 자국을 메워놓은 이론/현실상의 공간을 우선은 거칠게 문화라고 단정짓는다.그리고 그 문화에 대한 개입의 여부를 바로 지금에 대한 중요한 실천의 양상이라 판단하고 문화의 굴절되고 투명한 현상적 형태를 '사회적 의미작용의 형식'이라는 문맥에서 담론 혹은 텍스트라 유사정의 한다. 담론을 둘러싼 여러 분파(그것이 계급일수도 있겠다.)들의 모험에 대한 관찰과 태도 표명은 따라서 현실의 운동양태 바로 그것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또한 더 나아가서 담론을 가로 지르는 의식적 장치와 억압된 무의식의 미로를 헤쳐 은페되어 있는 지배의 과정과 개인을 어떤식으로 주체형성화하는 지에 대한 보다 발본적인 작업을 담론해석의 궁극적 과제로 상정하기로 한다"
 
많은 말들이,그런면에서 기호라 할수 있는, 혹은 담론이라 할수 있는, 그런 이데올로기가 신화가 우리의 주변을 맴돌고 있다.이들은 직조하고 자아내는 것들이 문화라 말한다면 지나친 것들일까. 대체로 문화연구에서 기호학과 구조주의의 인입은 차이의 체계로서의 문화현상이 의미작용을 하는 그 측면에서 문화의 표상작용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그 방식이 단순한 반영의 논법을 넘어서는, 불투명하고 그런면에서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후광이 스며들고 개입되는 방식에 대한 방법론으로서 기호와 담론과 텍스트를 운위한다. 이런 개념틀로서 제시할 수 있는 문화의 현상형태들은 지극히 복잡하기만 하다. 문화에 대한 앎은, 혹은 말하기는 어떤식으로든지 이 방식을 관통해야만 할것이다. 그 이유는 문화라는 것이 자명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이속에서 문화연구는 그 자명성 넘어에 자리하는 불투명성의 실체를 , 그 관계를 꼬집어 내고 들춰내야 한다.이 속에서 구조주의는 혹은 기호학은 하나의 방법론을 제공할 따름이다. 그리고 문화연구에서 이런 방법론을 인입시켜내는 것은 문화읽기를 위한 하나의 우회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왜냐면 문화는 단순히 기호로서 그 소통의 문맥이 갖는 차가운 차이의 논리에만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면에서 존슨의 다음의 말을 경청할 만하다. "텍스트 자체는 아직도 문화연구의 수단일 뿐이다. 더 이상 그 자체를 위해 연구될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현실화시키고 접근가능케 만든 주관적이고 문화적인 형태를 연구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기호화과정, 혹은 텍스트가 해독되는 과정은 여러가지 상황들을 초래한다. 그것은 배리된 욕망이 소비되는 시물라시옹의 과정일 수도 있고 계급적 위계가 무화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수용자가 자신의 욕망을 소비하는 과정일 수도 있다.이에 대한 감성적인 맥락을 살펴가는 작업이 요구된다 믿는다.그러나 이런 주장은 아직 필자에게 있어 남아있는 문제들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고정되는가에 대한 사고들은 이데올로기가 주체를 호출하는 식의 과정일 수도 있고 권력의 작동속에서 문화를 사회의 지배내 구조속에 안착시켜내는 과정일 수도 있다. 물론 이 과정이 역으로 수용자의 일탈해독과 저항적 읽기를 통한 지배적 의미를 역전해내는 과정일 수도 있다. 문화가 단일하고 일관된 목소리라 아니듯 그를 자아내는 수많은 이질화음의 화성으로 문화를 읽어내고 그 과정이 저항과 쾌락의 즐거운 변증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차라리 당위적 명령으로 들릴 듯 하지만 이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같고 전술한 전거들이 합류하는 주장이고자 했었다. 그랬었다. /그래야만 했다. / 그럴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