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Ⅰ. 이론지형의 변화
1997년 총선에서 토니 블레어(Tony Blair)가 이끄는 영국의 노동당은 승리하였다. 이는 대처(Margaret Thatcher)와 메이저(John Major)가 추진해온 지난 20년간의 대처주의(Thatcherism)의 종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처가 대처주의의 계승자로 메이저보다 블레어를 지목했다는 후문처럼 블레어의 승리가 갖는 의미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대처주의에 변화를 가져올 것만은 분명하다. 전후 복지국가의 이념과 시민사회의 가치를 뒤흔들고 모든 것을 시장의 논리 속으로 몰아넣은 20년 동안의 대처주의의 지배는 영국민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그 영향은 주로 부정적이었다(Blackburn 11).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제3의 길은 전후 복지국가의 좌절과 대처주의의 실패 사이에서 하나의 대안으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전망 있는 대안이라기보다는 두 번의 실패를 통해 얻게 된 뼈아픈 경험이며 선택의 여지가 그리 넓지 못한 영국적 상황의 산물이다. 국민통합(One Nation)을 지향했던 전후 복지국가의 유산과, 그러한 유산을 전면 부정하고 모든 것을 시장에 내맡김으로써 국민분열(Two Nations)을 획책한 대처주의를 통합하는 일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부유층의 세금을 줄여주고 은행대출자들의 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는 공약을 통해 보수당의 전통적 지지기반을 설득했던 블레어의 정치적 약속과 달리, 제3의 길은 자본에 대한 적절한 규제와 그 이윤의 적절한 재분배가 이루어질 때 가능할 것이다. 일단 블레어에 대한 평가를 접어두면, 블레어의 집권으로 대처주의가 재평가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만은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경제논리와 시장주의를 근본으로 하는 대처주의는 79년 집권 이후 20년 동안 영국 사회의 거의 전 영역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그것은 사회의 곳곳에 만연된 비합리적 요소를 찾아내 거기에 자본과 경쟁의 논리를 관철시키려고 한 극단적 합리주의이며 자본의 논리를 철저히 대변하였다. 대처정부는 효율성을 앞세워 공공기업을 민영화하였고, 금융자본에 유리한 통화주의를 기축으로 노동계의 요구를 철저히 묵살하였으며, 방만한 지방정부의 예산집행권을 빼앗아 특별기구(Quango)에 넘겼다. 그런 점에서 대처주의의 작동방식은 이미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이고 반동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였다. 즉 그것은 국가의 독주를 견제하면서 전후 타협의 충실한 실현을 주장해온 시민사회를 부정하고 "국가가 아닌 모든 것('시민사회')을 시장과 동일시"(Harris 4)함으로써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집단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대립시키는 공격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한편, 그러한 대립에서 생겨나는 개인들의 긴장과 고민을 전통적인 가치를 앞세워 무마하려고 한 보수적 이데올로기였다. 역설적이지만 대처주의 내부에는 시장의 경쟁논리에 기반을 둔 신자유주의적 논리와 국가와 가족과 같은 전통적인 토리적 가치들을 신봉하는 보수주의적 가치가 혼재되어 있다. 스튜어트 홀은 시민사회를 무시하면서 대중에게 직접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대처주의의 논리를 "권위주의적 민중주의"(authoritarian populism)라 규정한 바 있다.
80년대 중·후반에 영국 내에서도 대처주의의 성격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홀의 주장은 그 논쟁의 한쪽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홀은 대처주의가 시민사회를 부정하고 매스 미디어를 통해 대중들을 직접 공략하는 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문화담론적인 방식으로, 곧 헤게모니 전략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문화주의적 입장은 영국사회의 축적구조 변화를 분석해온 몇몇 이론가들에 의해 비판받게 된다. 가령 봅 제솝(Bob Jessop)은 홀의 입장이 대처주의를 획일적인 이데올로기 통일체로 간주함으로써 그 내부의 모순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홀처럼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대처주의를 인식할 때, 대처주의와 이전의 사회복지 국가와의 '이데올로기적 단절'을 영국 사회의 '정치경제적 단절'로 확대해석하고 전후 타협과 대처주의로 이어지는 영국의 축적구조의 변화를 피상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Jessop & Bonnet 76-87). 홀의 입장이 영국 사회의 경제적 변화보다 대처주의의 이데올로기적이고 헤게모니적인 작동에 주로 주목한 것이었다면, 제솝은 대처주의를 영국사회의 축적구조의 변화, 곧 포디즘에서 포스트포디즘으로의 이행이라는 전후 영국사회의 정치경제적 변화에 초점을 둠으로써 대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역할에는 소홀한 편이었다. 대처주의의 성격 논쟁에 대한 찬반을 떠나 홀과 제솝의 주장만 보더라도 대처주의가 영국사회의 축적구조와 그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에 얼마나 중대한 변화를 끼쳤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문학 및 문화연구가 주로 고등교육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감안할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대처주의가 시민사회의 토대인 대학교육을 복지국가 비리의 온상이자 비판적 좌파문화의 근거지로 인식하였다는 점이다. 즉, 대처주의는 대학교육의 가치를 이데올로기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으며, 60년대 이후 신설된 신흥대학과 폴리테크닉의 교양강좌를 직업주의적 프로그램으로 대체하도록 직접 압력을 행사하였다. 특히 이런 압력이 단순히 이데올로기적 공세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재정삭감이라는 대학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방식으로 실행되었다. 이런 사실은 학문연구에 대한 연구자의 인식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60년대 이후 진보적 이론의 비판을 받아 수세적인 입장에 있던 일부 보수적인 인문학자들이 대처주의의 등장을 진보적 이론을 공격하기 위한 기회로 삼기도 했지만, 대처주의의 등장은 보수적이든 진보적이든 인문학 전체의 위기를 가져왔다.
