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 8장-나병 환자를 고치다

ddolappa 2016. 6. 20. 16:09

 

제 8장

 

 

어떤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가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하였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엾은 마음이 드셔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그러자 바로 나병이 가시고 그가 깨끗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곧 돌려보내시며 단단히 이르셨다.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그러나 그는 떠나가서 이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가지 못하시고, 바깥 외딴곳에 머무르셨다. 그래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그분께 모여들었다(마르 1, 40-45).

 

 

 

살았으나 죽은 삶

 

      이 단락은 문맥상 이중적 기능을 한다. 한편으로 온 갈릴래아 지역으로 확장된 예수의 사역은 나병환자를 치유한 사건에서 한 정점에 도달하며 앞서 다루어진 주제들이 요약된다. 다른 한편 여기서 암시된 율법 문제와 관련된 긴장은 앞으로 다루게 될 논쟁과 충돌(마르 2, 1-3, 6)을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나병은 성서와 유대 사회에서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재앙의 하나로 흔히 중대한 죄에 대한 신의 형벌로 간주되었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 선언되어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격리되었으며, 혹시 다른 사람과 마주치게 될 경우 “부정한 사람이오, 부정한 사람이오” 하고 외쳐서 어떠한 접촉도 피해야 했다(민수 13, 45). 그래서 나병환자는 몸은 살았으나 죽은 것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아야 했고(민수 12, 12), 그 질병의 치유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겨졌다(2열왕 5, 7).

 

      성서에서 나병환자를 치유한 이야기는 모세가 미리암을 치유한 것(민수 12, 4-6)과 예언자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을 치유한 것(2열왕 5, 8-14)이 가장 유명하다. 특히 엘리사의 기적 이야기는 예수의 나병 치유 기적에 대한 민담적 배경 사건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 이야기에서도 나병 치유를 통해 이스라엘에 참예언자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그것이 하느님의 역사로 찬양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역시 나병환자를 낫게 함으로써 “카리스마적인 치유 능력을 지닌 종말론적 예언자”임이 드러난다. 즉 이 단락은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는 케리그마로서 그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앞선 사건들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텍스트를 꼼꼼히 살펴보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고 낯선 구절들이 눈에 들어온다. 왜 나병환자는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말하면 될 것은 그렇게 복잡하게 말하는 것일까? 왜 예수는 갑자기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일까? 왜 예수는 자신이 치유한 사람에게 침묵하라고 했을까?

 

 

하느님이 머무는 곳

 

      나병환자는 예수에게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는 대신 깨끗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이러한 요청에는 자신이 부정한 존재임을, 즉 죄인임을 자각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나병환자는 자신의 육체적 병을 고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예수에게 온 것이다. 이것은 사람들이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자 요한에게 모여드는 장면과 매우 흡사하다. 온 갈릴래아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펼친 결과 “회개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부응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나병환자의 간청은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즉 앞 부분(‘하고자 하면’)은 ‘의지’나 ‘뜻’을 의미하고, 뒷 부분(‘할 수 있다’)은 ‘능력’이나 ‘힘’을 뜻한다. 쉽게 말해, 고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신을 고쳐줄 수 있다는 말이다. 나병환자는 특이하게도 예수에게 나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보다도 그의 의향이나 뜻을 먼저 묻고 있다. 이에 예수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댔다고 나온다. 여기서도 ‘마음’(‘가엾은 마음’)이 먼저 나오고 ‘힘’을 상징하는 ‘손’이 그 다음에 등장한다. 이것은 능력보다 선행하면서 그것을 발휘할 수 있게 만드는 마음이 중요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대로 그러한 마음보다 능력이 선행할 경우 불신앙의 표현이 될 수 있다. 벙어리 영이 들린 아들의 아버지가 예수를 찾아와 “이제 하실 수 있으면 저희를 가엾이 여겨 도와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예수는 그의 믿음 없음을 꾸짖는다(마르 9, 22-24). 예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마음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불쌍히 여기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조마이’는 내장이나 창자를 의미하는 ‘스플랑크논’에서 파생한 동사이다.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란 타인의 고통이나 슬픔을 애끓는 심정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을 뜻한다. 마르코는 인간의 심성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이 애끓는 마음의 자리가 하느님의 거처이고, 그곳으로부터 병을 치유하고 죄를 용서할 수 있는 예수의 권능과 사랑이 솟아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마르코는 이 ‘애끓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예수조차 기적을 일으킬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예수는 나자렛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고향 사람들로부터 무시와 냉대를 받게 되자 아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없었다(마르 6, 5). 반대로 그것이 아무리 대단한 기적이라 하더라도 ‘애끓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참다운 기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런 기적은 사탄조차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마르 3, 22). 따라서 예수의 기적은 인간의 간절한 믿음과 예수의 ‘애끓는 마음’이 공명해 일으킨 사건임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인간의 ‘애끓는 마음’에 깃들어 계신 하느님을 통해 죄의 용서가 가능하다고 보았고, 결국에는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기에 이른다(마르 2, 10). 유대인들은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만이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이러한 관념을 약간 변형시켜 인간의 마음 속에 계신 하느님에 의해서 인간에게도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거하고 계신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래서 타인의 잘못이나 허물을 용서할 수 마음은 인간에게 주어진 신성한 권한이자 의무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한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 22)

