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159회

ddolappa 2010. 4. 14. 14:53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73> 사탄의 태양 아래 -2-

 

 


무한도전 159회 090627 : 여드름 브레이크 2부


 

추방의 서사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의 배경인 서울역, 한강 선착장, 야구장이 스펙타클한 사건이 벌어지는 무대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여드름 브레이크'에 등장하는 장소들은 '재개발 지역'이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1) 공간의 활용방식에서 '여드름 브레이크'가 한층 진일보한 것은 공간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해 그것이 단순한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도록 한 점에 있다.


'여드름 브레이크'에 등장하는 공간과 건축물들이 사건의 배경 무대 이상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출연자들의 모습 이상으로 그곳의 풍광들을 잡아내려는 치밀한 카메라 동선에서도 확인된다. 실례로 연예인 아파트의 경우 건물의 외관을 먼저 소개한 후 건물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출연자들의 움직임을 정면과 측면에서 잡아낸다. 출연자들이 실내로 들어가면 카메라는 다시 입구와 내부에 설치된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담아낸다. 그 덕택에 시청자들은 공간을 보다 입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되고, 공간을 감싸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스펀지처럼 흡수한 화면 영상에서 거친 질감과 두터운 부피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무한도전은 각각의 고유한 형태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공간들의 특성을 영상으로 훌륭하게 포착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내러티브의 전개와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했다. 여기에서 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300만원이 든 돈가방을 찾기 위해 출연자들이 방문하게 되는 장소들의 배치이다. 최초의 장소인 남산 시민 아파트에서는 아직까지 학생들이나 인근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마주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방문장소인 연예인 아파트는 고 이주일 선생과 같은 걸출한 스타가 살았던 장소임에도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목격할 수 있었고, 사진으로 단서를 주었던 오쇠동 삼거리는 우물마저 매말라버린 황폐한 폐허로 돌변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정준하와 박명수가 300만원의 돈이 든 가방을 찾아냈던 인천 해양 생태공원의 건물은 더 이상 사람의 온기를 찾을 수 없는, 영혼마저 빠져 나간 초라하고 텅빈 육체만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즉 재개발이라는 폭력적 과정은 사람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터전인 '집'마저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는 메세지가 그것이다. 여기에서 행위의 주체인 재개발의 자리에 출연자들을 추동하는 근원적 욕망인 돈에 대한 탐욕을 위치시키게 되면 자본에 의한 생활 공동체의 파괴 현상이 공간 이미지를 통해 선명하게 부각된다.


그렇다면 마지막 장면에서 왜 길만이 황천길호에 탑승했어야만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길은 상징적 의미에서도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자본'을 상징하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길은 조직의 중간보스, 고 이주일 선생을 패러디한 이주길, 차이나타운의 장씨와 같은 자유로운 변신 능력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다른 출연자들이 갖고 있지 못한 정보를 알고 있으면서 그들 사이를 교란시키기도 한다. 또한 길은 제작진의 도움으로 다음 이동장소를 알고 있으면서 그들보다 나중에 나타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 먼저 나타나기도 한다.

 

 

 

신화 속 프로테우스의 모습



길의 이러한 능력은 흡사 바다의 예언자이자 어떤 형태로든 자유자재의 변신 능력을 지녔던 신화 속 프로테우스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신화 속 프로테우스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등장하는데, 돈은 집으로, 자동차로, 보석으로 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식시장 등에서 알 수 있듯 그의 예언을 운좋게 들을 수 있으면 부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길이 돈가방을 탈취한 순간은 신화적 존재(프로테우스)로서 그리고 오직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탐욕적 자본으로서 그의 상징적 정체가 탄로된 순간이다. 그리고 이 자본의 최신식 이름은 '신자유주의'이고, 그것의 한국식 변형물은 '녹색 파시즘'이라 불리며 재개발 열풍을 주도하는 MB노믹스다.


이처럼 공간의 이미지를 아리아드네의 실로 삼아 읽었을 경우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는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안에서 급변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재 모습을 코믹 범죄 스릴러의 옷을 빌어 이야기하고 있다. 앞서 평론가 정성일이 제시한 영화들 이외에 <슬럼독 밀리어네어>, <13구역>, <스틸 라이프>, <디스트릭트 9> 등과 같은 영화 목록들을 추가해 보면, '여드름 브레이크'는 돈을 놓고 벌이는 단순한 범죄 스릴러가 아니라 돈에 의해 추방당하고 죽음에 내몰린 사람들의 이야기로 고쳐 쓸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학자 사스키아 사센의 지적처럼 "경제적 세계화의 이론에서 지배적인 서사는 추방의 서사"이기 때문이다.2)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와 <디스트릭트9>의 한 장면



따라서 마지막 장면에서 길이 황천길호를 탑승했던 것은 서사적 차원에서 악당에 대한 징벌의 의미를 지니지만, 상징적 차원에서 자본의 무차별적 흐름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담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부자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경제 이데올로기가 아무런 비판없이 횡행하는 이 나라에서 실종된 경제적 정의는 그런 상상적 저주를 통해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근의 정치적 상황은 이런 저항의 몸부림마저 더 이상 허락하고 싶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3)

