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 9장-중풍 병자를 고치다

ddolappa 2016. 6. 25. 06:35

 

제 9장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 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그 병자는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있었는데, 군증 때문에 그분께 가까이 데려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분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율법 학자 몇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다가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군. 하느님 한 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들이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을 당신 영으로 아시고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 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그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에 모든 사람이 크게 놀라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마르 2, 1-12)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위험한 인물로 낙인이 찍혀 ‘드러나게’ 마을로 들어갈 수 없었던 예수는 ‘다시’ 카파르나움으로 들어간다. 예수는 이미 이곳의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낸 적이 있다(마르 1, 21). 하지만 부사 ‘다시’는 이런 재방문의 의미 뿐만 아니라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의 의미 또한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중풍병자의 치유 기사는 흔히 “갈릴래아 논쟁 사화”(마르 2, 1-3, 6)로 알려진 다섯 차례에 걸친 논쟁들 중 첫 번째로 이후 예수에 대한 적대자들의 공격적 태도는 점차 강도를 더해 간다. 그들은 처음에는 ‘마음속으로’(마르 2, 6), 그 다음에는 제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마르 2, 16) 예수와 논쟁을 벌이다가 그와 직접적으로 대결한 후에는(마르 2, 18) 결국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된다(마르 3, 6). 따라서 예수의 도전은 죽음을 각오한 절박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절박함이 그를 죽음까지 무릅쓰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그전에 갈릴래아에서 일어난 논쟁 5가지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첫 번째 논쟁, 중풍병자의 치유와 사죄 논쟁(2, 1-12)

두 번째 논쟁, 레위의 부름과 부정한 자들과의 식사 논쟁(2, 13-17)

세 번째 논쟁, 단식 논쟁(2, 18-22)

네 번째 논쟁,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일에 관한 논쟁(2, 23-28)

다섯 번째 논쟁,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친 일에 관한 논쟁(3, 1-6)

 

      갈릴래아 논쟁 사화는 마르코 복음의 후반부에 전개되는 5번에 걸친 “예루살렘 논쟁 사화”(마르 11, 27-12, 44)와 대구를 이루며 당대의 현실에 대한 예수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더불어 이 논쟁들을 계기로 예수와 그의 적대자들인 예루살렘의 지배계층 간의 갈등 역시 더욱 심화된다.

 

 

가난이 죄다

 

 

      앞 단락에서 나병에서 치유된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널리 알리고 퍼뜨리기”(마르 1, 45)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여기서 ‘널리 알리고 퍼뜨리다’로 번역된 그리스어 ‘케루세인’은 원래 선교용어로 ‘선포하다’ 혹은 ‘전파하다’를 뜻한다. 다시 말해 그는 치유 직후 복음의 선포자 혹은 설교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카파르나움으로 다시 들어온 후 예수가 한 일 역시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말씀’이란 말은 그리스어 ‘호 로고스’로 초대 그리스도교의 선교적 선포를 뜻하는 전문용어로 사용되었고(사도 4, 29, 31; 8, 25; 11, 29), 마르코 복음에서는 주로 예수의 메시지를 가리키고 있다(마르 4, 33; 8, 32).즉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카파르나움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따라서 중풍병자의 치유 기사에서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살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이어지는 이야기는 독특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치유기사가 안에 있는 논쟁기사를 감싸고 있는 구성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흔히 ‘샌드위치 기법’(inclusio)으로 알려진 마르코만의 독특한 서술기법이다(마르 5, 21-43; 11, 11-25). 이미 살펴본 바 있는 회당에서의 귀신축출 사건 역시 이 기법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종의 액자구성이라 할 수 있는 이러한 서술기법은 액자 바깥의 이야기와 액자 안의 이야기 간의 관계에 유의해야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

 

      우선 액자 바깥의 이야기는 네 사람이 한 명의 중풍병자를 들것에 싣고 예수에게 데려오는 상황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 때 ‘들것’으로 번역된 단어 ‘크라바토스’는 가난한 사람이나 여행자나 군인들이 쉽게 지참할 수 있는 침구류로 ‘가난한 사람의 침대’를 의미한다. 또한 중풍병으로 번역된 단어는 원래 단순히 ‘마비된’ 상태를 지칭한다. 즉 가난하고 신체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이 예수를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예수의 반응은 상식적 이해를 넘어서 있다. 예수는 그들의 믿음을 보고 죄의 용서를 선언한다. 어찌된 일인가? 도대체 무엇이 믿음이고, 왜 병의 치유 대신 죄의 용서를 말했던 것인가?

