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72> 사탄의 태양 아래 -1-
무한도전 158회 090620 : 여드름 브레이크 1부
삶을 박탈당한 자들의 은유로서 '빈 집'
영화 평론가 정성일은 2009년 한 해 동안 한국영화를 지배한 이미지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간단히 '집'이라고 답한 바 있다.1) 홍상수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박찬욱의 <박쥐>, 봉준호의 <마더>, 박찬옥의 <파주>, 양준익의 <똥파리> 등의 영화들이 '어쩔 수 없이' 집에 관한 한 사건, 즉 철거민 5명과 경찰특공대 1명이 불에 타죽고 23명이 부상당한 용산에서의 그 참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 따르면 '집'은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적 전선"으로서 모든 것이 시작되고, 또 그 곳에서 다시 시작되어야만 하는 "육체"이자 "삶"이며, "실제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성일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가 논의되어야할 맥락이 그로 인해 명확해졌다는 점이다. 무한도전은 직접적으로 '용산'을 언급하지도 않고, 또 그 사건에 대해 어떤 입장을 뚜렷이 표명하지도 않지만, 나열된 재개발 지역의 목록들 속에 용산 역시 포함될 것임이 분명하기에 '여드름 브레이크'는 용산 참사를 사회적 콘텍스트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다소 민감한 소재를 다루면서도 선정적이거나 선동적인 방식을 취하진 않았다. 대신 거칠고 건조한 질감의 영상 속에 포착된 재개발 지역의 풍경들에는 쓸쓸하고 서글픈 분위기가 배어나오는데, 이는 철거지역을 정치적 투쟁의 장소가 아닌 사람이 살았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떠나버리고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을 추억처럼 간직한 장소로 표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도전에 등장하는 철거지역과 텅 빈 건물들은 삶을 박탈당한 자들을 은유한다.
공간의 미학적 구원
'여드름 브레이크'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누리꾼들이 지적한 것처럼 '재개발'이란 코드로 엮여 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이주민들의 아픔'이나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가는 것들'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2)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서울 근교의 그 수많은 재개발 지역들 중 하필 그 장소들이 선택되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 이는 공간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집착한 나머지 사건을 무대화하는 공간의 미학적 기능을 등안시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무한도전에 담긴 시사적 의미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해석은 매우 단순한 하나의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무한도전이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충분한 오락적 재미를 줄 뿐만 아니라 생각할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좋은 프로그램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능의 본령은 '웃음', 즉 감각적 즐거움이지 추상적 '의미'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생각하는 공익은 웃음 속에서 자연스레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김태호 피디의 주장에서도 확인된다.3)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의 재미는 숨은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그림'에 있다고 지적한 평론가 강명석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다.4) "'여드름 브레이크'는 오락 프로그램이 자신의 영상 미학을 가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속에 우리 시대의 기록을 남길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그의 문장은 '여드름 브레이크'가 획득한 미학적 성취의 핵심을 잘 요약하고 있다.
김태호 피디는 최근 들어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용어 대신 '작가주의 예능'으로 무한도전을 규정한 바 있는데, 이는 독자적인 영상 미학의 정립 없이는 성립하기 어려운 말이다. 실제로 무한도전은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나 '갱스 오브 뉴욕 특집' 등에서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기 어려웠던 과격한 영상 실험을 감행해왔다. 이러한 시도는 예능 프로그램을 무의미한 시간 때우기용으로 치부하던 관습을 깨고 독자적인 미학을 갖춘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리려는 발상의 전환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여드름 브레이크'를 해석하기 위해선 '그림', 즉 공간의 이미지 분석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해석 모델은 박명수의 등에 그려진 그림으로 제시되고 있다.
박명수의 등에는 '남대문-산삼-시계-민들레-아령-파리-트럭'이 차례로 그려져 있는데, 이 때 '남대문-그림'은 화재로 소실된 '남대문-사물'을 지시하는게 아니라 '남'이라는 '기호-이미지'를 지시하고, 이런 방식으로 해석된 각각의 '기호-이미지'들이 모여 '남산 시민 아파트'라는 특정한 '의미'를 띠게 된다. 즉 '의미'의 원천은 이미지가 지시하는 실제의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조합'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이 모델은 설명하고 있다. 매우 유치해보이지만 이 단순한 모델 안에는 '의미'의 기원을 기호들 간의 차이의 체계로 파악한 소쉬르의 언어철학과, 이미지의 충돌에 의한 의미 생산을 자신의 몽타주 이론으로 제시한 에이젠슈테인의 영화 이론이 담겨 있다.
