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장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시어,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지나가시다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보셨다. 그들은 어부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조금 더 가시다가,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는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보시고, 곧바로 그들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배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마르 1, 14-20)
공생애의 시작
예수는 현실 도피적 종교인이 아니었다. 그는 에세네파 사람들처럼 현실을 외면한 채 광야에 머무르며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참한 현실을 구제하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지라도.
마르코는 예수의 공생애가 세례자 요한이 “잡힌 뒤”에 시작되었다고 전한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두 인물이 동시대에 같이 활동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요한 3, 22-23). 4권의 복음서들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은 당시의 역사 기술방식의 특성, 참고한 자료의 상이성, 복음사가들 각자의 특수한 신학적 의도 등이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복음서들을 섣불리 종합해 예수의 생애를 정리하는 것보다는 각각의 텍스트가 지닌 내적 논리에 충실한 독해를 통해서 예수의 삶에 접근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삶에 대한 보다 풍부한 이해를 제공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구원사업이 요한이 “잡힌 뒤”에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잡히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라디도미’는 ‘넘겨주다’를 뜻하는 신학적 전문용어이다. 마르코는 이 단어를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하게 사용한다.
“사람의 아들(예수)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마르 9, 31)
“사람들이 너희(제자들)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는 너희가 매를 맞을 것이다.”(마르 13, 9)(인용자 강조)
다시 말해, 예수와 그의 제자들 역시 세례자 요한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파하다가 ‘넘겨져’ 핍박을 겪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더 나아가 복음서의 청자나 독자 역시 예수의 길을 따를 경우 그와 같은 운명을 각오해야 할 것임을 함축한다. 그러므로 마르코는 특정 단어의 의도적 사용을 통해 그들의 공동 운명과 연대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텍스트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의 죽음은 일차적으로 정치적 죽음이다.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의 폭정을 비판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했듯이 식민지 지배 체제를 정면으로 겨냥한 메시아 운동을 펼친 예수 역시 십자가형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흔히 예수와 함께 나란히 십자가에 매달린 사람들을 ‘강도’로 알고 있지만, 사실 그들은 로마에 대항해서 유대의 독립운동을 펼쳤던 혁명가들이다. 복음서에서 강도로 번역된 그리스어 ‘레스테스’는 혁명가 혹은 독립 운동가를 뜻하며, 단순한 도적을 의미할 경우는 그리스어 ‘클렙테스’를 사용한다. 그리고 로마의 십자가형은 가장 참혹한 형벌로 로마 시민은 무조건 제외되었고, 강도나 도적 같은 단순한 범죄자 역시 제외되었다. 오직 도망친 노예나 로마에 대한 반란자들만이 그 형벌을 받았다.
동시에 “잡힌 뒤”라는 표현에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간의 연대성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단절적 지점을 표시하고 있다. 즉, 요한이 구금된 후에 예수의 활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예수가 요한의 미완으로 남은 과업을 계승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예수의 미션은 요한까지 포함된 구체제의 질서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논리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선포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
예수는 세례자 요한을 구금시킨 분봉왕 안티파스가 지배하고 있던 갈릴래아로 가서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한다. 이 때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다’라는 표현은 이사야서에 근거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왕권으로 지상에 복음을 선포함을 의미한다.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 ‘너의 하느님은 임금님이시다.’하고 시온에게 말하는구나.”(이사 52, 7) 즉 예수가 복음을 선포하는 바로 이 순간은 묵시론적 주님의 날이 현재화되는 순간이다. 마르코는 ‘요한이 잡힌 뒤’라는 역사적 시간을 서술한 직후 예수의 묵시론적 선포 행위를 교차시켜 예수의 출연으로 인해 세계의 질서가 마치 잠정적으로 중단된 듯한 효과를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예수에 의해 선포된 하느님 나라는 세계의 최종적 종말을 초래하는 대신, 궁극적 심판의 날을 유예시킨다. 이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이미 현재에 도래한 나라이자 앞으로 올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미’와 ‘아직’ 사이의 시간적 긴장은 당시 대중들이 품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듯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정한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메시아가 지상에 왔지만 세상의 불의한 권력자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현실 도피적이거나 체제 순응적인 범주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가르친 기도의 첫 구절처럼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역사적 지평 안으로 오는 것이지 인간이 죽음을 거쳐 들어가게 될 피안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마태 6, 10). 또한 그것은 인간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체제와 전혀 상반되는 현실을 전제로 한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르 10, 42-43) 즉 하느님의 통치만을 인정하겠다는 태도는 필연적으로 정의롭지 못한 현실의 지배 권력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로마 황제의 제국과 대립하는 또 다른 현실 원리로 상정된다.