 

      유대인들은 육체의 질병을 죄의 결과로 이해하는 사회적 통념을 갖고 있었다. 한 예로 길에서 눈먼 사람을 본 제자들은 예수께 이렇게 질문한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요한 9, 2) 예수는 물론 질병과 죄를 동일시하는 사회적 통념에 반대했지만, 실제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종교적 지도층이자 사회적 지배계층은 이러한 편견 위에 질병의 치유와 제사를 통한 속죄 제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병자, 즉 죄인은 오직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만 죄의 용서가 가능했다. 문제는 이러한 제도가 하부계층의 사람들에게 심각한 내면적 고통을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무거운 경제적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육체적 질병으로 고통 받는 것도 모자라 죄인으로 사회적 멸시를 받아야 했고, 병으로 인한 실업은 그들의 경제적 빈곤을 더욱 가중시켰다. 따라서 들것에 실려온 ‘마비된’ 사람은 바로 질병과 죄를 동일시하는 사회적 통념과 그것을 제도화해서 착취 기구로 이용된 속죄 시스템 속에서 고통 받았던 당시의 대중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사회적 경계를 넘어선 믿음

 

 

      그렇다면 예수가 병자 무리에서 발견한 믿음이란 무엇인가? 마르코는 ‘믿음’ 혹은 ‘믿는다’는 말을 “인간적인 장애나 제한을 극복하고 사회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행동”과 연관짓는다. 그것은 특정한 기독론적 내용을 담고 있지 않고 단순히 예수의 도움을 받아들이기 위해 취해진 행동들로서, 그들과 예수 사이를 가로 막은 ‘무리들’(마르 2, 4; 10, 48), ‘공허감과 부끄러움’(마르 5, 26-27), ‘죽음’(마르 5, 35) 등을 극복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마찬가지로 ‘마비된’ 환자의 친구들은 그들을 가로막고 있는 ‘군중’, 즉 병자는 죄인이고 죄인은 거룩한 존재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는 통념을 가진 사람들을 우회해서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께 다가가는 간절함을 보인다. 이 기사에서 치유에 대한 간청의 말이 없는 이유가 그들의 행위 자체가 치유에 대한 절박함과 확신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들은 경제적 또는 사회적 의미에서 하느님 외에는 생존을 위해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사람들로서 바로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유대 문헌에서 부유함과 가난함은 경제적 의미 뿐만 아니라 신학적인 내용 또한 함의한 개념쌍인데, 부유하다는 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고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로서 하느님의 통치를 경험하게 되는 특권을 누리게 된다.

 

      중풍병 환자 무리의 경우 환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그들이 생명을 살리시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켜왔음을 보여준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인생들에게 몸의 병은 곧 죽음과 다른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환자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다른 네 명의 물질적 상호부조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할 수 있다. 적어도 환자는 네 친구들에게서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마태 6, 30)까지 돌보시는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간혹 환자와 네 친구들을 구분해서 공동체의 믿음이 한 개인의 죄사함을 가능하게 했다는 해석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은 신학적 추상화 작업에 능숙함을 보여줄 뿐 가난의 구체적 현실에 대해선 무지함을 드러낸다. 당시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병마는 누구에게나 들어닥칠 수 있는 불행이었고, 그로 인해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는 게 일상적 현실이었을 것이다. 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한 상태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믿고 돕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서로서로는 하느님이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환자와 네 친구들은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 묶인 관계였고, 예수는 그들에게서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이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성격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확인한 ‘그들의 믿음’이란 환자까지 포함된 가난한 자들의 연대성을 포함한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의 사죄 행위 이전에 이미 그의 가르침에 따라 용서를 실천한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 ‘들고 있었다’로 번역된 부분은 원래 그리스어 ‘아이로’ 동사의 현재분사 수동태로 ‘들어올려진’으로 옮겨져야 하고, 그 말의 원뜻은 ‘들어올리다, 치워버리다’ 외에 ‘받아들이다, 용서하다’ 등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들것에 ‘들어올려진’ 중풍병자는 네 사람에 의해 이미 받아들여지고 용서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마태 6, 12)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보여준 믿음은 흡사 예수의 세례식 장면과 유사하게 장면화되어 있다. 그들이 ‘구멍을 낸 지붕’은 예수의 세례시에 ‘갈라진 하늘’처럼 인간과 하느님 간의 화해를 상징한다. 예수가 하늘로부터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음성을 들었던 것처럼 그들은 예수로부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여기서 ‘얘’로 옮겨진 그리스어 ‘테크논’은 부모가 자식을 부를 때 사용된 호칭으로, 중풍병자는 죄를 용서받았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되었다는 말이다. 가난하고 병든 죄인에서 하느님의 자녀로의 급격한 신분 변화. 가난한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생명의 역사인 치유와 위로가 일어나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진정한 백성이라는 예수의 신학적 통찰은 그의 하느님 나라 개념이 지닌 급진적 혁명성을 특징짓는다.