Ⅱ. 비평의 정치화와 문학적 가치 비판
비평은 사회현실의 변화에 의해 제약을 받으면서도 나름의 자율성을 갖는다. 사회가 비교적 안정적일 경우, 비록 비평계 내부에서는 기존의 지배적 가치를 둘러싼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비평은 질문의 방식만을 달리하는 문제틀(problematic)과 그 교체에 대한 논쟁에 몰두할 뿐이다. 그러므로 비평의 자율적 장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은 채 지배적 가치를 둘러싼 논쟁들만 계속된다. 하지만 사회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거나 위기를 겪게 될 경우, 그동안 조화로운 모습을 보이던 비평의 현실구속성과 자율성 사이의 관계는 서로 모순적인 관계로 돌변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결과 비평의 장에는 이전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은 서둘러 퇴장되고, 새롭게 출현하는 현실과 관련된 새로운 비평적 논점들이 등장함으로써 패러다임의 교체에 가까운 변화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우선 1990년대 영국비평은 주로 80년대 비평적 변화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하겠다. 90년대 비평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80년대의 비평적 특징과 그 이전 시기의 비평과의 차별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처주의의 등장은 80년대 비평의 지반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는다. 70년대 진보적 비평의 대체적 모습은 기존 영문학의 지배적 가치, 특히 F. R. 리비스류의 '자유주의적 인본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적·정치적 기능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문학텍스트의 생산을 과학적으로 탐구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글턴의 {비평과 이데올로기}(Criticism and Ideology, 1976)가 그 대표적인 예인데, 그것의 주된 문제의식은 영국에서의 문학비평이 주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치로 채색되어 왔고, 특히 도덕적 가치는 문학의 정치적 차원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전유되어 왔다는 것을 전제로 문학을 도덕적 가치로부터 분리하여 그 생산의 조건들을 과학적으로 탐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글턴은 '이데올로기와의 이론적 단절'을 강조한 알튀세르 / 마슈레의 생산이론을 근거로 문학에 대한 기존의 가치론적 접근방식을 비판하고 문학의 생산과정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글턴 자신도 80년대 들어 자기비판했듯이 {비평과 이데올로기}는 문학의 장 내에서 유통되는 문학적 가치를 비판한 데 그쳤을 뿐 대안적인 가치를 내놓거나 영문학의 제도적 장 자체를 문제삼는 차원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8-90년대의 문학비평과 이론은 대처주의의 이데올로기적 공격이 고등교육의 진보적 가치뿐 아니라 그 제도를 겨냥했듯이, 기존의 문학적 가치에 대한 대항적 가치를 내놓거나(비평의 정치화) 문학적 가치를 재생산하는 제도(문학의 제도적 구성론)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문학이론의 쟁점은 문학의 장 내부의 지배적 가치의 문제에서 문학의 가치를 통제·검열·구성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문제로, 그리고 그것을 비판하는 보다 정치적인 비평으로 옮겨가게 된다. 비평의 정치화의 경향은 거의 모든 젊은 비평가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그 중에서도 이글턴이 가장 의식적인 편이다. 특히 그의 비평은 문학의 제도구성론이나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의 전환과 같은 영국이론의 새로운 흐름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이론적 입장을 다른 입장들과 비교할 때 그의 논점은 좀더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우선 8-90년대 영국비평을 그 이전의 비평과 동일한 지반 위에 두는 것은 80년대 영국사회의 전반에 걸친 변화를 간과하는 것이 된다는 점을 확인해두자. 80년대 대처주의의 등장은 대학의 인문학자들이나 문학이론가들에게 전혀 새로운 현상이었다. 그것은 대학에도 시장의 논리를 강요했고 그것을 빌미로 대학의 교과과정을 직업주의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대처 정부는 대학의 진보적인 비판세력을 대학운영의 비효율성을 초래한 일차 원인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이러한 압력은 대학의 진보적이고 비판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작용했다. 사실 70년대 말까지 영국의 대학은 대학 밖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고 자체의 자율성을 십분 보장받았다. 대학의 학문연구 또한 대학 자체에 맡겨졌기 때문에 대학은 진보적이든 보수적이든 대학교수의 안락한 보금자리였고 사회비판세력의 거처가 될 수 있었다. 비판적 이론들 역시 대학의 이러한 보호 기능 때문에 사회제도나 대학제도보다는 그 내부에 통용되는 가치만을 문제삼았다. 그러나 대처정부는 진보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호하는 대학교육의 제도까지 수정을 요구하였다. 일순간 제도는 첨예한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고 그 억압적인 기능이 부각되었다. 가치 비판과 이론 탐구에만 전념해온 진보적 이론가들은 대처주의를 계기로 그동안의 가치비판이 그 가치를 뒷받침하는 제도에 대한 비판 없이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따라서 문제는 문학적 가치의 문제를 규명하는 작업보다 그러한 가치를 특정한 방향으로 유통시키는 문학제도의 억압성을 폭로하는 작업이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일부 급진적 이론가들은 문학텍스트와 그 가치가 문학제도와 지배담론에 의하여 구성된 것으로, 그리고 문학텍스트의 가치 또한 텍스트에 내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문학제도에 연루된 특정한 권력관계들 속에서 제도적·담론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가령 토니 베넷(Tony Bennet) 같은 문학구성론자는 텍스트의 가치는 텍스트 '내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외부'의 제도와 담론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며, 문학텍스트 또한 "역사적으로 특정하고 제도적으로 조직화된 장 속에서 펼쳐지는 텍스트의 효용과 효과"(Bennet 3-11)에 다름 아니라고 말한다. 문화적 유물론자인 앨런 신필드(Alan Sinfield) 역시 '문화적 장치'로서의 문학을 강조하고 이 장치는 마치 작품과 작가 또는 텍스트와 독자가 직접 소통하는 것처럼 보이게 할 정도로 문학제도를 은폐하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Literature 26-37).