하느님의 나라가 현실을 지배하는 다른 원리로 제시될 수 있는 근거를 예수는 자신의 삶 속에서 실천을 통해 증명해보였다. 예수는 길가에 버려진 씨앗에서도, 아낙이 빵을 만들기 위해 밀가루에 넣은 누룩에서도 하느님의 나라를 보았다. 그가 베푸는 치유와 축귀의 기적, 비유의 말씀과 가르침, 죄인들과의 식탁 교재 등 그의 삶 전부가 이미 와 있고 또 앞으로 오게 될 하느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예수에게 하느님 나라는 실천을 통해 구체화되는 현실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다채로운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개념이 단순히 ‘천국’이나 ‘천당’을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되어버린 데는 적절치 못한 번역에도 원인이 있다. 나라로 번역된 그리스어 ‘바실레이아’는 공간적 의미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통치’와 ‘지배’의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따라서 ‘나라’(nation, kingdom)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다스림’이나 ‘통치’(reign)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하느님의 다스림이 사후사계에 한정된다는 오해는 피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가 말한 ‘때’라는 표현도 주의를 요한다. 고대 유대 사회에서 인간의 일상적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로 표시되고, 하느님의 의지가 개입한 순간은 ‘카이로스’(kairos)로 표시되었다. 가령 “무화과 철”(마르 11, 13)과 “포도 철”(마르 12, 2)에서 ‘철’은 모두 카이로스로, 하느님이 의지를 드러낸 순간을 지시한다. 따라서 ‘때가 찼다’라는 표현은 예수가 자신의 시대를 하느님이 인류의 구원사에 개입한 역사적 순간으로 인식했음을 말해준다. 즉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되었고, 따라서 낡은 옛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개시해야 한다는 열망이 예수의 역사의식을 추동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는 가르침은 예수의 이러한 시간의식을 잘 대변하고 있다.
갈릴래아로
갈릴래아는 예수가 사역을 펼쳤던 주요 활동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을 향해 여정을 떠났던 때를 제외하면 예수가 한시도 떠난 적이 없던 장소였다. 심지어 부활 후에도 예수는 갈릴래아를 향해 떠난 것으로 제시된다(마르 16, 7). 마르코는 의도적으로 갈릴래아라는 지명을 복음서 곳곳에 삽입하고 있는데, 그 정도가 심한 나머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여행 경로를 묘사하게 되어 신학자로부터 “팔레스타인 북쪽의 지리에 대한 마르코의 무지를 반영”했다는 비판을 받기에 이른다(마르 7, 31).
이처럼 마르코 복음은 갈릴래아 지향적 특성을 보이는데, 텍스트 내의 주요한 신학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는 갈릴래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공간으로서 그 지역이 지닌 특징들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팔레스타인 북쪽 지역에 위치한 갈릴래아는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남쪽의 유다 지역과 상이한 역사적 발전을 거쳐 왔다. 솔로몬 사후 다윗 왕정에 반란을 일으켰던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은 이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등 이민족 제국들의 식민 통치 하에 8세기 가량 유다 지역과 분리된 채 발전해 왔다. 갈릴래아 지역이 예루살렘의 통치 아래 다시 들어온 것은 하스몬 왕가가 펠레스타인 전역으로 지배권을 확대한 주전 104년 경이었다. 따라서 대중적인 이스라엘 전승들에 따라 촌락 공동체의 삶을 살아왔던 갈릴래아 사람들에게 유다 성전 국가의 지배 이데올로기라 할 만한 ‘유대인들의 율법’은 낯선 것으로 받아들여졌음에 틀림없다. 현실의 이러한 갈등관계는 예수가 적극적으로 구원사업을 펼쳤던 갈릴래아 지역 사람들과, 예수를 죽음에 몰아넣으려는 음모를 꾸미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 바리사이파 사람들, 제사장들을 통해 극적으로 상징화된다.
