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이사야 예언자의 글에,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하고 기록된 대로,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마르 1,2-4)
복음서는 어떤 권위에 근거하는가
마르코 복음이 기록될 당시 예수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서만 메시아로 받아들여졌다. 그에 따라 당연히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담은 복음서 역시 지금과 같은 공식 경전으로서의 지위를 갖지 못했다. 마르코는 당면한 두 가지 과제, 즉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고, 그의 생애와 가르침을 다룬 복음서 역시 정당한 권위에 근거한 것임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마르코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마르코는 칠십인역(Septuagint, LXX)의 공식(“기록된 대로”)을 활용한 히브리 성서(구약)의 인용에 ‘예언과 성취’의 도식을 적용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즉 히브리 성서가 예언한 내용은 역사 속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에 의해 이미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뜻이 지상에 개입한 사건인 예수의 삶은 기록될 만한 가치를 지닌 것이 된다.
그런데 마르코의 인용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탈출기와 말라키서에서 인용한 문장이 혼합되어 있다. 또한 원문의 지시 대상과 인용문의 지시대상이 서로 다르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탈출 23, 20)
“보라, 내가 나의 사자를 보내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닦으리라” (말라 3, 1)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마르 1, 2)
(인용자 강조)
우선 탈출기에서 부름의 상대(‘너희’)는 이스라엘 백성인데, 하느님(‘나’)께서 가나안 땅에 이르는 도상에서 천사를 보호자로 삼겠다고 약속하는 내용이다. 말라키서 3장 23절에는 크고 두려운 주의 날이 오기 전에 사자로서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따라서 말라키서에서 주님의 사자는 엘리야이고, 오실 이는 하느님 자신이 된다. 그런데 마르코는 하느님 대신 예수가 오며, 또 기대된 엘리야가 세례자 요한이라고 말한다.
다소 부정확해 보이는 인용 방식은 복음서의 신빙성과 권위를 손상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원문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변형된 인용문은 인용문으로서의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탈출기를 인용하고 있는 말라키서에서 알 수 있듯, 예언문은 그것이 성취되기 전까지 시대마다 새롭게 재해석될 여지를 지닌 것이다. 또한 인용의 엄밀성과 정밀성을 추구하는 학문적 자세는 책 매체가 지배적 담론으로 등극한 지극히 근대적 산물이며, 복음서는 구술 전통 안에서 기록되고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실제로 마르코는 “기록된 대로”라는 공식을 단순히 권위에 호소하기 위해 사용할 뿐 히브리 성서로부터 정확한 인용을 하지는 않는다. 가령, 마르코 복음 11장 17절은 이사야서와 예레미아서로부터 차용된 복합 인용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마르코 복음 4장 12절의 이사야서 인용, 7장 6-7절의 이사야서 인용, 그리고 14장 27절의 즈카르야서 인용도 실제 본문의 표현과 다르게 표기되어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의 히브리 성서 인용이 구전에 의한 암송에 근거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던 사람은 귀족이나 서기관 같은 소수의 지배계층에 국한되어 있었고, 대다수의 대중들은 구술 전통(oral traditon)에 속한 환경에서 살았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활자로 기록된 복음서를 읽지만, 고대 사회에서 대중들은 낭송가가 암송한 내용을 연행(演行)하는 장면을 보고 들음으로써 텍스트를 수용했다. 따라서 복음서의 기록자나 그 청중들도 문자로 기록된 히브리 성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또 그 권위를 인정했지만, 실제 복음서에 인용된 히브리 성서는 활자화된 된 문서에 근거하기 보다는 대중들이 암송을 통해 획득했던 지식에 의존한 것으로 보인다. 대중에 친숙한 구술 문화에 의존함으로써 복음서는 대중들의 삶 속으로 보다 효과적으로 침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복음의 수용 기관으로 시각과 청각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매체적 환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새로운 시작
탈출기 23장 20절과 말라키 3장 1절이 결합되어 인용된 것은 이집트로부터의 해방 사건이 종말의 때에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당시 대중의 믿음을 반영한다. 즉 이방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아의 도래는 곧 역사의 종말을 의미했다. 하지만 마르코는 이러한 대중적 통념을 전도시켜 메시아의 도래를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재해석한다. 창세기의 시작을 알리는 첫 단어인 “태초”(아르케)를 복음서의 “시작”(아르케)으로 사용함으로써 예수에 의해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이 열리게 된 사건은 천지창조의 그것과 맞먹는 사건임을 은연 중에 암시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역사화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던 행위는 학까이, 즈카르야, 말라키에서 종말을 고했다는 통념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등장으로 인해 부정된다.
메시아 예수의 도래가 역사의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사실은 마르코가 의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길’(호도스)이란 단어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왕이 도착하기 전 방문할 도시의 도로를 정비했던 고대의 풍습이 반영된 이 단어는 복음서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와 함께 반복되어 사용된 ‘건설’과 관련된 동사들(‘길을 닦다’, ‘길을 준비하다’, ‘길을 곧게 만들다’)은 가르침의 실천을 강조한다. 즉 예수가 옛 질서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몸소 실천했듯이 제자들 역시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러티브 차원에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는 모두 세례자 요한을 지칭한다. 하지만 광야에서의 외침 소리는 십자가에서의 울부짖음(마르 15, 34)으로 반향되고, 예수의 길을 예비했던 세례자 요한의 모습은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항상 앞서 걸었던 예수의 모습에 투영된다(마르 10, 32; 14, 28; 16, 7).
하지만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장소는 예루살렘이 아니라 광야이다. 말라키 예언자가 주님이 등장할 장소로 예루살렘을 염두에 두었다면(말라 3, 1b), 마르코는 그 장소를 광야로 대체한다. 이러한 대체는 어떤 의도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또 그것의 효과는 무엇인가?
고대 유대인들의 상징체계에서 광야는 모세의 출애굽 사건 이후 각별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되었다. 우선 광야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고독한 장소이자 도피의 장소이다. 또한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에서 헤맨 끝에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듯이 하느님을 만나고 신앙을 연단하는 장소이다. 또한 광야는 엘리야(1열왕 19, 1-8)로부터 시작되어 시리아의 셀류코스(Seleucos) 왕조에 대한 유대인들이 독립운동이었던 마케베오 항쟁 이후 반체제의 상징이 되었다(사도 21, 38). 특히 예수의 활동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예루살렘 성전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고 대중을 착취하는 어용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에 예루살렘 체제에 반대하던 일군의 사람들이 광야에 모여 공동체 생활을 꾸려나갔는데, 그들은 소위 에세네파(Essene)로 알려진 사람들로 세례자 요한 역시 이 무리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마르코가 예루살렘이 아닌 광야를 주님의 등장 장소로 설정한 것은 설령 그것이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라 할지라도 다분히 의도적이다. 그것은 세계의 중심으로 여겨진 예루살렘 성전과 주변 변두리에 불과한 광야의 관계를 역전시켜, 로마의 식민지 체제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예루살렘에 대해 비판하는 동시에 하느님의 뜻은 낮은 곳에 임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부활한 예수가 변두리 장소인 갈릴래아로 가셨다고 보고하는 장면(마르 16, 7) 역시 마르코가 전하고자 하는 신학적 메시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렇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은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에서 시작된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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