베넷은 {형식주의와 맑스주의}(Formalism and Marxism, 1979)에서 이미 문학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고 비평의 구성적·실천적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문학 내의 특정한 속성들을 바탕으로 문학을 정의하는 비평을 관념론이라 비판한 바 있다. 1990년에 발표된 {문학 밖으로}(Outside Literature)에서 그는 맑스주의의 인식론과 이데올로기 개념을 부정하는 포스트맑스주의를 근거로 문학의 특수성을 주장하는 문학존재론을 비판하고 문학의 역사성과 문학제도의 구성적 역할을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그의 주장 가운데 특기할 점은, 문학의 특수성(the specificity of literature)을 주장하는 문학의 존재론에 오염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학의 "외부"에 서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목이다. 즉, 문학의 "내부"는 이미 존재하는 문학적 관행, 제도, 그리고 담론에 의해 구성되고 규정되기 때문에, 문학에 대한 발본적 사고를 위하여 "현재의 문학제도와 관행들 그리고 논쟁들이 지배하는 장을 이론적·정치적으로 구성하는 데 연루되지 않으면서 문학 기능의 역사를 쓸 수 있는 위치"(Bennet 5)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학의 외부로 나아가서 문학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보자는 발상은 단순히 문학적 가치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것이 문학의 존재론에 대한 비판과 결부될 때 문학적 가치 자체에 대한 부정이 될 수 있다. 사실 베넷의 주된 비판대상은 문학의 내재적 가치뿐만 아니라 그러한 가치와 내연관계를 형성하면서 문학의 특수성 규명에 주력해온 맑스주의 문학이론이다. 그는 맑스주의 문학이론이 문학/역사, 그리고 문학/이데올로기의 이분법을 바탕으로 항상 역사의 '반영' 내지는 '생산'의 입장에서 문학의 특수성을 규명하거나 문학을 이데올로기와 과학 '사이'에 둠으로써 그 존재를 특권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루카치를 비롯하여 이글턴, 프레드릭 제임슨과 같은 맑스주의 문학이론가에게 '역사'는 비평가의 해석에 객관적 토대를 제공하면서 그러한 해석이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것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아주는, 즉 문학텍스트의 진정성과 의미를 해독하기 위한 해석적 장치이자 판단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베넷은 '역사'는 '구체적이고 살아있는 사실'이 아니라 고도로 차별화된 '사회적 구성물'이며 특정한 절차에 의하여 통제되는 '특정한 담론체'라고 주장한다(49-50). 이러한 주장은 역사를 문학의 궁극적인 근원 내지는 지시대상으로 간주하는 태도를 비판하고 나아가 문학의 특수성을 역사와의 관계 속에서 인식론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문학의 특수성을 타영역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보다는 문학 자체, 즉 문학을 생성하는 제도와의 관련성 속에서, 더 구체적으로는 '문학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하는 질문보다 '문학으로 무엇을 수행할 것인가'하는 질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맑스주의 문학이론에 대한 베넷의 이러한 비판은 사실 80년대 중·후반 맑스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영국에서 유행했던 포스트맑스주의에 이론적으로 근거한 것이다. 포스트맑스주의가 영국에서 제기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포스트맑스주의는 부분적으로 대처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대응 속에서 형성되었다. 즉, 그것은 대처주의가 수행한 이데올로기적 기능에 대한 인식, 곧 이데올로기란 현실 반영의 수동적인 문제가 아니라, 지배계급이든 피지배계급이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대중들에게 적극적인 헤게모니를 행사하면서 대중들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는 능동적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그것을 좌파적으로 전유하고자 한 것이었다. 진보적 지식인들은 큰 대가를 지불하면서 신보수주의자들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정치적이고 수행적인 의미를 터득하게 되었던 셈이다.