갈릴래아는 “민족들의 원(圓)”을 뜻했는데, 이것은 높은 계곡과 언덕 지역에 둘러싸인 지형적 특성이 반영된 명칭이다. 서부 저지대를 이루는 해안 평야와 벳 네토파(Beth Netopha) 같은 비옥한 협곡 덕택에 풍요로운 농작물을 수확할 수 있었고, 그래서 제국의 정권들은 높은 언덕 지역에 행정 도시들을 건설해 세금과 조공을 거두어들였다. 하지만 주변에 건설된 헬레니즘적 도시들은 정치적 관할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방임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갈릴래아의 촌락 생활에 거의 아무런 문화적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게다가 오랜 세월 이민족들에 의해 예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갈릴래아에서는 토착 귀족 세력이 발전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주민들은 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들이 소유한 토지에 예속된 소작농들이었다(마르 12, 1-12). 로마 제국의 통치 하에서 성전세를 비롯해 각종 조세와 세금으로 수탈당하던 주민들은 노예로 신분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도적떼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땅의 사람들’, 즉 ‘암 하 아레츠’(am ha aretz)의 중심지였던 갈릴래아는 무장 봉기를 통해 로마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 했던 젤롯당이 활동하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고, 그 결과 갈릴래아 사람은 반란자와 거의 동의어로 받아들여졌다. 그 흔적은 복음서에서도 발견된다. “그런데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던 이들에게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은 갈릴래아 사람이니 그들과 한패임에 틀림없소.’ 하고 말하였다.”(마르 14, 70) 예수의 제자들 중에도 젤롯당(열심당) 당원으로 시몬이 언급되고 있다(마르 3, 18). 또한 젤롯당에서 자객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품고 다니던 칼을 ‘시카리’라고 불렀는데,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의 별명인 ‘이스카리옷’은 바로 그 단어를 지칭한다.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는 베드로를 ‘바르요나’라고 부르는데, 그 말은 아람어로 ‘테러리스트’로 해석될 수 있다(마태 16, 17).
요약하자면, 대다수 갈릴래아 주민들은 이중삼중으로 소외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경제적으로 그들은 로마 제국와 예루살렘 성전 그리고 도시에 거주하는 지배계층 등으로부터 극심한 착취를 당했다. 문화적으로 그들은 티베리아나 세포리스 같은 헬레니즘적 도시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친헬레니즘 경향을 보였던 예루살렘 지도층과 달리 수세기 동안 지켜온 이스라엘 전승과 관습을 고수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성전 국가 내에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소외된 계층이었던 갈릴래아 주민들은 메시아 운동을 앞세운 민중 봉기를 통해서만 세상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한마디로 갈릴래아는 식민지 지배체제의 모순이 집약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극단적 지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마르코 복음서의 갈릴래아 지향성은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즉 마르코는 예수의 삶 속에서 갈릴래아를 자기 시대의 핵심적 문제를 전시할 수 있는 일종의 패러다임으로 전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고, 예수가 해결 가능성을 제시했지만 미처 완수하지 못한 그 과제를 떠맡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새로운 현실로의 초대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뒤 예수는 갈릴래아 호숫가로 가서 어부들을 제자로 삼는다. 마르코는 이런 식으로 극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후 다음 장면에서 기대를 배반하는 장면을 삽입하는 서술 전략을 구사한다. 예수의 세례식 장면에서 신비로운 계시 현상으로 감정을 고조시킨 뒤 곧바로 광야 장면을 연결시켜 긴장을 이완시킨 것도 한 예이다. 이러한 내러티브 방식은 당시 대중들이 갖고 있었던 묵시론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상대화하는 효과를 낳는다. 즉 청자 혹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어서 하느님이 세상에 개입하는 방식에 대한 전통적 관념을 전복시킨다. 더 나아가 마르코 복음은 고대하던 메시아가 지상에 왔지만 대중들이 기대했던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으며, 그것 역시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서사적으로 설득력 있게 증명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 따라서 마르코가 자신의 서사적 목적 달성을 위해 대중들의 기대지평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코는 예수와 제자들이 만나는 장면을 예언자 엘리야가 엘리사를 제자로 삼는 장면에서 차용했다. 길을 가다가 엘리사를 만난 엘리야는 자기 겉옷을 엘리사에게 걸쳐주고, 엘리야는 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그 길로 엘리야를 따라 나선다(1열왕 19, 19-21). 이것은 예수가 엘리야와 같은 예언자적 카리스마를 지닌 인물임을 부각시키기 위한 설정이다. 마르코는 여기에 ‘회개’와 ‘믿음’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를 삽입해 제자직의 모델로 재구조화한다(사도 11, 17-18, 20-21; 히브 6, 1). 또한 ‘곧바로’라는 부사를 두 번이나 사용해 유대와 로마가 전쟁 중이었던 긴박했던 저술 상황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예수를 메시아로 섬기는 믿음이 일종의 시대적 요청이라는 것이다.
