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마르코 복음서 읽기 1장

ddolappa 2016. 4. 30. 14:26

제 1 장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1,1)

 

 

마르코 복음 낯설게 읽기

 

 

    1세기경의 독자가 우연히 마르코 복음서의 첫 문장을 읽거나 혹은 듣게 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만약 그 사람이 로마 시민이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예수라면 40년 전에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갈릴래아 사람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그러한 자가 로마 황제를 칭하는데 사용할 법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자 ‘그리스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유대인들이 또 자칭 메시아라고 거짓 흉계를 꾸며 어리석은 민중들을 들쑤셔 로마에 반역을 꾀할 속셈인가 보군 그래. 이거 꼼꼼히 조사해봐야겠는걸.”

 

    그렇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신, 신의 아들, 신이 보낸 신, ‘주(主)’, 구속자 등의 명칭을 듣게 되면 자연스레 예수를 떠올리듯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열었던 최초의 로마 황제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Caesar Augustus) 이래로 로마 제국은 제국과 속주들을 결속시킬 이데올로기로 황제를 신성시하는 ‘황제 숭배’ 사상을 지중해에 전역에 전파했습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작성된 시기로 추정되는 주후 70년경 황제로 등극한 베스파시안(Vespasian) 역시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언과 기적을 적극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 장군 출신의 역사가 요세푸스를 포섭해 유대 민족의 메시아 염원을 로마 황제인 자신에게 투사하도록 했습니다. 심지어 복음서가 작성되던 시기는 유대와 로마가 예루살렘 성전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로마에 대한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당한 갈릴래아의 한 촌부를 그리스도나 하느님의 아들로 부르고 있으니 여간 불경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죠.

 

    예수를 ‘그리스도’라 칭하는 명칭 또한 당시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선 ‘그리스도’(Christus)라는 그리스어는 히브리어 ‘메시아’(Messiah)를 번역한 말로, ‘기름 부은 자’를 의미합니다. 유대 전통에서 ‘기름 부은 자’는 왕, 제사장, 예언자 등이 자신의 직위에 오를 때 머리에 기름을 붓던 의식에서 유래한 말로, 하느님으로부터 소임을 받았음을 입증하는 표현입니다. 유대의 전통적 메시아상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유대 민족 중심적이고 전권을 위임받은 왕적 심판자로 임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특히 세상의 종말이 곧 임박하리라는 기대가 만연했던 시대를 살았던 당시 유대인들에게 메시아는 로마라는 악을 물리치고 세상에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시킬 다윗 왕과 같은 이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통념에 비추어 볼 때 예수는 기대했던 메시아와는 전혀 어울릴 수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지요. 변변한 저항 한번 하지 않고 순순히 십자가에 올라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물이 메시아라니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겠죠.

 

    메시아에 대한 이해 방식의 차이가 예수를 따르던 무리 내부에서 심각한 갈등을 일으켰다는 사실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묻자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하고 대답합니다(8, 29).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단락에서 예수가 스스로 수난을 당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자 베드로는 예수와 심한 언쟁을 벌이게 됩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불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마르 8, 32-33)(인용자 강조)

 

    위 인용문에서 ‘반박하다’와 ‘꾸짖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에피티마오’인데, 성서에서 이 동사는 흔히 귀신을 쫓을 때 흔히 사용되는 동사입니다. 예수의 지상 사역 중 하나가 귀신과 같은 악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인데, 그런 목적을 가진 스승과 제자가 서로를 악마라 부르며 언쟁하는 장면은 사뭇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 중 최근이라 할 수 있는 12명의 제자들조차 스승이 자신들의 기대와 어긋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은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가 ‘하느님의 아들’이나 ‘그리스도’와 같은 개념들을 차용하면서 당대에 통용되던 의미와 전혀 다른 의미를 이 개념들에 부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인 로마의 황제가 폭력을 통해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다면,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비폭력을 통해 세상을 평화롭게 바꾸려고 합니다. 당대의 수많은 ‘메시아’들이 폭력적인 방법으로 하느님의 정의를 지상에 실현하고자 했다면, ‘메시아’ 예수는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정의에 도달하는 방법을 몸소 실천합니다. 저자는 지배적 담론의 언어를 차용해 그것의 의미를 전도시키는 방식의 전복적인 전략을 취하는데, 이것은 소수자의 공동체가 지배담론에 저항하는 효과적인 전술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 사용 방식은 모두 그들의 스승인 예수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마르 3, 27)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자들로부터 재물, 즉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획득하기 위해선, 우선 그들을 포박하고 멈춰 서게 할 필요가 있는데 그런 기술 중 하나가 바로 전복적 언어 사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하고 관습화된 세계를 당혹스럽게 할 정도의 충격을 가해야만 비로소 무엇이 문제인지 살펴볼 여지라는 게 생길 테니까 말이죠. 그리고 이렇게 얻어진 작은 틈새가 바로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은 아닐까요.