 

 

새로운 속죄의 길

 

 

      이런 맥락에서 중풍 병자 무리는 전통적 속죄 체제에 대한 새로운 대안을 예시하는 인물들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주기도문의 가르침처럼 하느님이 인간을 용서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용서했고, 그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을 수 있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예수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용서의 주체는 예수가 아니라 여전히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란 말을 발설하기 꺼려했던 유대인들은 그가 주체가 된 문장을 말할 때 흔히 수동태 문장을 사용해 주어를 생략하곤 했는데, 이를 ‘신적 수동태’라 하며 예수의 저 문장은 그 한 예이다.

 

      하지만 기존의 속죄 제도를 운영하고 있었던 지배계층에게 예수의 새로운 속죄 대안은 자신들의 권위에 대한 도전임은 물론 정결법에 기초한 사회 질서 전체를 붕괴시킬 만큼 위험한 것으로 보였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비난한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는 스스로 하느님이라고 주장해서가 아니라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죄의 용서를 행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신성모독 죄를 지었다는 것이다. 유대 사회에서 죄의 용서는 오직 하느님 한 분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를 어긴 사람은 돌로 쳐죽이는 형벌을 받았다(탈출 34, 7; 이사 43, 25. 44, 22; 신명 6, 4).

 

      그러나 율법 학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허점이 있다. 우선 예수는 자신이 죄를 용서하는 게 아니라 신적 수동태 문장을 통해 하느님이 죄를 용서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죄의 용서가 하느님의 전권이라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전권을 독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다시 말해 예수가 하느님의 전권을 찬탈하려 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죄의 용서에 대한 자신들의 독점권을 방어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율법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해 예수는 사죄와 치유 중 어느 것이 더 쉽냐는 질문을 던진다. 죄의 용서는 하느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고, 치유 역시 하느님의 창조적 권능을 소유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결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예수는 일종의 수사학적 질문을 던져 율법 학자들을 침묵시키고 그들에게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예루살렘에서 수석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예수의 권한을 문제 삼을 때도 예수는 동일한 유형의 질문을 던져 그들을 침묵시킨다. 마르 11, 29).

 

      이어서 그는 이 단락의 가장 핵심적인 명제를 제시한다.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 주겠다.” ‘사람의 아들’이란 말은 1) 다니엘서에 나오는 종말론적 메시아(다니 7, 13-14) 2) 인간 일반을 뜻하는 아람어 ‘바르 나샤’의 그리스어 번역 3) 예수가 자신의 수난과 관련된 맥락에서 스스로를 지칭한 명칭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여기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에 대한 일반적 칭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예수는 “사람은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선포한 셈이 된다. 무슨 말인가?

 

      인간이 친구의 죄를 용서한다면, 용서는 죄를 사하는 하느님의 전권이기 때문에 그는 용서를 통해 하느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잘못을 용서하는 순간은 용서하는 그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지상에서 활동하는 순간이자 하느님의 다스림이 실현된 순간이다. 지배계급이 하느님을 성전에 가두고 그의 전권을 독점했다면, 예수는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곧 성전이라는 논리로 이에 맞선다. 그 결과 인간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권리이자 의무인 용서를 통해 스스로를 일종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하느님의 자녀’란 성전으로 변화한 순간 인간이 획득하게 되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다름 아니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게 해 준다’, 즉 은폐되어 있던 진리를 계시한 것이다.

 

 

생명의 선언으로서 예수의 사죄 선언

 

 

      예수는 중풍 병자에게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한다. 그러자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시위하듯 일어나 밖으로 걸어나간다. 여기서 ‘일어나’로 번역된 말은 ‘일어나다’를 뜻하는 그리스어 ‘에게이로’의 과거 수동태로 ‘일으켜져’로 옮겨져야 한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하느님을 찬양했던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은 다리 저는 이가 사슴처럼 뛰게 되리라는 종말론적 예언이 성취된 순간이기도 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 실현된 순간이기도 하다(이사 35, 6; 예레 31, 8).

 

      이제 예수가 중풍 병자를 대면한 순간 왜 치유 대신 죄사함을 먼저 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질병이 죄의 결과라는 사회적 통념으로부터 고통을 받던 개인의 내면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그의 사회적 위치를 회복시켜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유발된 율법 학자들과의 논쟁 결과 예수는 성전의 속죄 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구원 프로그램을 선포하게 된다. 그것은 성전의 제사장들이 아니라 인간에게 죄를 용서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로써 소수의 지배자들에게 독점되었던 하느님의 권한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양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정결법에 기초한 제사 제도에 짓눌려 '마비된' 상태로 생명을 소진시킬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즉 예수가 선포한 속죄 프로그램의 기본 취지는 인간을 육체적 결함과 죄의 상태로부터 해방시켜 생명 본래의 온전함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생명의 선언으로서 새로운 사죄 프로그램을 선포한 결과 예수는 역설적 결과에 직면하게 된다. 예수의 적대자들은 그를 신성 모독으로 비난하고(마르 2, 7),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되고(마르 3, 6), 마침내 예수는 그로 인해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마르 14, 64). 생명을 온전케 하려는 그의 열정이 그를 죽음에 몰아넣은 것이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