앞서 예수가 요구한 ‘회개’와 ‘믿음’은 제자들에게 ‘버림’과 ‘따름’으로 나타난다. 즉 최초에 하느님과 인간이 맺었던 언약 관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회개라면, 그것은 기존의 죄 된 삶을 온전히 버리고 삶의 방향과 목적을 하느님께로 전환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심정적 혹은 지적 동의 그 이상의 것으로 전적인 신뢰와 헌신이 요구되는 것이라면, 그러한 믿음은 예수의 가르침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마르 8, 34-37).
마르코는 신앙의 기본 교리를 추상적 언어로 서술하는 대신에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가령, 베드로는 예수에게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라고 말을 하고 예수는 그의 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마르 10, 28).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가 요구하는 ‘버림’을 피상적인 차원에서 이해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이야기 중에 반복해서 드러난다. 자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는 예수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베드로가 언쟁하는 장면은 가장 극적인 예이다. 그 장면에서 예수는 베드로를 심지어 사탄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결국 베드로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지 못하고 세 번이나 부인하게 되고 만다(마르 14, 66-72).
따라서 예수의 부름을 받고 제자가 되는 이 장면은 참다운 신앙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모델이 아니라 제자들이 예수를 오인하는 아이러니한 장면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제자들은 예수를 자신들이 기다려온 메시아로 선뜻 받아들이지만, 스토리가 진행되며 제자들이 예수의 정체를 오인했음이 드러나게 된다. 마르코는 제자들의 무지 모티브를 이용해 기존의 대중적 담론을 교정할 뿐 아니라 신앙의 기본적 태도를 전파하는 기능을 하도록 한다.
마르코의 치밀한 설정은 이 장면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예수의 첫 제자인 베드로는 ‘시몬’이란 세속의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예수의 부활 이후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가 하사한 ‘베드로’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마르 1, 16; 16, 7). 이것은 예수의 공생애 기간 중 그를 오인하고 심지어 배신까지 했던 베드로가 예수의 부활 경험 이후 참 신앙인으로 거듭났음을 암시한다.
이 장면에 대한 흔한 오해 중 하나는 근대의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독해하려 할 때 발생한다. 즉 신앙은 개인 내면의 문제이며 전적으로 개인의 주관적 선택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1세기 지중해 문화권에 살았던 사람들은 개인이나 개인주의라는 것을 전혀 몰랐고 철저히 “집단에 깊이 관련된 집단 지향적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그물’이나 ‘배’와 같은 것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 수단을 포기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속해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던 공동체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즉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심정적 동의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공동체적 질서를 예수가 지상에 세우려는 새로운 공동체적 질서로 교체하는 작업에 동참하는 것이다. 예수는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부른 것이 아니라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는 일에 동참시키기 위해 부른 것이다. 그래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야 한다는 구절은 단순히 개인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예레미아서 16장 16절에서 이 표현은 심판을 받을 사람을 모으는데 사용된다면, 마르코는 그 의미를 전환시켜 새로운 공동체 건설을 위해 사람을 모으는 행위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다.
by ddolappa
'성서 읽기 > 마르코 복음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7장-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다 (0) | 2016.06.15 |
---|---|
제 6장-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다 (0) | 2016.06.11 |
제 4장-세례를 받다 (0) | 2016.05.19 |
제3장-세례자 요한 (0) | 2016.05.14 |
제2장-이사야의 예언 (0) | 2016.05.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