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135> 살아남은 자의 공포(1)
무한도전 212회 100821 : 세븐 특집 2부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무한도전이 개척한 새로운 오락적 재미 중 하나는 오락 프로그램의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 있다. 무한도전이 방영된 날이면 각종 게시판과 블로그에는 그 날의 방송내용에 대한 각양각색의 해석들이 쏟아져나오고, 또 해석의 타당성에 대한 열띤 논쟁과 토론이 벌어지곤 한다. 오락물에 대해 다각도의 분석이 이루어지고 다양하게 수용되는 현상은 단순히 '재미있다/재미없다' 수준의 품평에 그쳤던 전래의 수용 양상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상이다. 이는 인터넷 문화가 활성화되면서 일반 시청자와 TV 평론가의 경계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주된 이유는 무한도전이란 텍스트가 갖고 있는 독특한 특성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언론학자 원용진 교수의 평가에 따르면 무한도전은 "작가적 성격"이 강하게 묻어나는 프로그램으로, 뛰어난 "상호 텍스트성"과 "내러티브 구사력"을 갖추고 있다.1) 즉 무한도전은 제작자의 독자적인 개성과 주관성이 강하게 반영된 텍스트로, 제반 문화 현상을 프로그램 안에 끌어들여 긴밀한 서사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참조틀을 준거 삼아 무한도전을 읽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생산이 가능해지게 된다. 따라서 무한도전을 시청한 후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토론하는 과정은 그 자체가 오락적 즐거움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무한도전에 대한 최근의 해석 경향들은 우려스러운 감이 없지 않다. 가령, '세븐 특집'만 하더라도 황순원의 <소나기>, 수학 문제, 이태원 등이 등장했다고 해서 국어, 수학, 영어 등 교육제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는 해석을 내리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황당하게 느꼈던 해석은 '노란색'과 '고졸 출신 변호사'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갱스 오브 뉴욕 특집'을 고 노무현 대통령에게 전적으로 바쳐진 특집으로 해석한 경우와 무한도전을 좌파 방송으로 낙인 찍은 뉴라이트 단체의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들 대부분은 부분적 의미를 전체적 의미로 오인하거나 해석자 개인의 주관을 해석 대상에 투사해서 텍스트의 의미라고 주장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텍스트가 개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할지라도, 또 해석자의 의도가 존중되어야 한다 할지라도, 텍스트의 의미는 해석자가 임의로 아무렇게 생산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명한 소설가이자 문학이론가인 움베르토 에코는 "해석의 한계는 텍스트의 권리와 일치한다"고 말한다. 즉 해석된 텍스트는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이들에게 제약을 가하며, 독자의 주도권은 '작품의 의도'를 세우는데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원칙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해석 작업은 무한할 수 있지만, 무모한 추측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어떤 해석이든 텍스트의 논리성에 근거를 두어야 하며, 또 아무리 그럴 듯한 해석이라도 다른 시점에서 이루어진 해석을 통해 확인되어야만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3)
따라서 문제가 되고 있는 해석 방식들은 정치적 해석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포괄적인 해석이지 못할 뿐더러 해석의 타당성을 결여하고 있는 해석이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텍스트의 '의도'이지 해석자의 주관적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친일파'의 반대말을 '친북인사'로 이해하는 수준의 정치 인식을 갖고 있는 무리나 '이명박 정권'의 반대말을 '노무현 정권'정도로 이해하는 정치 인식을 갖고 있는 무리가 무한도전에 대해 내리고 있는 해석 평가는 어떤 점에서 상통하고 있는데, 그들은 예술의 정치성이 작품이 담고 있는 정치적 내용에 따라 좌우될 수 있으며, 작품에 대한 미학적 평가마저 작가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움베르토 에코
칼 마르크스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에 대한 마르크스의 평가는 현재의 논의에 유익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정치적으로 보수파인 왕당파였던 발자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작품에서는 진보계급인 신흥 부르즈와 계급을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무관하게 예술작품의 논리에 충실하게 현실을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에코의 용어로 다시 풀어보면, 작가의 의도가 아닌 작품의 의도가 우선할 때 작품의 미학적 자질은 물론 올바른 정치적 인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동시대 작가들이 진보 성향의 정치적 내용을 의도적으로 작품에 반영하려는 예술적 경향을 "경향주의 예술"이라 비판하고, 오히려 정치적 보수주의 작가인 발자크의 소설을 "위대한 리얼리즘의 승리"라 칭하며 높이 평가했다. 이는 마르크스가 예술작품의 정치성을 그것이 담고 있는 정치적 내용이 아니라 예술창작의 태도와 생산원리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마르크스의 명제는 아도르노나 벤야민 같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계승되어 "문학작품은 문학적으로 올바른 경우에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명제로 변형되어 제시되기도 했다.
