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 7장-시몬의 병든 장모를 고치다

ddolappa 2016. 6. 15. 22:28

 

제 7장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곧바로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으로 갔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어서, 사람들이 곧바로 예수님께 그 부인의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다가가시어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사람들이 병든 이들과 마귀 들린 이들을 모두 예수님께 데려왔다. 온 고을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갖가지 질병을 앓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많은 마귀를 쫗아내셨다. 그러면서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당신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아직 캄캄할 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외딴곳으로 나가시어 그곳에서 기도하였다. 시몬과 그 일행이 예수님을 찾아 나섰다가 그분을 만나자, “모두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이웃 고을들을 찾아가자. 그곳에도 내가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려고 떠나온 것이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마르 1, 29-39)

 

 

첫 여성 제자를 부르심

 

 

      회당에서 귀신을 축출하는 사역을 한 후 예수는 베드로의 집으로 물러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열병에 걸려 누워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는 기적을 일으킨다. 마르코는 귀신축출과 치유기적을 예수의 초기 사역을 특징짓는 두 가지 핵심 이적으로 요약한다.

 

      그런데 이 단락은 회당 에피소드와 달리 해석학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해왔다. 그럴 것이 간략한 서사구조와 빈약한 서사적 정보는 해석학적 노력이 개입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가 앓았던 병이 말라리아와 같은 풍토병이나 홧병이었을 거라고 추정하거나, 베드로의 집이 회당에서 분리된 예수 공동체의 가정교회로 사용되었을 거라 추측하는데 그친다. 하지만 해석의 빈곤을 낳는 원인 중 하나는 이 단락을 전체적인 서사적 맥락으로부터 분리시켜 관찰하는데 있다고 보여진다. 즉 이 에피소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묻기 전에, 이 이야기가 왜 여기에 놓였으며 그 기능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할 때 보다 풍성한 해석학적 결과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시중을 들었다”는 단어를 해석의 첫 출발점으로 삼도록 하겠다. ‘시중들다’ 혹은 ‘섬기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디아코네인’은 ‘따르다’(‘아콜로우테인’) 동사와 더불어 제자직을 기술할 때 사용된다. 즉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 그의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갈릴래아에서 예수를 따르던 여성 제자들은 남성 제자들이 그를 배신하고 도망갔을 때도 십자가 처형장까지 그를 따랐던 것으로 제시된다.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그분을 따르며 시중들던 여자들이었다. 그 밖에도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온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마르 15, 40-41)(인용자 강조)

 

      유대의 랍비들은 여성을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의 남성 중심적 문화에서 여성들이 예수와 동행하며 그를 섬겼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예수는 남성 제자들의 지배욕을 비판하며 자신이 지상에 온 목적이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라고 밝힌다. 이러한 가르침에 더 부합하는 자세를 보인 건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를 섬기고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그를 따랐던 여성 제자들임을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4-45)(인용자 강조)

 

      그런데 동일한 단어를 여성들에게 사용될 때는 ‘시중들다’로 번역하고, 예수의 경우는 ‘섬기다’로 번역한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여성의 섬김은 물질적 봉사에 그칠 뿐이고 예수의 본질적 가르침에 부합하지 못하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일까? 그런 편견의 소치가 아니라면 번역을 통일시켜 마르코 복음서의 본래적 의도를 살리는 게 좋을 듯싶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치유기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첫 여성 제자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복음서 전체의 유기적 구조를 염두에 둔 마르코의 의도에도 부합한다. 이미 앞서 언급했듯이 마르코는 첫 장면들이 마지막에 반복되도록 복음서를 작성했다. 가령, 처음에 등장한 ‘하느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마지막에 로마 백인대장에 의해 반복되며,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늘의 ‘갈라짐’은 마지막에 지성소 휘장의 ‘갈라짐’으로 반복된다. 따라서 이 장면은 회당 장면과 대조될 뿐만 아니라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부름 장면과도 연관된 것이다.

 

 

여성을 해방하러 오신 메시아

 

 

      베드로 장모의 이야기에서 주목할 또 다른 점은 그녀가 남편이 없는 여자, 즉 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율법학자들을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자들로 비판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회당 장면에서 언급된 율법학자와 과부인 베드로의 장모가 결부된 이야기라 할 수 있다(마르 12, 38-40). 또 남편이 없다는 것은 이 가정에 아버지가 없다는 것인데, 예수의 가정 역시 아버지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 35)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마르 10, 29-30)

 

      예수는 하느님 한 분만이 주권자라는 전제 위에서 운영되는 가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남성의 권위주의에 의해 유지되는 가부장제도와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의 권위 아래서 남성과 여성은 평등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예수는 가정 생활에서 남녀의 평등권을 주장하는데, 이것은 당시의 인식 수준에서 매우 혁명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다(마르 10, 11-12).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도 바오로가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며 남녀 사이에 주종관계를 표명한 것과 비교해 보면 예수의 급진성을 실감할 수 있다(1코린 11, 3).