뿐만 아니라 포스트맑스주의가 이데올로기의 인식적 기능보다 그 실천적 의미를 강조한 것은 보수주의적 공격 못지않게 80년대 이후 전통적 계급 개념으로 정의될 수 없는 다양한 실천세력의 등장과도 관련이 있다. 우선 계급이라는 통합적 중심에서 분리된 다양한 정치투쟁의 영역들이 출현하였고, 사회적·문화적 삶의 정치화가 노골화되었으며, 사고의 차원에서도 계급 정치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의 아이덴티티와 정치적 역할을 사고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라클라우(Laclau)와 무페(Mouffe)는 오늘날 "노동계급의 존재론적 중심성과 한 유형의 사회로부터 다른 유형의 사회로 이행하는데 근본적인 계기로 간주되는 대문자 R로 시작되는 혁명의 역할, 그리고 정치라는 계기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완벽하게 통일적이고 동질적인 집합의지에 대한 환상적 전망 위에 근거한 사회주의라는 전체적인 개념"(Laclau 2)이 위기에 처했다고 주장하면서, 그 대안으로 "특권적인 단절점과 하나의 통일된 정치공간 안에 투쟁들을 합류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 사회적인 다원성과 비결정성을 수용"(152)하는 민주적 혁명을 강조한다. 베넷 또한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사회는, 모순관계를 중심으로 다양한 사회적 부문들이 하나로 통합된 전체라기보다는 "분산된 차이들의 연결망으로서 모든 부문들이 서로 유동적이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접합적 관계"(Bennet 22)로 사고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후 영국에서는 다양한 민족들과 인종들을 식민화한 거대 제국의 경험이 아련한 향수로만 남게 되고 그 몰락으로 그동안 봉합되어 있던 다양한 갈등들이 표출되면서 제국이라는 '상상적 공동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런던 등 대도시로 흘러든 식민지 이민자들이나 여성과 동성애자를 비롯한 사회소외층들이 복지국가 속으로 통합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80년대의 경기침체 속에서 사회악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등 사회문제화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민족, 인종, 성 등과 같은 이질적 요인들이 개입된 이런 탈중심화의 현상을 계급 개념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 현실사회주의의 위기와 해체의 영향까지 가미되어 다양한 집단들은 자신들의 아이덴티티의 이론적 근거를 '계급' 개념에서만 구할 수 없게 되었고, 심지어 계급 개념은 그러한 아이덴티티의 형성을 지연 내지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들은 계급 중심이 아니라 계급, 성, 인종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연대하고자 했다. 그 결과 포스트맑스주의에는 중심 자체를 부정하고 다양성만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던한 계기들이 스며들게 되었다.
이런 경향에 가장 강력한 비판적 입장을 취한 것은 테리 이글턴이었다. 그는 "1970년대 초에는 기표, 사회주의, 그리고 성 사이의 관계가 이야기되더니, 1980년대 초에는 기표와 성의 관계, 그리고 1990년대 초에는 아예 성에 대한 담론뿐이다"("Afterword" 194)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이글턴의 이 지적은 앨런 신필드와 조너던 돌리모어처럼 문화적 유물론을 동성애담론으로 구성하고자 하는 경향, 특히 성 담론을 계급 담론과 동등하게 두거나 오히려 성담론을 우선시하려는 경향들을 겨냥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신필드와 돌리모어는 서섹스 대학에 "성적 반체제와 문화적 변화"(Sexual Dissidence and Cultural Change)라는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계급, 젠더, 그리고 인종 간의 연대의 문제보다 동성애 문제만을 단일한 쟁점으로 부각시킨다. 이들은 일련의 저작을 통하여 동성애를 병리적이고 비정상적인 성도착으로 구성하는 메커니즘들을 비판하고 성도착에 정치적 전복성을 복원하고자 한다. 특히 이들은 동성애 문제를 지배문화에 도전하는 저항적인 하위문화로 인식하고, 동성애 문화를 위한 제도와 유기적 지식인의 창출을 주장한다(Sinfield, Cultural Politics 75). 이러한 동성애 문화는 90년대 들어 동성애자들이 더 이상 계급 문제에 의탁하지 않고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주체적으로 구성하고자 한 대표적인 예에 해당하겠지만, 사실 이러한 움직임은 다양한 하위문화연구, 페미니즘의 발전, 그리고 최근 문화연구와 탈식민주의 간의 이론적 접합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문학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는 문학의 제도적·담론적 구성론이나 문학의 지배적 가치를 비판하면서 그 가치를 상대화하는 최근의 문화적 유물론은, 문학에 부여된 기존의 특권을 부정하고 그것을 역사적이고 실천적으로 이해하는 장점을 갖지만, 문학적 가치의 복잡성, 보편성, 모순성을 단순화하면서 가치와 제도 간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이해하는 한계가 있다. 특히 이 주장은 문학적 가치를 부정하거나 상대화함으로써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의 전환을 가속화하고 그 과정에서 문학의 가치 문제를 보수적인 학계의 전유물로 넘겨줄 가능성 또한 없지 않았다. 테리 이글턴은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그의 책 제목처럼 "결을 거스르는" 비평을 주도한다.
그는 70년대 영국비평의 중요한 논점을 생성했고 이론 논쟁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바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80년대의 달라진 이론지형에 개입하기 위하여 그의 비평 또한 중요한 이론적 변화를 겪는다. 그는 {비평과 이데올로기}에서 시도했던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비평을 문화적 실천과 동떨어진 아카데미즘이었다고 자인한다. 즉, 그는 문학적 가치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정치적 실천에 무력했음을 시인하면서 "맑스주의 미학에서 혁명적인 문화이론과 실천으로"("Interview" 54; Revolutionary "Preface")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80년대 초에 출간된 {발터 벤야민: 혁명적 비평을 향하여}(Walter Benjamin or Towards a Revolutionary Criticism, 1981), {문학이론입문}(Literary Theory: An Introduction, 1983), {비평의 기능}(The Function of Criticism, 1984), 그리고 {결을 거슬러서}(Against the Grain, 1986)는 달라진 정치상황 속에서 이론과 실천의 단절을 극복할 수 있는 정치적·혁명적 비평의 가능성을 고민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정치비평은 베넷이나 신필드와 달라서, 문학적 가치를 부정하거나 상대화하기보다는 기존의 문학적 가치를 역사적 맥락 속에 두고 그 가치의 모순성과 복합성에 주목함으로써 억압된 정치적 가치를 복원하고자 한 '구원'의 비평이었다.