 


낯선 도시로의 산책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도시는 일종의 언어이자 담론이며 하나의 텍스트다. 도시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신호등과 방향지시 부호, 다양한 이미지와 언어로 된 광고판 등은 도시 생활자들에게 도시가 걸어오는 말들이다. 그래서 한 도시에 적응한다는 것은 도시의 언어에 익숙해진다는 것과 같다. 하지만 도시의 낯선 언어에 친숙해지는 순간 더 이상 도시가 내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는데, 왜냐하면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 도로 표지판을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없을 만큼 도시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의 탁월한 점은 도시의 기호학적 성질을 간파하고 매번 도시의 새로운 목소리를 들려준다는 점에 있다. 도시민들의 평범한 일상을 파고들어 뜻밖의 만남에서 소박하지만 진솔한 웃음을 주었던 '서울 구경 특집'이나, 끝없는 추격전을 펼치며 스펙타클한 장면을 연출했던 '돈가방을 갖고 튀어라'편, 그리고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 안에 숨겨져 있던 이국적 풍경들을 재치있게 포착했던 '하루 만에 세계여행'편 등이 그렇고 익숙한 공간이지만 늘 침묵하고 외면해야 했던 재개발 지역을 조명한 '여드름 브레이크' 편이 그렇다.

 

 



언급된 에피소드들은 모두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고, 심지어 여의도나 남산은 너무나 빈번하게 등장했던 장소들이지만, 각각의 에피소드들은 매번 새롭고도 낯선 서울의 표정들을 포착해낸다. 박명수와 노홍철이 데빌매치를 벌였던 곳과 유재석이 사진으로 스페인의 풍경을 담아냈던 곳은 동일하지만 어떤 시선으로 읽어내는가에 따라 도시는 상이한 얼굴을 보여준다. 강강술래를 도는 서울 시민들을 한국의 문화를 즐기는 파리지앵들이라고 묘사하는데서 발생하는 웃음은 대상이 본래 갖고 있는 이름을 빼앗겼을 때 그것이 얼마나 낯설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런 점에서 무한도전의 도시 읽기는 일상화된 독법을 거스르는 위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위반은 익숙해져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던 우리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슈클로프스키는 이러한 위반에 예술의 본질이 담겨 있다고 보았는데, 즉 예술이란 자동화된 지각에 반작용을 가해 잃어버린 삶의 감각을 되찾아주는데 그 존재 의의가 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예술 기법을 그는 '낯설게 하기'라고 불렀다.


무한도전은 이러한 낯설게 하기 기법을 확장시켜 서로 이질적 담론들을 충돌시켰을 때 보다 파괴적인 웃음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해낸 듯하다. 그래서 코미디란 장르 안으로 정치, 종교, 경제, 법률 등 다양한 영역들로부터 이질적인 언어들을 끌어들여 상호텍스트성의 우주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때 차용된 언어들은 원래 그것이 지시하던 지시대상을 상실한 일종의 이미지란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즉 "미국산 소 쓰러지듯"이란 자막에서 "미국산 소"가 지시하는 대상은 '다우너 소'가 아니라 바닥에 처참히 넘어진 '정준하'인 것처럼.


이렇게 보면 '여드름 브레이크'가 일반 시청자들에게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뉴스나 시사 프로그램에서 보던 재개발 지역의 황량한 풍경이 오락 프로그램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입장에 따라 그 의도를 불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영화나 다른 매체에서 흔히 등장하던 장소를 예능 프로그램이 촬영해서는 안된다는 관념이 과연 정당하기나 한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오히려 무한도전의 이러한 시도를 통해 예능에서 다룰 수 있는 소재의 폭이 더 확장된 것은 아닐까.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이 물질적으로 더 부유해지지는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생의 감각은 더욱 풍부해졌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새로운 형태의 참여형 텍스트


'여드름 브레이크'는 시청자들의 투표로 형사팀과 도망자팀으로 나뉘었고, 촬영 내내 주변 시민들의 제보를 받아 추적이 이루어졌고, 그것도 부족해 도망자팀을 발견시 제보를 바란다는 전단지가 배포되기도 했다. 촬영된 화면 중에는 출연자들 사이에 섞여 직접 이야기를 엿듣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들어 있고, 다양한 각도에서 포착된 재개발 지역의 풍경들은 시청자들이 공간 자체를 직접 경험해보도록 배려된 것이다. 게다가 '몸싸움'이나 '철거'와 같은 자막들을 삽입해 시청자들이 검색을 통해 공간에 담긴 비밀을 자발적으로 알아내도록 유인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한마디로 '여드름 브레이크'는 시청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제작된 맞춤형 텍스트라 할 수 있다.

 

 



마지막 결말 역시 상당히 모호한 형태로 끝나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약속시간에 맞춰 배에 올라탄 박명수, 길, 전진을 게임의 최종 우승자들로 본다면, 촬영 내내 제작진의 비호(!)를 받은 길이 과연 게임 참가자로서 자격 요건을 갖춘 것인지, 또 그들이 탄 배가 왜 하필 '죽음'을 의미하는 '황천길호'인지, 만일 배가 죽음을 뜻한다면 차라리 살아서 경찰들 손에 붙잡히는게 나은 건 아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의문이 이어진다.