 

 

예수가 전한 기쁜 소식

 

 

    복음서는 유대의 묵시문학 전통, 그리스 비극, 영웅들의 삶을 노래한 아리탈로지(Aretalogy) 등 다양한 문학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복음서를 하나의 독자적 장르로 만든 것은 온전히 마르코의 업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즉 첫 문장에 사용된 ‘복음’이란 단어가 하나의 장르가 된 셈이죠.

 

    그런데 복음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유앙겔리온’은 원래 새로운 통치자의 선포, 전쟁에서의 승리 등 왕과 관련된 ‘기쁜 소식’을 전할 때 사용되는 단어였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마르코 복음은 예수를 새로운 통치자로 선포하고 그가 세상과의 전쟁에서 이겼음을 선포하는 기쁜 소식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면 왜 마르코는 예수의 전기라 할 수 있는 복음서를 작성했던 것일까요? 사실 누구나 손쉽게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할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당대는 책을 쓴다는 것은 막대한 비용이 드는 일이었고 그래서 저술활동을 개인경비로 충당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습니다. 마르코 역시 자신이 속한 공동체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아 복음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설령 글로 작성된다 하더라도 문맹률이 90%가 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글들은 대중들 앞에서 낭독되거나 공연 형태로 상연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대에는 세상의 종말이 곧 임박했다는 기대에 사로잡힌 시대였기 때문에 책의 형태로 후대에게 무엇인가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베드로와 야고보 등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직접 그의 가르침을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에 굳이 예수의 생애나 가르침을 책의 형태로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후 60년경 야고보를 시작으로 베드로 등 예수의 직계 제자들이 차례로 순교를 당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되고, 유대와 로마 간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 주후 70년경에는 위기감이 최고조에 도달하게 됩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로마와의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같은 동료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그들은 이곳저곳에 흩어진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한 데 결집시켜 다시 한 번 그 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했던 것은 아닐까요.

 

    복음서가 작성된 또 다른 원인을 추정해 볼 수 있는 단서는 첫 문장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란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복음’(주격)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목적격)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께서 가르치신 내용과 후대가 그것을 해석하고 수용한 방식 간의 차이를 전제로 그 간극을 메우려는 시도라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 속에서 예수의 직계 제자들은 그 분의 가르침을 듣지만 깨닫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는 반면, 그의 주변부 제자들이라 할 수 있는 여인들이나 길 위의 눈먼 이는 그 분의 가르침을 즉시 실천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는 12제자로 대표되는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마르코 공동체의 신앙적 입장이 인물들 속에 투사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마르코 공동체의 입장에서 방랑하는 카리스마적 권위를 강조하는 예루살렘 교회의 가르침은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것이었고,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재해석을 통한 능동적이고 현실적 수용이 자신들에게 보다 더 적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따라 카리스마적 권위는 섬김이라는 기능적 권위에 의해 대체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5)

 

 

다시 예수에게로

 

 

    자, 이런 방식으로 마르코 복음을 읽어 보니, 몇 가지 사실이 눈에 뜨입니다. 우선, 복음서는 주류에서 벗어난 소수 비주류 사람들을 위한 문학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장 절실한 계층이었고, 그들이 삶 속에서 경험한 고통과 하느님의 위로가 기록된 것이 복음서였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서에 담긴 진면목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들처럼 낮은 자세에서 복음서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둘째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란 때로는 생명의 위태로움을 감수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물질적 풍요를 위해 신앙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그런 태도는 어쩌면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제자의 모습과 가장 거리가 먼 것이고 오히려 예수와 대척점에 놓인 로마 황제의 부하로 살고자 하는 거라 생각합니다.

 

    셋째로, 복음의 진리는 시대에 걸맞게 매번 새롭게 재해석되지 않으면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직계 제자들의 권위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그들의 가르침이 현실의 핵심을 찌르지 못한다면 거부될 수밖에 없고, 그럴 경우 다시 예수에게로 돌아가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마르코 복음서는 다시 예수께로 돌아가 그 분의 가르침과 삶을 되새겨 보자는 하나의 제안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복음서를 읽고 각자의 삶의 맥락 속에서 다시 써보는 일은 마르코가 그러했듯 또 하나의 복음서를 탄생시키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복음서는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이 쓴 4권의 복음서 말고도 예수의 가르침을 묵상하고 실천하려는 사람들 수만큼 무한히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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