이글턴이 정치비평으로 나아가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정치적·이론적 변화가 있었다. 그는 그런 계기들을 {결을 거슬러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70년대 말 세계경제의 침체로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가 도래하고 영국의 정치상황이 극단적인 보수주의로 회귀한 상황에 이론적 맑스주의는 더 이상 유효할 수 없게 되었다는 자성과, 느긋한 이론적 논의가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현실의 변화를 외면한 채, 담론적 실천으로 현실적 실천을 대신하려는 포스트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가 맑스주의의 대안으로 출현한 상황이다. 이글턴은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이론적 지형변화 속에서 맑스주의를 경제주의와 환원주의로 몰아세우며 실용주의적 노선을 채택한 포스트맑스주의와 탈구조주의에 대항하는, 보다 엄밀한 정치적 맑스주의를 옹호하고자 한다(Against the Grain 4).
이러한 정치비평은 그 맥락에 따라 대상을 달리할 뿐 최근 저작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10만부 이상 판매된 {문학이론입문}의 2판(1996) [후기](Afterword)에서 그는 초판 출판 당시의 상황과 달리 이제 "예술작품에 대한 중립적이거나 순진무구한 독법은 없다"는 주장이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상식화되었다고 말한다. 이는 그동안 지배적인 위치를 점해왔던 영국비평의 인본주의적 자유주의는 더 이상 설자리를 잃었고 비평 또한 각종 다양한 이론들의 각축장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글턴은 {문학이론입문}의 출간 이후에 유행했던 다양한 이론들, 곧 신역사주의, 문화적 유물론, 포스트모더니즘, 탈식민주의, 문화연구의 정치성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그는 이러한 이론들을 문화의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하거나 계급과 물적 토대를 문화적 현상으로 다루려는 '문화주의'로 규정한다. 우선 텍스트분석에 대한 지나친 의존과 비방법론적이고 개인주의적 스타일이 강한 해체주의의 열기가 식으면서 등장한 신역사주의는 푸코의 불연속적 역사와 권력 개념에 의존하여 역사, 진리, 인과성, 목적, 방향성과 같은 맑스와 헤겔의 개념을 비판했다. 특히 그것은 계급보다 성 문제, 노동과 물질적 재생산보다 종족성, 경제보다는 권력관계와 문화를 주된 논의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글턴은 "신역사주의가 보기드문 대담성과 뛰어난 비판적 해석을 가지고 기존의 역사이론에 도전했지만 거시적인 역사적 틀을 거부함으로써, 역사적 구조와 장기적 동향을 경멸하는 ··· 진부하고 보수적인 사상과 불편하지만 유사성을 띨 수밖에 없다"("Afterword" 198)고 비판한다. 특히 신역사주의가 주장하는 권력과 저항의 순환적 관계는 엘리자베드조의 국가권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늘날 캘리포니아의 급진적 지식인들의 운명, 즉 그들을 "정치적 희망에서 정치적 비관론으로의 전환"하게 만든, "1980년대, 특히 레이건 지배의 미국의 변화하는 분위기를 반영"(198)한다고 지적한다.
문화적 유물론에 대해서도 이글턴은 그것이 미국의 신역사주의에서 볼 수 없는 정치적 비판정신을 지니고 있지만 문화와 사회를 관련짓기보다는 문화를 이미 뿌리부터 철저하게 사회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문화와 사회적 현실 간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문화 개념을 지나치게 확장한다고 비판한다.
"문화적 유물론은 고전적 맑스주의의 풍부화이면서 동시에 희석화일 수 있다. 그것이 풍부화인 이유는 유물론을 대담하게 정신적 차원까지 적용했기 때문이고, 그것이 희석화인 이유는 그렇게 함으로써 정통적 맑스주의의 핵심인, 경제적인 것과 문화적인 것 간의 경계를 흐렸기 때문이다. 윌리엄즈 자신의 말처럼, 문화적 유물론은 맑스주의와 '양립가능하지만' 그것은 문화를 이차적이고 '상부구조적' 지위에 귀속시켜온 맑스주의와는 서로 상충하며, 이러한 위계구조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신역사주의와 유사했다. 또한 그것은 맑스주의가 전통적으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일련의 주제들, 곧 성, 페미니즘, 인종적이고 탈식민적인 문제들을 논제로 택했다는 점에서 신역사주의와 유사했다. 이런 점에서 문화적 유물론은 맑스주의를 근본적으로 수정하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나치게 시류적이고 무비판적이며 비역사적인 측면을 경계하면서 그 둘간의 교각을 형성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영국 문화비평가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
이글턴의 이 지적은 문화적 유물론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인 평가처럼 들리지만, 향후 그의 주된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이고, 특히 문화적 유물론과 같은 급진적 이론에 점차 스며들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을 깨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이는 문화적 유물론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1996)은 최근 문화적 유물론이 맑스주의로부터 이탈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내연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대한 강력한 비판이다. 성 문제와 전복의 정치에 과도하게 매달리는 젊은 문화적 유물론자들을 겨냥하여 이글턴은 "너무 어린 나머지" 수많은 남녀들이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면서 자유와 정의를 쟁취하고자 했던 "대중적 급진 정치학을 회상하지 못하고 억압적 다수에 대한 우울한 경험만을 갖고 있는 자들의 이론"(Postmodernism 2)에 지나지 않는다고 힐난한다.
