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 6장-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다

ddolappa 2016. 6. 11. 07:59

 

제 6장

 

 

그들은 카파르나움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쳐 나갔다.(마르 1, 21-28)

 

 

공생애의 첫 사역

 

 

      마르코 복음의 예수는 팔레스타인 북부의 국경 마을인 가파르나움에서 귀신을 쫓아내는 일로 자신의 공생애 활동을 시작한다. 반면에 마태오 복음은 산상 설교(마태 5, 1-7, 29)를, 루카 복음은 회당 설교(루카 4, 16-30)를, 요한 복음은 성전 청결 사건(요한 2, 13-22)을 예수 공생애의 첫 활동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각각의 복음서가 예수의 생애에서 강조점을 달리한 결과이다. 실제로 마르코 복음은 귀신축출 활동을 메시아 선교의 핵심적 활동 중 하나로 강조한다. 가령, 예수가 이방 땅에서 행한 첫 번째 사역 역시 귀신축출이며(마르 5, 1-20), 예루살렘을 향한 여행을 시작하는 첫 활동 역시 귀신축출이었다(마르 9, 14-29). 예수의 활동을 간략하게 정리한 마르코 요약에서도 귀신축출은 병자 치유와 말씀 전파와 더불어 반드시 언급되고 있다(마르 1, 32-39; 3, 7-12; 6, 53-56). 또한 예수가 제자들을 부른 이유 역시 그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갖게 하려는 것이었다(마르 3, 14-15; 6, 7; 6, 12).

 

      1세기경 지중해 문화권 내에서 귀신축출은 흔히 ‘마술’이라 불리던 활동의 하나였다. 당시 사람들은 악령이 사람에게 들어가서 그를 통제하여 초인간적 지식이나 능력의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고, 마술사는 그러한 영의 세계의 권세들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들로 알려졌다. 신약 성서에서도 귀신을 조종할 수 있는 사람들로 예수와 그의 제자들 외에 예수의 제자가 아니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던 익명의 사람(마르 9, 38-39), 사도 바오로(사도 16, 18; 19, 12), 스케우아스라는 유다인 대사제의 일곱 아들(사도 19, 13-16) 등이 등장한다.

 

      그런데 당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관습임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귀신축출 활동은 유대 지배 계층의 하나였던 율법 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히게 된다. 그들은 예수가 마귀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비난하기조차 한다(마르 3, 22).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또한 귀신축출과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낸 사건은 바로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도전으로서 귀신출출

 

 

      본문에서 ‘안식일’이란 단어가 복수형으로 되어 있고, ‘가르쳤다’는 단어가 미완료 시제로 표현된 것은 예수가 가파르나움 회당에서 이미 여러 차례 가르쳐 왔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리고 ‘가르치다’ 또는 ‘가르침’이란 단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스승 혹은 현자로서 예수를 강조한다. 하지만 가르침의 구체적인 내용은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고, 다만 사람들의 반응(놀람)만 전달된다. 앞 절의 내용에서 유추해보자면 아마도 예수의 가르침은 회개와 믿음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불러 일으켰던 것일까?

 

      본문의 형식은 예수의 가르침과 그것에 놀라는 사람들의 반응이 더러운 영을 쫓아낸 사건을 앞뒤로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 내부에서 예수는 더러운 영과 대립한다면, 구조 바깥에서 예수는 율법 학자들과 대립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귀식축출 행위가 바로 예수의 가르침의 내용이고, 그것은 율법 학자들과의 갈등을 초래했음을 시사한다.