 

      마르코는 이런 ‘애끓는 마음’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고, 그러한 마음을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과정을 ‘성령 세례’라 생각했다. 즉 예수가 세례시 부여받은 성령도, 그리고 그로부터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도 ‘애끓는 마음’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마르 1, 8, 10). 바로 이 점이 예수의 성령 세례가 요한의 회개의 세례와 다른 점이다. 요한의 세례는 죄의 용서를 위한 준비 단계에 그쳤을 뿐 실제적인 죄의 용서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럴 것이 죄의 용서는 인간의 세계 너머에 계신 하느님의 의지와 결단에 달린 문제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는 만일 용서가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 속에 이미 하느님이 활동하고 계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율법에 종속된 타율적 존재가 아니라 자율적인 윤리적 주체로 거듭 나게 된다. 예수의 성령 세례 프로그램은 바로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를 탄생시키기 위한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예수의 정의로운 분노

 

      나병환자는 예수를 알아보고 그에게 다가오는데, 이것은 유대의 정결법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하는 그의 요청 속에도 ‘깨끗하게’라는 정결 코드가 내재되어 있다. 나병환자에게 손을 댄 예수 역시 정결에 관한 금기를 위반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병 치유 이야기는 회당에서부터 계속된 예수와 정결체제 간의 대결에 관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깨끗하게 하다’는 말은 그리스어 ‘카타리제인’을 옮긴 것인데, 이 단어는 레위적 의미에서 ‘깨끗함을 선언하다’를 뜻하기도 한다. 즉 이 단어는 정결함에 대한 공식적 승인을 할 때 사용되는데,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예수는 바로 그 사제적 특권을 찬탈해서 죄의 용서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석할 경우 “다만 사제에게 가서 네 몸을 보이고, 네가 깨끗해진 것과 관련하여 모세가 명령한 예물을 바쳐, 그들에게 증거가 되게 하여라.” 라고 치유된 나병환자에게 말하는 예수는 충고는 납득하기 어렵게 된다. 예수가 그토록 비판하는 성전체제와 타협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증언’ 또는 ‘증거’라는 표현은 마르코 복음에서 적대적인 청중과 관련될 때만 사용되는 기술적 용어이다.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르 6, 11)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서 증언할 것이다.”(마르 13, 9)

 

      또한 마르코 복음에서 모세의 이름은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만 언급된다(마르 7, 10; 10, 3-4; 12, 19-26). 그리고 인용문에서 ‘사제’에서 ‘그들’로 목적어가 변화된 것 역시 사제들 전체를 대표하는 정결법 체제가 이 대목에서 문제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가 강한 분노를 표출하는 단어를 사용하게 된 원인은 지배 이데올로기로 율법을 악용하는 지배체제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돌려보내시며’로 번역된 그리스어 ‘엑세발렌’은 ‘내쫓다’를 의미한다. 또 ‘단단히 이르시다’로 변역된 그리스어 ‘엠브리마스다이’는 ‘분노와 흥분을 담아 경고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나병을 치유한 이야기는 ‘정화’와 ‘심판’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죄인들을 깨끗이 하고 의롭지 못한 자들을 심판하는 것이 메시아 예수의 주된 사역으로 제시된 것인데, 이것은 이 단락이 마르코 복음 1장 2절에서 인용된 바 있는 말라키 예언에 대한 미드라시적 해석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곳에서도 ‘정화’와 ‘심판’이란 주제가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군의 주님)는 은 제련사와 정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말라 3, 3)

 

“나(만군의 주님)는 심판하러 너희에게 다가가리라. 나는 주술사와 간음하는 자 거짓 맹세하는 자 품팔이꾼의 품삯을 떼어먹고 과부와 고아를 억압하는 자 이방인을 밀쳐 내는 자 나를 경외하지 않는 자들을 거슬러 곧바로 증인이 되리라.”(말라 3, 5)

 

 

낙인이 찍혀버린 예수

 

      치유된 자에게 침묵하도록 주의를 주는 예수의 당부는 흔히 대중적 명성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그가 예수의 부탁을 어기고 이야기를 퍼뜨리게 되고, 그 결과 예수는 더 이상 드러나게 고을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는 부분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차라리 예수가 나병환자와 접촉했기 때문에 사회적 금기를 위반한 위험한 인물로 간주되어 사회적 갈등이 발생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타당해 보인다. 다시 말해 예수의 해방 운동은 공동체 내에서 갈등을 유발해 출입이 금지되는 상황마저 초래된 것이다. 이것은 그의 가르침이 그만큼 과격하고 논쟁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율법 자체를 부정했던 것일까? 아니면 율법학자들과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려 했던 것일까? 그것은 어떤 해석이었기에 지배체제의 반발을 유발했고, 또 대다수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일까?

 

      이어지는 단락들(마르 2, 1-3, 6)에서는 율법과 관련된 문제를 둘러싸고 예수와 유대의 지배계층 간의 치열한 논쟁과 충돌이 전개된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