평론가 정덕현은 박명수의 등에 그려진 그림을 '여드름 브레이크'를 읽는 하나의 해석 모델로 옳게 지적했지만 모델 자체에 대한 전반적인 무지를 드러낸다.5) "언뜻 보기에는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지만 사실 연결시키면 의미를 형성하는 단어들처럼, 앞으로 벌어질 일련의 사건들이 주는 키워드가 하나의 의미망을 형성할 거라는 것"이라고 쓴 문장은 그가 이미지의 조합과 구성에 의해 의미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재미와 의미의 요소들은 하나로 엮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따로 떨어져 있었던 셈"이라고 결론 내리며 이미지의 의미를 "재개발"이라는 사회적 사실로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다.
물론 배경이 되는 공간들의 공통된 키워드인 '재개발'이라는 해석학적 코드에 따라 의미를 생산하는 것도 가능한 노릇이지만, 그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의미라고 주장하는 것은 각각의 공간 이미지가 갖고 있는 풍부한 의미의 뉘앙스들을 놓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남산 시민 아파트가 보여준 독특한 미로형 구조나 고 이주일 선생이 살기도 했던 연예인 아파트의 중정(中庭)형 구조가 갖고 있는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재개발'이란 이름으로 묶어서 취급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오히려 각각의 공간들을 '재개발'이라는 옥쇄에서 풀어내 그 자체의 기능과 의미를 지닌 이미지 구조로 파악하는 것이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재개발 공간의 미학적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연예인 아파트(동대문 아파트)의 사례를 통해 입증된다. 서울시는 최근 이 아파트를 철거하는 대신 건물을 매입해 리모델링을 한 후 예술가들의 작업공간과 전시공간으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6) 이는 건물이 지닌 미학적이고 역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인데, 박진희 연세대 건축공간계획연구실 연구원은 "동대문아파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중정형' 아파트로, 세대간에 소통과 공유가 가능했다는 점에서 건축적으로 의미" 지녔고, "국내에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중정형 아파트를 보존함으로써 무조건 철거한 뒤 재개발하는 관행에서 벗어나 도시 재개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것"이라고 그 의미를 설명했다.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 편이 재개발의 공간을 다루었던 의도도 대중들이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탈피해서 인식의 전환을 이루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현재 그대로의 모습이 충분히 아름다울 수도 있고 그 자체로 가치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굳이 '뉴타운' 열풍에 동참해서 표를 몰아주는 어리석음도 줄어들지 않을까?
미로에는 괴물이 산다
평론가 정덕현이 박명수의 등에 그려진 그림에서 놓친 또다른 점은 이것이 해석 모델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이미지 생산 모델로도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즉 무한도전팀이 재개발 지역을 선정할 때 우선적으로 고려한 점은 <프리즌 브레이크>를 패러디한 코믹 범죄 스릴러물을 제작하는데 적합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의 여부였지 재개발이라는 사회적 사실이 아니었다. 이는 김태호 피디의 인터뷰에서도 확인된다.
"재개발과 이주민 등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 아파트, 연예인 아파트, 오쇠동은 이번 패러디 아이템을 정한 후 현장답사 중에 알게 된 곳이다. 자료조사 끝에 3장소의 공통점을 발견했고 의미까지 알게 됐다. 작가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것들을 도전 중에 자연스럽게 풀어내면 어떨까 하면서 아이템을 확장시켰다."
영화 <주먹이 운다>의 배경으로 등장한 남산 시민 아파트
영화 <세븐 데이즈>의 배경으로 등장한 연예인 아파트(동대문 아파트)
그래서 '여드름 브레이크'는 공간이 지닌 사회적 의미를 모른다고 하더라도 한 편의 오락물로 즐기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냐하면 공간의 사회적 의미는 제거하고 영화적 미장센을 구축하기 위한 이미지만을 취했기 때문이다. 공간을 이러한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실제 영화 제작 과정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무한도전에서 배경으로 등장한 남산 시민 아파트나 연예인 아파트는 이미 영화 <친절한 금자씨>, <주먹이 운다>, <소름>, <세븐 데이즈> 등에서 촬영지로 이용된 바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처럼 각각의 공간들이 어떠한 미학적 혹은 서사적 원리에 따라 배열되어 하나의 텍스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여드름 브레이크'라는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결정적이라 하겠다.
