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물에서 올라오신 예수님께서는 곧 하늘이 갈라지며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당신께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이어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 9-13)
나자렛 예수의 등장
세례자 요한의 예언은 그 뒤에 오실 이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한다. 하지만 마르코는 예수를 마치 익명의 무리들 중 하나인 것처럼 묘사함으로써 이러한 기대를 배반한다. 엘리야를 떠올리게 하는 예언자적 풍모를 갖춘 인물로 묘사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면 예수의 등장 장면은 오히려 초라해 보일 지경이다. 더욱이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에 대한 언급은 그의 비천함을 강조하고 있다. 히브리 성서에서 거의 언급조차 되고 있지 않은 나자렛 지역은 메시아가 출현할 만한 장소가 아니었다. 심지어 예수의 제자가 되는 나타나엘조차 처음에는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요한 1, 46) 하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곧이어 등장하는 묵시론적 상징들은 예수라는 인물을 정체가 모호한 익명의 개인에서 특별한 개별자로 변화시키고 있다.
예수의 세례 순간 일어난 계시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 히브리 성서에 근거한 다양한 레퍼런스들이 사용되고 있다. 우선 하늘이 갈라지는 현상은 이사야서에 근거한 표현인데, 해당 표현이 등장하는 전후 문맥을 살펴 보면 그것이 어떤 의도를 지닌 것인지 유추해볼 수 있다.
“저희는 오래전부터 당신께서 다스리시지 않은 자들처럼, 당신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자들처럼 되었습니다. 아, 당신께서 하늘을 찢고 내려오신다면! 당신 앞에서 산들이 뒤흔들리리이다. 마치 불이 섶나무를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하리이다. 이는 당신의 적들이 당신 이름을 알게 하시려는 것이니! 민족들이 당신 앞에서 무서워 떨리이다.”(이사 63, 19-64, 1)(인용자 강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민족들에 의한 핍박과 탄압을 자신들의 죄의 결과로 받아들였고, 회개를 통해 다시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받게 되기를 간구하고 있다. 즉 현재는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늘이 막힌 상태, 다시 말해 하느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진 상태라면, 닫힌 하늘이 다시 열림으로써 다시 하느님의 백성이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이러한 소망은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 이루어진 것으로 제시된다. “그때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마르 15, 38)(인용자 강조) 오직 대제사장만 일 년에 한번 그 안에 들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던 장소인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곧 일반 백성들도 예수의 중재로 하느님께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메시아적 성령이 예수께 강림하는 장면에서 유의할 점은 영이 비둘기의 모습을 하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강림 사건 자체가 비둘기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에서 비둘기는 새로운 희망의 상징으로 나타난다(창세 8, 9). 마찬가지로 성령이 함께 하는 예수 역시 어떤 희망을 담지한 인물로 제시된다. 그렇다면 그 희망은 어떤 성격을 띤 것인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 1)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로마의 식민지 상황 속에서 해방과 석방은 단순히 심리적 위로나 치유가 아닌, 현실적 억압과 압제로부터의 실질적 자유의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로마와 유대의 집권층으로부터 극심한 경제적 수탈을 당해야 했음에도 예루살렘 지역의 주민들로부터 오히려 차디찬 멸시를 받아야 했던 갈릴래아 주민들에게 구원이란 구체적 역사적 현실 속에서의 집단적 구원이었을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첫 등장이 익명의 무리 중 하나로 묘사된 것 역시 갈릴래아 주민들의 염원과 열망을 한 몸에 체화한 인물로 그를 제시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에서 치유와 귀신축출로 구체화되는 예수의 구원 사업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맥락 속에서 읽어야 그 함의를 올바로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사야와 마르코 복음
마르코 복음에서 하느님의 아들 칭호는 표제에서 처음 등장한 이후(마르 1, 1), 세례시 예수의 개인적 비전 속에서(마르 1, 11), 변화산에 올랐을 때 구름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로(마르 9, 7), 그리고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모습을 지켜보던 로마 백인대장의 고백(마르 15, 39) 속에서 각각 등장한다.
마르코가 하느님의 아들 칭호로 의도한 바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준거 대상으로 삼고 있는 텍스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편과 이사야서에 근거하여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아들 명칭에는 놀랍게도 전혀 상반되는 두 개의 의미층이 포개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는 메시아적 왕이면서 동시에 수난당하는 주님의 종이다.
“주님의 결정을 나는 선포하리라.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나에게 청하여라. 내가 민족들을 너의 재산으로, 땅 끝까지 너의 소유로 주리라.’”(시편 2, 7-8)
“여기에 나의 종이 있다. 그는 내가 붙들어 주는 이, 내가 선택한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나의 영을 주었으니 그는 민족들에게 공정을 펴리라.”(이사 42, 1)(인용자 강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한 주님의 종은 “우러러볼 만한 풍채도 위엄도” 없고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는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고 “우리의 고통을 짊어”졌다. 또한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악행 때문”이고 “그가 으스러진 것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며,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그가 징벌을 받”은 것으로 묘사된다(이사 53, 2-5).
마르코는 왜 이처럼 서로 모순되는 의미를 하느님의 아들 칭호에 담고자 했던 것일까? 이방 민족들을 호령할 메시아적 왕이 어떻게 동시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수난당하는 종일 수 있는 것일까?