따라서 무한도전의 정치성은 오락 프로그램 본연의 임무에 충실할 때만, 즉 기존의 예능 제작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재미를 찾아내고자 하는 실험 속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것이지 단순히 그것이 전달하는 특정한 정치적 메세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논의를 확장시킬 경우 정치적 소재를 다루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어떠한 정치적 태도를 강요하고 있는 지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해석 가능성은 앞서 언급한 원용진 교수의 글에서 다시 찾아볼 수 있다.
<'호동이’의 천하장사, 황소, 씨름, 사투리, 사나이 우정 등이 한데 섞이면서 묘한 마술이 펼쳐진다. 효도, 인정 (人情), 긍지로 변화한다. 그래서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1박2일>은 보수적인 색채를 띤다. <패밀리가 떴다>가 외갓집 놀러간 도시 아이들의 놀음이었다면 <1박2일>은 시골정서도 품어가는 건강한 청년들의 태극기 앞세운 ‘국토순례’ 쯤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1박2일>의 정치적 보수성을 지적하고 있는 원용진 교수의 글은 <1박2일>의 담당연출자가 KBS 노조에 가입할 정도로 진보적 인사이기 때문에 그가 제작하는 프로그램 또한 진보적이라고 주장하는 일부의 평가를 무색하게 만든다. 그의 주장은 오히려 마르크스의 혜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1박2일>이 설령 정치적 보수주의 색채를 띤다 하더라도 오락 프로그램으로서의 가치가 더 높아지거나 더 낮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최근 들어 무한도전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진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현시대가 정치의 죽음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망과 이해관계를 대화와 타협으로 풀어나가는 과정 자체를 정치라 할 때 소통불가능성만 확인하게 되는 현재 상명하달식의 일방통행만 존재할 뿐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결정함에 있어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를 민주주의 사회라 할 때 민주적 의사결정의 근간이 되는 개인의 "표현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된 현재 "검열"과 "조인트"만 존재할 뿐 정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모든 것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려는 반발적 움직임이 형성되었는데, 무한도전에 대한 정치적 해석이 증가한 이유도 이러한 정치적 흐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무한도전이 정치적으로 해석되는 또다른 이유는 프로그램의 제작 방식 자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문화적 이슈나 유행을 신속하게 프로그램 제작에 반영하는 무한도전의 특성상 그것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 할지라도 당대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된 것이라면 자막으로 인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대표적인 것이 광우병 파동 당시 '미친소' 자막이 등장했던 경우다. '미친소'는 전국민의 관심이 반영된 유행어의 "인용"으로 읽어야지 특정한 정치적 의도를 지닌 것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나 문제는 무한도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이 유행의 "인용"을 새로운 표현 방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닌 "정치적 선동"으로밖에 이해할 수 없는 형편없는 교양 수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워낭 소리>를 관람한 직후 감상평으로 영화가 촬영된 지역을 관광화하라는 지령을 내리는 지도자와 그 무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무한도전 '패닉룸 특집'의 한 장면
용산참사 당시의 광경
정치의 부재로 인해 범정치적 해석 경향이 안티테제로 제시되었다면, 이러한 경향에 대한 안티테제로 예능은 예능일 뿐 어떠한 정치적 해석도 반대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한다. 일종의 "예능을 위한 예능론"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견해는 현실의 고단함을 잊기 위해 예능을 시청하는데 또다시 복잡한 현실을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욕망의 발로로 읽힌다.
그러나 모든 예능 프로그램들은 특정한 형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가치를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시청자들에게 주입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예능을 위한 예능론"은 그러한 이데올로기들을 무비판적으로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정치권이 방송 제작 과정이나 방송 여부를 일일이 감시하는 현재의 제작 환경을 무시한 채 예능을 예능으로만 수용하겠다는 태도는 지극히 순진하거나 지극히 현실 순응적인 정치적 태도라 할 수 있다.
다소 먼 길을 돌아오긴 했지만 무한도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 방식들은 현 시대를 살아가는 각자의 삶의 태도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말해, 무한도전을 정치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건 혹은 부정적으로 해석하건, 그러한 정치적 해석 자체를 거부하건 간에, 그러한 입장들은 모두 현재의 정치적 상황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무한도전에 대한 해석은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글 모두에 제기한 문제인 "무한도전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현실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치환될 수 있다. 즉 해석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다!!
[참고자료]
1. 리얼버라이어티 쇼 따라가는 시사보도프로그램
http://airzine.egloos.com/2389943
2. 노명우, <텔레비전, 또 하나의 가족>, 프로네시스 2008.
3.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역, <해석의 한계>, 열린책들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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