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3장-세례자 요한

ddolappa 2016. 5. 14. 12:14

 

제 3 장

 

 

그리하여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요한은 낙타 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으며,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였다.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 5-8)

 

 

왜 엘리야인가

 

 

      세례자 요한의 복장은 유대인들의 문화적 기억 속에서 특정한 인물을 떠올릴 수 있도록 상세히 묘사된다. 그는 엘리야로, 히브리 성서에서 “몸에는 털이 많고 허리에는 가죽띠를 두른 사람”(2열왕 1, 8)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설정함으로써 종말론적 분위기가 강조된다. 임박한 주의 날을 예비하러 엘리야가 오리라는 말라키의 예언이 세례자 요한을 통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종말론적 의식은 세례자 요한의 언술에서도 발견된다. 그가 언급하고 있는 성령 세례 역시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실현될 예언 중 하나이다.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요엘 3, 1) 이런 맥락에서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에 많은 사람들이 호응했다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시대를 파국이 임박한 시대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왜 이런 시대에 하필 엘리야 예언자가 요청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엘리야를 어떤 예언자로 인식했는가 하는 물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주 만군의 하느님을 위하여 열정을 다해 일해 왔다”고 고백할 만큼 열정적인 신앙인이었다(1열왕 19, 9). 또한 그는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이 자신의 백성인 나봇의 포도밭이 탐이나 그를 죽이고 포도밭을 차지하자 격렬히 비판할 만큼 권력자의 불의에 저항한 예언자였다: “‘주님이 말한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던 바로 그 자리에서 개들이 네 피도 핥을 것이다’”(1열왕 21, 19).

 

      흔히 성서 속 예언자를 앞으로 일어날 일을 꿈으로 환시하거나 미래의 일을 예언하는 사람으로 여기지만, 그것은 예언자의 부차적 사명이고 그의 가장 본질적인 소명은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것이다(신명 18, 18; 18, 20-22). 그로 인해 극심한 고난과 핍박을 당하게 되더라도 자신이 섬기는 하느님을 믿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죄를 꾸짖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사람만이 참다운 예언자로 불리웠으며, 엘리야는 바로 그러한 예언자의 표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당대의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서 예언자 엘리야의 풍모를 발견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한 역시 분봉왕 헤로데 안티파스의 불의를 비판했다가 죽음으로 이어지는 수난을 당했기 때문이다(마르 6, 1-29). 그리고 예수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은 요한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 의식에 예수 역시 공감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의 정체가 문제시 될 때마다 엘리야와 세례자 요한의 이름이 함께 거론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그들의 운명 공동체적 성격을 말해준다(마르 6, 16; 8, 28; 9, 4, 11-13; 15, 35ff.). 즉, 그들 모두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의를 추구하다가 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대 사람들이 공유한 종말론적 의식이란 폭력과 억압이 극에 달한 타락한 세상에 대한 비판의식의 발로로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 없이 부패해서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의 개입 없이는 어떤 개선의 여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세상이 종말을 고하더라도 공명정대한 하느님의 심판이 지상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다는 위기 의식이 종말론이라는 종교의 언어를 빌려 표현된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

 

 

      세례자 요한의 비판의 칼날은 정치와 종교 두 영역을 향해 있다. 복음서에서 헤로데 안티파스에 대한 요한의 비판은 나중에 등장하므로, 여기서는 그와 예루살렘 성전과의 관계만을 다루도록 하겠다.

유대인들에게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 할 수 있는 일이었고, 지상에서는 제사장 계급이 하느님을 대신해 그 전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본거지로 삼아 자신들의 독점적 지위를 이용해 대중들에게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한편, 경제적 수탈을 서슴치 않았다. 게다가 로마의 식민지 체제 속에서 대제사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위 성직자들이 친로마적인 성향의 인사들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성전으로서의 제 기능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성전 체제에 비판적이었던 에세네파에 속했던 것으로 보이는 세례자 요한은 죄의 용서를 위한 세례를 베푸는데, 그의 이런 행동은 지상에서 용서의 권한을 독점한 예루살렘의 성직자들에게 용납되기 어려운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과 문제의식을 공유했던 예수가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마르 2, 10)고 선언하는 지경에 이르자, 성전에 속한 인사들이 어떻게든 예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었을 게 분명하다.

 

      이렇게 내러티브 차원에서 살펴보면, 세례자 요한의 언술은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의 주제와 사건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세례자 요한이 자신과 예수와의 능력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신발 비유는 예수의 제자직을 서술하는데 다시 사용되고(마르 6, 9),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란 표현은 현세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인 ‘힘센 자’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려는 ‘더 힘센 자’인 예수의 사역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마르 3, 27). 그가 언급한 성령은 예수에 의해 제자들에게 내려진다(마르 1, 8; 13, 11). 요한이 ‘오실 이’로 기대했던 인물은 마침내 광야를 건너 그의 앞에 나타난다(마르 1, 7; 1, 9).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많은 부분에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들이 문제를 해결해가는 방식은 상이했다. 세례자 요한이 ‘메뚜기와 들꿀’을 주식으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반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인 예수는 사람들과의 식탁교재를 즐겨 하는 낙관적 태도를 견지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마르 2, 19)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세례자 요한이 속죄와 정화의 뜻이 담긴 세례를 베풀며 새로운 시대를 염원했지만, 예수에게는 ‘하느님 나라’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던 반면, 그는 새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차이로 인해 세례자 요한의 영향력은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마르 1, 4)에 국한된 반면, 예수의 영향력은 “유대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마르 3, 8)를 넘어 이방 땅 전역으로 확장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