 

      따라서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한 이야기는 가부장제라는 억압적 질서로부터 여성을 해방시키러 오신 메시아에 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가 앓고 있던 열병의 정체란 바로 가부장제도에 의해 유발된 분노와 무기력이 아니겠는가. 이 장면에 등장한 ‘누웠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카타케마인’은 과거미완료 시제로 그녀가 오랫동안 그 질병을 앓아왔음을 암시하는 것 역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그녀의 남편은 사라졌지만 그녀를 억압하던 가부장적 질서는 완고히 남아 여전히 그녀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가 멀쩡히 직업생활을 하던 베드로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예수라는 메시아를 따라나선 것에 홧병이 도져 누워 있었다는 식의 해석은 복음서의 의도에 맞지 않을 뿐더러, 예수의 가르침에도 부합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성에게 항상 존중하는 태도를 취했던 예수와는 달리, 지극히 속물적이고 물욕적인 여성관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없는 자에게 희망을, 죽은 자에게 부활을

 

 

      예수는 회당에서 말로써 귀신을 내쫓았다면, 베드로 장모의 손을 잡음으로써 그녀의 병을 고쳤다. ‘손’이나 ‘팔’은 흔히 권능과 힘을 나타내는 문학적 상징(이사 50, 2; 51, 9)으로 쓰였고, ‘일으켰다’는 말은 부활을 나타내는 용어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를 통해 부활을 경험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살아서 부활을 경험한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인가.

 

      사도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1코린 15, 14). 여기서 그가 말하는 “죽은 이들”이란 “잘못과 죄를 저질러 죽었던 사람”들을 뜻한다(에페 2, 1). 다시 말해 회개 없이 잘못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으며,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장모가 예수로부터 받은 것은 단순히 육체적 고통의 치유가 아니라 엄격한 가부장 질서 속에서 억압받으며 무기력하게 살 수밖에 없었던 여성으로서의 존엄 그 자체일 것이다. 수치와 명예에 지배되는 사회적 금기를 뛰어넘어 말 없이 여인의 손을 붙잡은 예수의 손으로부터 전달되는 위안과 위로의 말씀이 여인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주었던 건 아닐까. 이런 맥락에서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 부활의 첫 증인으로 남성 제자가 아니라 여성 제자들이 등장하는 건 매우 의미심장하다(마르 16, 1-8).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여성들이 예수를 통해 부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부활을 경험하고 증언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복음서는 말하고 있다.

 

      앞서 회개와 믿음에 대한 예수의 요구에 제자들이 버림과 따름으로 응답했다면, 예수의 첫 여성 제자는 부활과 섬김으로 답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신앙이란 부활의 희망 속에 싹 트는 것이며, 예수와 함께 부활하는 경험을 해야만 참다운 신앙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섬김을 통해 구체화되는 신앙의 실천은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예수로부터 주어진 희망과 위안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봉사로 실천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의 여성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신앙의 태도를 예수의 십자가 죽음 순간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견지했던 인물들로 제시되고 있다.

 

 

제자들의 몰이해

 

 

      간략하게 핵심적 내용을 추리자면, 베드로의 집은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던 회당에 맞서는 새로운 회당으로 설정된다. 앞으로 이곳에서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들과 식사도 하면서 귀신을 내쫓고 병자들을 고치게 될 것이다. 테마적 측면에서 베드로의 장모의 치유사건은 정결법 체제 못지 않게 사람들의 삶을 왜곡하고 속박하는 가부장적 질서에 대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 즉 예수의 메시아적 전권에는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던 여성들의 해방을 포함한다. 그러면서 회개라는 주제가 부활이라는 주제로 변주되어 예수의 부활과 여성 목격자라는 중요한 서사적 결말에 대한 복선의 기능을 하고 있다.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회당에서의 귀신축출 사건과 베드로 장모의 치유사건은 앞으로 전개될 안식일에 대한 논쟁을 예비한다. 마르코 요약문에서 사람들은 “저녁이 되고 해가 지자” 예수가 머무는 집 앞으로 모여든다. 이것은 저녁을 하루의 시작으로 삼았던 유대의 시간 계산법이 적용된 것으로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율을 어기지 않으려는 대중들의 관심이 반영된 것이다.

 

      예수는 또다시 ‘외딴곳’으로 물러나 그곳에서 기도를 한다. 그 때 베드로와 그 일행이 예수를 찾아와서 모든 사람이 그를 찾고 있다는 말을 전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여기에 사용된 ‘찾아나섰다’는 말은 (적의를 가지고)‘뒤쫓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고, 또 ‘찾다’라는 말에도 이 동네에 더 머무르기를 바라는 이기적인 욕구가 담겨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탐욕적 주장을 시몬 베드로가 대표로 예수에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베드로를 위시한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뜻은 안중에 없고 그가 기적을 통해 획득한 대중적 명성, 즉 권력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 마르코 복음에서 종종 등장하게 되는 제자들의 몰이해 모티브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회당은 그리스어로 ‘시나고그’인데 베드로의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 때 그것의 동사형인 ‘시나게인’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예수가 세우려는 새로운 회당이 기존의 회당이나 성전처럼 한 장소에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모임과 흩어짐처럼 끊임없이 움직이는 어떤 것임을 암시하는 것은 아닐까. 실제로 복음서 내내 예수는 전진과 후퇴 운동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반면에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 무리는 특정 공간에 고착된 집에 대한 집착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환시를 볼 때조차 초막을 짓고 그곳에 머무르자고 제안한다(마르 9, 5). 이것은 예수와 제자 무리 간의 인식상의 큰 차이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기존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고 전복시키는 활동을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으로 이해한 반면, 제자들은 기존의 권위적 질서를 새로운 권위적 질서로 전환시키는 일을 메시아에 기대하고 있다. 과연 자신들의 기대가 충족되지 못할 경우 그들은 어떤 행동을 하게 될까? 자신들이 메시아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그대로 믿고 따를까, 아니며 그를 부정하고 버리게 될까?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