우선 출연자들이 남산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장소는 미로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그들이 적과 동지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로 누군가 파놓은 꾀임에 속아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즉 남산 시민 아파트는 '여드름 브레이크'의 전체 서사를 결정짓는 상징적 공간으로 등장한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노타우로스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을 필요로 한다.
테세우스와 미노타우로스
<왕위를 놓고 자신의 형제들과 투쟁을 벌이던 크레타의 미노스는 포세이돈 신에게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왕의 징표인 하얀 황소를 보내달라고 기도를 했고 포세이돈은 소원을 들어주어 미노스는 크레타의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르면 하얀 황소를 포세이돈 신에게 바치기로 약속했던 미노스는 황소가 너무 아까운 나머지 다른 황소를 바쳤고, 이에 분노한 포세이돈은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하얀 황소와 사랑에 빠지도록 저주를 내렸다. 이들이 교접한 결과 태어난 것이 몸은 인간이고 얼굴과 꼬리는 황소의 형상을 한 미노타우로스다. 미노타우로스가 성장을 하며 점점 난폭해진 나머지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미노스 왕은 명장 다이달로스에게 명령을 내려 미노타우로스가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인 미로를 만들게 했다. 다이달로스는 훗날 자신의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자신이 만든 미로에 갇히게 되는 형벌을 받게 된다.>
신화에서 알 수 있듯이 미로는 쉽게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곳이다. 그래서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징표가 필요했는데, 그것이 바로 박명수의 등에 그려진 그림이다. 박명수의 등 문신은 그것이 패러디하고 있는 <프리즌 브레이크>의 등 문신과 정반대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스코필드의 등 문신은 감옥을 벗어나기 위한 탈출수단이었다면 박명수의 그것은 미로라는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한 출입증 같은 것이다.
미노타우로스의 역할은 의외로 쉽게 추측할 수 있는데 그 역할을 맡은 이는 바로 길이다. 길은 제작진의 지령에 따라 다른 출연자들에게 필요한 정보나 물품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들과 돈가방을 놓고 경쟁을 벌인다. 즉 미노타우로스가 인간이며 동시에 짐승이듯 길은 제작진에 속하면서 동시에 출연자들에 속해 있다. 만일 마지막 순간에 전진과 박명수가 길과 함께 배에 올라타며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면,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는 미로의 구조로 서사 구조 전체가 짜여져 있다는 사실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무한도전 제작진이 설계한 미로는 애초부터 불공정한 게임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공간이며, 형사팀과 범죄자팀은 돈을 놓고 서로 쫓고 쫓기다가 마지막에 제3자인 길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무한도전 팀은 왜 이러한 미로 구조를 설계했던 것일까? 미노스 왕보다 더 사악한 김태호 피디가 만들어놓은 미로이기 때문에?
by ddolappa
[참고자료]
1) [전영객잔] 이 시체를 보라, 그리고 응답하라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article_id=59316&mm=100000006
2) <무한도전> '여드름 브레이크' 상금 300만원, 사실은...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61201&CMPT_CD=P0001
3)김태호 PD "무도는 예능일 뿐, 공익도 웃음 안에 있다" (인터뷰)
http://media.daum.net/entertain/topic/view.html?cateid=100029&newsid=20090629105203825&p=SpoSeoul
4) [강명석의 That's hot!]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
http://issue.media.daum.net/entertain/0903_hot/view.html?issueid=4135&newsid=20090630034147053&p=hankooki
5) '무한도전'이 사회적 메시지를 전하는 방식
http://media.daum.net/entertain/all/view.html?cateid=1005&newsid=20090628075806392&p=poctan
6) 45살 동대문아파트, 예술공간으로 ‘회춘’
http://media.daum.net/society/nation/others/view.html?cateid=100011&newsid=20100210224021967&p=h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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