어떤 학자는 마르코 복음을 “긴 서문을 단 예수의 수난사”로 규정한다. 즉 예수의 죽음은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그를 믿는 제자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달게 받으며 예수를 따라야 한다는 메시지가 복음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 34) 마르코는 헬레니즘의 문화적 배경 속에서 더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하느님의 아들 칭호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 메시지는 은폐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 효과는 다층적이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는 또 다른 하느님의 아들인 로마 황제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지만, 동시에 동시대 유대인들의 제왕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 역시 전복시킨다. 또한 예수의 고통과 수난 역시 복음이라고 말하면서 영광의 신학만을 쫓는 동료 신앙인들로부터 거리를 취하는 한편, 현재 고난을 겪고 있는 신앙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기능을 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마르코가 복음서를 작성하면서 핵심 주제와 내러티브 구성 등 많은 부분들을 이사야서에서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2절 인용문에서 여러 다른 문헌들이 인용되고 있음에도 이사야서를 대표로 내세운 것은 마르코 복음에서 그 문헌이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또한 예수의 세례시 계시의 내용 대부분이 이사야서 내용으로 채워진 것 역시 그 예언서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코 복음을 심도있게 이해하기 위해 이사야서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회개의 세례의 급진화
예수의 세례 의식에 내재한 또 다른 의미층에 접근하기 위해 다른 일반인들의 세례와 예수의 그것 간의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르 1, 5)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 9)(인용자 강조)
한국어로 모두 ‘에서’로 번역된 그리스어 전치사는 각각 ‘안에서’(‘엔en', in)와 ’안으로‘(’에이스eis', into)의 뜻을 갖고 있다. 즉 대다수의 일반인들은 요르단 강 ‘안에서’ 몸을 반쯤 잠긴 채 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는 요르단 강 ‘안으로’ 온 몸을 담그고 세례를 받았음을 전치사의 차이는 암시한다. 온 몸을 강물 안에 담그는 행위는 일차적으로 죽음을 뜻한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르 10, 38) 이 문장에서 잔이 ‘고난’을 상징한다면)마르 14, 36), 세례는 ‘죽음’을 상징한다. 사도 바오로 역시 세례를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로마 6, 3)
세례자 요한이 선포하는 ‘회개의 세례’가 죄에 대한 회개의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 전체가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을 한다고 했을 때, 예수의 행위는 요한의 요청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한다. 즉 예수가 그 동안 속해 있었던 사회적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온전히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겠다는 의지가 그 안에 담겨 있다.
나아가 마르코는 예수의 이러한 결정이 지역 문화 전통에 근거한 것임을 암시한다. 9절에 있는 ‘갈릴래아’라는 단어는 흔히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삽입한 구절로 인정되는데, 이를 통해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인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부 유다 지역이 명확한 대조를 이루게 된다.
솔로몬 왕의 사후 북이스라엘의 열 부족이 다윗 왕정에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 시기부터 유다의 역사로부터 벗어나려는 갈릴래아의 저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예수가 탄생하기 불과 100 여년 전에 예루살렘의 지배 아래 들어오게 된 갈릴래아는 전통적인 이스라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유다 지역의 표준적인 관습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였다. 특히 지향하는 정치 모델에 있어서 이 두 지역은 극명히 대비되었다. 12부족의 연맹체로 구성된 고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하느님이 직접 통치하는 백성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군주 없는 해방된 공동체를 정치적 이상으로 삼았다. 반면 강력한 왕권이 확립된 이민족들 사이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유다 지역 사람들은 다윗왕조의 재건을 하느님의 주권 확립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오직 하느님의 주권만을 인정하겠다는 예수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로마 황제나 다윗 왕과 같은 왕권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하느님의 주권은 인간의 권력 독점과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투쟁의 기록
세례를 통해 소명을 받은 예수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로 이끌려진다. 그 곳에서 그는 40일 간 시험을 받게 된다. 40이란 숫자 상징은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체류한 기간을 의미하기도 하고(탈출 24, 18; 신명 9, 9), 엘리야가 광야를 건넌 여정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1열왕 19, 8). 또한 40이란 숫자는 40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나타낸다(신명 8, 2). 이러한 상징적 의미망은 과거의 기억을 미래의 종말론적 소망으로 전환시키는 기능을 한다. 즉 이러한 설정에는 예수가 제 2의 모세가 되어 새로운 이스라엘을 형성하리라는 기대가 내포되어 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예수는 ‘들짐승들’로 상징되는 비인간적 힘들과 투쟁을 해나가야만 한다(시편 91, 11-13; 다니 7, 2-8). 그래서 이 단락은 앞으로 마르코 복음에서 전개될 이야기를 축소된 형태로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마르 3, 23-27).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은 예수가 완벽한 신적 존재였다면 광야에서 굳이 시험받을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곧바로 사탄의 세력과 투쟁해가는 모습을 서술하는 것이 이야기의 경제상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죽음의 순간까지도 유혹과 시험을 당하는 예수의 모습을 통해 마르코는 무엇을 전하려 했던 것일까(마르 8, 11; 10, 2; 12, 15; 14, 38)..
만일 예수가 어떤 유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이기만 했다면, 그는 숭배의 대상으로 존재할 뿐 인간이 그의 가르침을 실천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세례자 요한의 세례를 받아들였던 것은 인간을 가능성의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 말해 인간을 죄를 지을 가능성도 있지만,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향할 가능성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로 파악했기 때문에 순순히 세례를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나아가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세상에 대한 이해로 이어져, 견고한 철옹성처럼 보이는 세계 질서도 하느님이 원하는 방향으로 변화될 수 있다고 믿었기에 투쟁의 도상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에서 드러나는 예수의 독특한 인식은 인간은 하느님에게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욱 인간다워지며 더욱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신성은 동시에 완벽한 인간성에 대한 표상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죄로의 유혹 가능성은 인간의 삶의 기본 조건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예수는 인간을 향해 무한한 자비와 인내를 내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가 냉철한 현실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를 세 차례나 부인했음에도 다시 돌아올 수 있었고, 예수는 하늘의 소명을 받는 순간부터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르코 복음은 세상의 유혹과 싸워나가야 했던 한 사내의 고독한 투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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