 

      사실 마르코는 예수의 무리가 문제적 상황 속에 놓여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처음부터 구체적 배경 설정을 해놓고 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가장 거룩한 날이고, 유대의 지역 모임인 회당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사용된 가장 중요한 장소였다. 그런데 이처럼 거룩한 시간과 거룩한 장소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는 상황 자체가 문제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용된 ‘더러운’이란 형용사는 단순히 위생적 개념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율법 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해온 정결체계에 기반한 규범적 개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즈라의 종교 개혁 이후 유대 사회는 거세게 불어오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제의적 정결이라는 핵심 코드로 사회 조직 전체를 재조직화 했는데, 이러한 업무를 담당하던 계층이 바로 율법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율법 해석을 통해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을 나누고, 이에 기반하여 유대 사회를 지배할 종교적/문화적/신학적 이데올로기를 만들었다. 이들 중에는 사두가이파 사람들도 속해 있었지만 대부분 ‘땅의 제사장’이라 불리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성전 제사에 국한되어 있던 제의적 정결을 확장시켜 일상 생활 속에서도 율법 준수를 통한 제의적 정결을 지켜나가고자 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유대의 귀족 계층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대중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의 과도한 종교적 열정은 다수의 ‘제의적으로 부정한’ 사람들, 즉 죄인들을 만들어내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가령,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계명은 날품팔이 노동으로 하루를 연명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예수는 제의적 정결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사용해 제의적 정결 자체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유대 사회 전체나 유대교 전통과 유산 모두를 반대한다고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그는 정결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전체 유대 사회 안에 있는 특정 집단과 대립하고, 이러한 차별화 전략을 통해 그를 따르는 공동체의 신념과 관행을 정당화하고자 한다. 그래서 복음서 전반에 걸쳐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당시 여론을 주도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가령,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는 예수의 말은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해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 찍혔던 사람들이 예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또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 27)라는 예수의 선언은 율법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형식적 준수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나아가 예수는 일종의 문화적 코드로 작동하는 제의적 정결을 정신적이고 윤리적인 코드로 대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0-23).

 

 

예수의 놀라운 가르침

 

 

      이렇게 볼 경우 예수의 귀신축출은 율법 학자들로 대변되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투쟁을 상징한 사건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인격이 분열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복수형태(‘저희’)이자 동시에 단수형태(‘저’)로 말하고 있다. 이 둘 간의 모순은 일종의 언어유희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 예수를 “나자렛 사람”이라 부른 것은 그를 ‘촌놈’이나 ‘시골뜨기’ 정도로 비하하는 경멸의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지방명인 나자렛의 어원이 거룩함을 뜻한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란 칭호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칭 역시 예수에 대한 반항의 의도로 사용된 것인데, 당시의 문화적 맥락에서 악령 축출자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그에 대한 우위를 확보하고 통제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겉으로는 마지 못해 예수에게 존경을 표시하지만, 속으로는 그에 대한 경멸과 적의로 가득 찬 인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회개를 요청하는 예수의 부름에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하고 반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죄의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마르코는 그 원인이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에 있다고 진단한다. 즉 율법의 맹목적 준수만을 강요하는 율법 학자들의 가르침은 인격의 분열과 죄의식을 초래한다고 본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가난한 일반 대중이 정결을 지키기 위해서는 물질적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고, 물질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율법을 준수할 수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더러운 영’이란 율법 학자들이 유포한 지배 이데올로기이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란 그러한 이데올로기에 속박되어 있는 대중들이라 할 수 있다. 예수는 바로 그 지배 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지적함으로써 더러운 영의 마수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킨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가르침이 사람들에게 새롭고도 놀라운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따라서 ‘위로의 동네’를 뜻하는 카파르나움에서 행한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은 그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반대하는 세력이 누구이며, 그것이 초래할 구원이 어떤 성격을 가진 것인지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즉 예수의 구제 활동은 인간 개인의 정신적 혹은 육체적 병듦 상태로부터의 해방에 머물지 않고, 그러한 질환을 유발시킨 사회 구조적 원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하는 차원으로까지 나아간다. 만일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비인간화를 초래하는 사회구조의 철폐 없이 정신적 위안이나 피안적 세계로의 도피만을 약속하는 하느님 나라란 거짓 해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는 해방의 수단을 폭력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 즉 언어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투쟁은 비폭력적이고 담론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구제 활동은 무력 투쟁을 통한 해방을 주창했던 젤롯당과 명확히 구분된다.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가 당시에 유행하던 담론들과 구분되는 또다른 특성은 그것이 여성 해방의 성격조차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 단락에 이어지는 베드로의 병든 장모를 고친 이야기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