나아가 이글턴은 문화연구에 대해서 소네트와 TV 연속극 간의 구분조차 무시하는 가치상대주의로, 그리고 탈식민주의에 대해서도 그것이 "제3세계의 혁명적 민족주의에서 ··· 초국적 자본의 권력을 깰 수 없을 것 같은 탈혁명적 상황으로의 전환을 반영"(Afterword 205)하는 것으로서, 조직적인 대중정치에 대한 포스트모던한 회의를 공유하고 그 대안을 문화적 문제에서 찾는다고 비판한다. 그에 의하면, 탈식민주의는 사회계급에 협소하게 집중되었던 급진정치학을 보다 풍부하게 했지만 차이에만 매달림으로써 다양한 인종적 집단들이 공통적으로 지니는 핵심적인 물적 조건을 흐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그 결과 탈식민주의가 다른 문화적 상대주의들과 마찬가지로 제국주의 지배의 전도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글턴이 볼 때, 중요한 것은 "언어, 피부색, 혹은 아이덴티티의 문제가 아니라 상품가격, 원료, 노동시장, 군사적 연대, 그리고 정치세력들의 문제"(205)이다.
이글턴의 입장은 영국 내에서 상당히 보수적이고 완고한 맑스주의적 입장에 속한다. 그러나 이글턴의 지적에는 개별집단들이 지나치게 자신의 정치적 문제에만 매달리는 아이덴티티의 정치학, 곧 차이의 정치학이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과 연대를 차단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근대에 펼쳐졌던 대중연대의 정치적 경험을 망각한다는 소중한 비판이 들어있다. 아이덴티티와 차이의 정치학이 그동안 억압된 집단의 가치를 복원하는 긍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의 진보적인 유산들을 전유하거나 다른 개별집단들과의 연대를 방해하는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글턴의 지적처럼, 이 정치학은 자신들의 특수한 경험을 과도하게 강조하고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 인식함으로써, 즉, 보편성을 억압적인 것으로만 이해함으로써 결국 다른 집단들과의 연대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할 우려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급진성은 자신들의 고립을 대가로 한 것이다(Postmodernism 116). 이글턴은 {포스트모더니즘의 환상}(1996)에서, 급진주의자들끼리는 서로 비판하지 말자는 진보진영의 묵계가 있다면, 이는 곧 기회주의적 태도라고 반박하며 개별성과 보편성, 모순과 전복, 총체성과 특수성, 거대역사, 주체 개념 등, 거의 폐기 일보직전에 놓여있는 개념들을 두고 급진적이고 포스트모던한 문화주의와의 대결을 벌인다. 그의 주장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처럼 근대의 극복은 근대와 단절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근대에 내재된 근대극복의 계기들을 찾아 계승함으로써 가능하고, 이를 위하여 정의, 평등, 자유, 진리, 그리고 자율성과 같은 근대적 개념을 새롭게 제기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이다.
Ⅲ.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의 변화
이글턴의 정치비평은 시류에 대항하고 '결을 거스르는' 비평이다. 그가 포스트맑스주의의 고립성을 경계하면서 보편적 정의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사실 이글턴과 같은 입장이 더욱 고립화되어 가는 것이 영국 이론의 현실이다. 각종 다양한 집단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더 이상 맑스주의적 계급 개념을 통하여 표현하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체적 경험 밖에 존재하는 보편적 가치와 진리에 대하여 회의적이며 행위의 일차적 준거를 항상 자신들의 경험적 가치에서 찾고자 한다. 이러한 입장이 극단화될 경우, 경험의 상대성은 가치의 상대주의로 발전해갈 수밖에 없게 된다.
베넷이나 신필드처럼 문학의 내재적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곧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문학의 가치와 '진정성'을 회의하게 하고 고급문학/대중문학의 경계를 허물어뜨림으로써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 나아가는 데 이론적으로 기여한다. 앤토니 이스트홉(Antony Easthope)은 이러한 전환을 주장하는 대표적 이론가이다. {문학연구에서 문화연구로}(Literary into Cultural Studies, 1991)에서 그는 고급문학/대중문화의 허구적 논리를 재생산하는 문학연구에서 탈피하여 문화연구로 패러다임을 전환하자고 제안한다. 그의 주된 주장은 이글턴이나 프랑크푸르트학파처럼 이데올로기와의 내적 관계를 통하여 문학의 가치를 설명하는 입장은 곧 대중문화를 폄하하기 위한 논리라고 비판하는 한편, 대중문화는 대중문화 나름의 문법(텍스트성)을 통해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을 문학의 진정성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속}(Heart of Darkness, 1899)과 {타잔}(Tarzan of the Apes, 1912) 중 오히려 후자가 더 탁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대중문화와 고급문학의 효과는 "이데올로기적인 의미의 문제가 아니라 두 개의 다른 텍스트성의 작동"(Easthope 100)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그 차이를 피어스의 상징(언어재현)/도상(시각적 재현)의 구분에 기대어 설명한다.
이러한 이스트홉의 주장은 베넷이나 신필드와는 사뭇 다르다. 베넷이나 신필드는 문학구성에 있어서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강조하는 데 반해, 이스트홉은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극히 제한적으로, 곧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가 개인의식의 차원으로 변형"되는, 즉 텍스트가 수행하는 이데올로기적 책략을 의미하는 것으로 한정한다 (132). 베넷이나 신필드가 문학이 제도적·담론적 구성물이라고 본 것은 문학의 장을 이데올로기 투쟁의 장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스트홉의 논리는 고급문학와 대중문화의 논리적 허구성을 드러내고 그 독자적인 텍스트성을 설명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문학 및 문화의 장과 제도적·실천적 현실 간의 문제,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이데올로기의 역할 문제를 간과한다. 사실 고급문학과 대중문화의 경계의 문제는 텍스트성의 문제로 다루기에는 곤란한 문제이다. 이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 현실적 맥락과의 관련성 속에서 탐구되지 못할 때, 그리고 이스트홉처럼 고급문학과 대중문화를 그 텍스트성의 문법만을 비교의 대상으로 할 때, 그것은 고급문학과 대중문화 간의 경계를 허무는 강력한 논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가장 강력한 논리가 바로 자본의 논리일 수 있다는 점을 잊게 된다.