더욱이 그 안에 삽입된 <프리즌 브레이크>, <CSI>, <살인의 추억> 등과 같은 텍스트들의 패러디나 '상금 300만원'('돈가방 특집'), '힝 속았지'와 같은 유행어('돌+I 콘테스트'), 자장과 짬뽕 사이의 선택('Yes or No 특집')과 같은 자기인용들까지 알아맞추려면 '여드름 브레이크'는 가족들과 식사를 하며 띄엄띄엄 본다든지 다른 일을 하며 웃기는 대목에서만 집중해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이 그 안에 제시된 단서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반복해서 읽어야 할 그런 텍스트이다.

 

 

 


따라서 '여드름 브레이크'는, 아니 무한도전은 한가할 때 시간 때우기용으로 시청하던 예능 프로그램이란 개념을 뒤바꾸어놓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 태도를 띤 새로운 시청자 유형을 창조해냈다고 할 수 있다. 즉 무한도전을 충분히 즐기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을 투자해서 주의깊게 시청해야만 하고, 그 안에 담긴 의미나 인용된 텍스트들을 알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하던지 아니면 다른 누리꾼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정보 교류나 토론을 통해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팬들 사이의 유대는 더욱 강화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다시 자신들이 공유하는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에 대한 무한한 애정으로 전환된다. 바로 이러한 메카니즘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드물게 무한도전이 충성도 높은 매니아층을 형성할 수 있었던 비밀이다.


이렇게 볼 때 '여드름 브레이크'는 재개발이라는 생소한 소재를 다뤄 예능의 지평을 확대하고, 영화에 버금가는 뛰어난 공간 디자인을 선보여 예능의 질을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시청자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새로운 예능 텍스트를 생산해냈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청계천은 우리 자신의 미학적 감각과 정치적 무의식을 시험해볼 수 있는 바로미터다.


시청자들의 실제 삶과 연관해서 '여드름 브레이크'가 가질 수 있는 중요한 성과는 생활공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일깨워주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오래되고 낡은 집보다는 그것을 헐고 고층의 새 집을 짓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며, 그것이 진보이자 발전이요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재입주율이 채 15%도 안되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재개발 사업을 찬성하는 까닭은 단순히 경제적 개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한 무의식적 고정 관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개발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챙기는 사람들의 것이 아닐까. 즉 한 시대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러한 미의식은 가진 자들의 것이지 철거를 당해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것은 아닐 것이다. 무한도전은 이러한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지며 재개발을 주도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삶을 뿌리뽑히고 내몰린 자들의 입장에서 공간을 바라보면서 오래되고 낡아버린 건물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것은 도시 재개발 사업을 지금처럼 일방적인 군사작전식 철거정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리사이클링 모델에 따라 공간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4)

 

 

 


미적 가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연예인 아파트가 재개발의 폭력으로부터 비켜갈 수 있었듯이 새로운 미적 감각으로 무장하게 된다면 사탄의 태양 아래서 소리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처한 많은 것들을 우리는 구원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by ddolappa

 


[참고자료]


1)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25>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추적극
http://tvzonebbs6.media.daum.net/griffin/do/talk/gallery/challenge/read?bbsId=S000054&articleId=27669&pageIndex=5&searchKey=daumname&searchValue=ddolappa


2) 드라마 <추노>의 작가 천성일은 무한도전의 광팬임을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 <추노>가 방영되기 이전 제작된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는 이미 <추노>의 핵심적 메시지를 선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재석 역모사건?' 작가가 밝히는 '추노' 7대 미스터리
http://media.daum.net/entertain/others/view.html?cateid=100030&newsid=20100324131807049&p=starnews&RIGHT_ENTER=R2

 

3) MBC 사장 후보, PD수첩 폐지 거론  
[인터뷰] 구영회 후보 "인적쇄신이 포인트"…박명규 후보 "공정성 회복 주력"
http://media.daum.net/society/media/view.html?cateid=1016&newsid=20100225143020317&p=mediatoday


<박명규 전 MBC 아카데미 사장은 25일 전화인터뷰에서 '사장 선임시 가장 주력할 일'을 묻자 "<PD수첩> <100분토론> <무한도전> 등이 편파적인 방송"이라며 "(MBC가)공정성을 잃었기 때문에 공정성을 회복할 것"이라고 밝혔다.>


 ‘무한도전’ 징계에 ‘네티즌이 뿔났다!’…“없애려는 의도?”
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05&newsid=20100402092714267&p=tvreport


‘무한도전’ 폐지설에 게시판 시끌시끌 “방송장악이다” 시청자 반발
http://media.daum.net/entertain/view.html?cateid=1005&newsid=20100403205921186&p=newsen


4) "오세훈 시장의 '창의도시'? '막장 개발'만 난무"
[토론회] "난개발 막고 공동체 살찌워야 문화 발전"
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223164637§ion=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