서로간의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글턴, 베넷, 그리고 젊은 문화적 유물론의 이론은 주로 문학과 비평의 제도화 및 정치화를 중심적 테마로 삼았다면, 이스트홉은 문학의 특권을 거부하고 대중문화의 권리회복을 주장함으로써 탈문학화의 경향을 띠고 있다. 특히 전자의 이론가들은 가치의 문제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글턴은 물론이고 가치의 문제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베넷의 경우도 가치를 부정했다기보다는 가치를 구성하는 제도적·담론적 성격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스트홉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는 고급문학과 대중문화의 각각의 독자적인 문법, 곧 텍스트성에만 주목함으로써 가치의 문제를 회피한다. 이러한 회피는 텍스트성에만 주목하는 이스트홉의 방법 때문에 불가피해 보인다. 가치의 문제는 텍스트성 그 자체가 아니라 텍스트성과 사회현실 사이의 관계, 그리고 제도적·담론적 장 속에서 텍스트성의 역할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텍스트성에만 주목하는 이런 경향은 탈구조주의적 언어모델에 입각한 것으로 80년대 이후 영국의 문화연구에 나타나는 주류적 경향 중의 하나이다. 근래의 영국문화연구는 과거와 달리 문화텍스트를 사회경제적 구조와 관련짓는 작업보다는 주로 문화텍스트의 텍스트성과 그 소비에만 주목함으로써 텍스트를 물신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데이비드 랭(David Laing)은 청년문화, 특히 하위문화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헵디지(Hebdige)의 {하위문화}(Subculture, 1979)에 대하여 그것이 청년문화를 그 자체 독립적인 의미화의 실천으로 보지 못하고 다른 사회계급의 문제로 환원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즉, 헵디지는 펑크 음악을 일차적으로 음악장르로 보지 않고 "청년들의 활동을 특정한 사회계급과 관련짓고 있으며 모드족, 스킨헤드족과 같은 하위문화의 아무런 목적없는 활동의 타당성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검증하고 있다"(Laing 123)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헵디지 자신도 그 후 랭이 주장하는 것과 비슷한 입장으로 나아가버렸다는 점이다. 그는 {빛 속에 숨기}(Hiding in the Light, 1988)에서 {하위문화}에서 보여주었던 계급, 인종, 문화적 스타일 간의 복합적 관계, 특히 스타일을 계급문화와 관련짓는 작업을 거부하고 텍스트와 사물의 이미지 분석에 주로 집중한다. 그는 "문화적 실천과 사회구성체 간의 잠정적인 관계에 대한 분석에서 (···) 의미화와 비의미화의 요소들을 결합하는 유동체 속에서 '의미'와 '감정'이 순환·결합·분리되는 네트워크를 통해 리비드적인 '정보'의 흐름이 조직화되는 과정에 대한 비판적 인식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러한 전환이 "새로운 집단적이고 민주적인 가능성을 고양시킨다면, 자신은 기꺼이 포스트모더니스트"(223-226)라고 선언한다.
헵디지의 이런 변화는 일부 문화연구자들에게만 국한된 현상으로만 볼 수 없다. 사실 최근 문화연구자들의 주장에는 시장과 자본에 대하여 예전과 전혀 다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 E. P 톰슨, 스튜어트 홀, 나아가서 70년대의 헵디지와 폴 윌리스(Paul Willis)조차도 시장과 자본에 대하여 적대적이었으며 그것을 근본적으로 '반민중적인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나 이제 헵디지나 윌리스는 시장을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의 장으로 인식한다. 폴 윌리스는 시장이 모순적이지만 소비자에게 어떤 능력을 제공해준다고 지적하면서 "비록 절대다수를 위한 문화적 해방으로 나아가는 최상의 길은 아니겠지만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열어줄 수 있다"(159)고 주장한다. 이는 윌리스 자신의 {노동하는 것을 배우기}(Learning to Labor: How Working Class Kids Gets Working Class Jobs, 1977)와 비교해볼 때, 상당한 변화임을 실감할 수 있다. 그에게 이제 시장은 노동자계급의 자식이 노동계급으로 재생산되는 곳이 아니라 창조적인 상징적 문화, 곧 공통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날 수 있는 곳으로 여겨진다.
헵디지와 윌리스는 최근 들어 문화의 생산과정보다는 '문화의 소비전략'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소비의 패턴을 결정하는 사회구성체보다 소비행위 자체에 관심을 두는 것은 소비자의 선택을 구성하는 사회적 결정과정을 드러내는 데 한계(Martin Marker & Anne Beezer 11-2)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시장 속에서 문화매체의 변화 및 기능이 갖는 의미를 간과하는 것이 된다. 헵디지와 윌리스가 버밍엄문화연구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온 대표적 문화이론가들이라는 점에서 이들의 이론적 변화는 영국 문화연구 내의 모종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변화를 추적하는 작업은 문화연구 내에서만 이루어질 수는 없다. 사실 영국 문화연구의 이러한 변화 이면에는 일련의 사회적 계기들, 즉, 80년대 들어 영국의 축적구조의 변화로 인한 문화자본에 대한 새로운 인식, 대처주의의 공격으로 대학의 급진문화의 약화와 대학의 시장으로의 편입, 나아가서 도덕적·학문적 가치중심으로서의 문학제도의 약화와 대학교육의 실용화와 같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이러한 계기들을 상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편에서는 교육삭감의 여파로 인한 교육시장의 위축과 구조재조정으로 인한 노동시장의 불안정 때문에 지식인들이 점차 위축되어 가는 대학보다는 불안정하고 열악하지만 상대적으로 기회가 많은 문화산업 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서는 대학의 급속한 전문화와 기업화로 인하여 경제적 효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대학 내에서 문학연구보다 문화연구가 더 중요해지고 있는 것이다.
Ⅳ. 문학연구, 그리고 새로운 가치의 필요성
이제까지 살펴본 영국의 문학비평과 문화연구를 통해서 볼 때, 문학비평이 가치의 문제를 저버릴 수 없다면, 문화연구는 가치의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문학의 위기는 그것의 상품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면서 문학이 한 때 누렸던 자율적이고 비판적 거리가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연구는 문화연구에 의해 서서히 밀려나고 있는 신세에 처해있다. 하지만 문학연구는 자본주의 시장으로의 급속한 편입에도 불구하고 시장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것이 인간의 삶에 끼친 영향을 비판한 중요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는 문화의 상품화 속에서 인간과 문화의 가치의 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연구의 가치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문화연구 이후 문학연구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고 그 과정 속에서 문학적 가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성하는 일일 것이다. 문화연구는 그동안 문학이 자신의 고유한 속성으로 여겨온 것들을 탈신비화하면서 문학연구를 맥락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 결과 문학연구는 문화연구의 등장 이전에 자신이 누려온 지위와 가치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문학연구가 문화연구를 통과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제대로 반성하게 된다면, 문학연구는 새로운 의미와 가능성을 갖게 될 것이다. 문화연구가 문화의 대중성을 회복하고 그 속에서 저항의 가능성을 찾는다는 점에서 문학보다 더 비판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과정에 스며드는 자본의 지배에 주목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고급문학과 대중문화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본의 논리와 결탁하거나 문화산업 속으로 흡수될 가능성에 놓이게 된다. 그 까닭은 문화연구가 그 급진적 비판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가치들을 모두 상대화함으로써 가치의 문제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인종차별정책이 공격받고 있고, 신스탈린주의가 갑자기 전복되었으며, 자본주의가 지구의 새로운 지역에까지 그 지배력을 확장하고, 부자와 빈자의 불평등이 엄청나게 커지고 있으며, 주변부 사회들이 집중적인 착취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인간의 정의와 자유, 진리와 자율성을 외면하기는 어렵게 되었다"(Afterword 199-200)는 이글턴의 지적처럼, 가치의 문제가 새삼 다시 중요한 의제로 부상하고 있다. 지배적이고 억압적인 가치가 다른 가치들을 억압하는 데 이용될 때, 그 가치의 억압성과 허구성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작업은 더 없이 중요했다. 하지만 지배적 가치의 억압성이 폭로되고, 또한 그런 가치뿐만 아니라 모든 가치의 차이를 무효화하는 문화산업의 논리가 지배적일 때, 이에 대항하여 가치의 작업을 새롭게 제기하는 것은 외면할 수 없는 중요한 일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 문학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이 존재한다. 문학은 자신의 존재를 신비화하고 초월화하기도 하였지만 기계문명과 문화산업의 논리에 저항해온 역사적 기억과 경험을 자신의 물적 조건으로 갖고 있다. 이런 기억과 경험은 현재만을 기억하는 문화연구에 비해 문학연구에 자본주의적 상품화에 맞서 인간적 가치를 적극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한 또 한번의 가능성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문화의 시대에 삶의 모든 곳에 침투한 자본의 논리에 맞서고 미래에 도래할 인간의 삶을 구상하며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는 문학연구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대해본다.
《경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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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Literary into Cultural Studies: the Change of Theory in England since the 1980s
Kim, Yong Gyu
The situation of theory in England has been much changed since the 1980s. That is due primarily to social and institutional changes driven by Thatcher government and its ideology, rather than the changes within the field of theory. It is commonly said that theory has relative autonomy by which it is able to have an independent role in participating in social reality. In case of radical transformation in society, however, the field of theory could be much more influenced by social changes.
The English theory in the 1980s underwent radical changes because of the political and ideological attack by Thatcherism. Thatcher government and its ideologists undertook to attack universities, the base of radical culture consolidated since the 1960s and at the same time pressed them to change their academic curricula into professionalist ones. If the universities hadn't accepted their proposals, they could have suffered serious cutback of funds and grants offered by the government. Because of the shrinking in the culture of universities, it got more difficult for young intellectuals to take a job in universities. As the result, they had to look for other possibilities in foreign countries and market outside universities.
Roughly speaking, this institutional and ideological changes had some crucial influences on intellectuals' culture. In the political and institutional situation, intellectuals' response appeared as about two forms. Some radical intellectuals turned to more political criticism against the hegemonical attack of Thatcherism, while others began to rethink the possibility of market and concern themselves with cultural studies. In particular they eval!uated popular culture more positively than the previous cultural critics. In consequence, two emerging processes attracted our attention: one is the rise of political criticism, or the other is the rapid turn of literary into cultural studies.
실린곳 : 새한영어영문학 제44권 제1호(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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