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장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 2, 13-17)
용서한다는 것은 함께 밥을 먹는 것이다.
이 단락은 세리 레위를 제자로 부른 소명기사와 죄인들과의 식사에 관해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과 벌인 논쟁기사로 이루어져 있다. 두 이야기들은 '용서'와 '식탁 교제'라는 주제를 통해 서로 연결된다. 즉 죄인을 용서한다는 것은 그를 용납하고 함께 식사하는 것이라는 서사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르코는 '죄인' 레위가 제자로 부름 받는 이야기를 이곳에 배치해서 중풍병자의 치유기사의 주제인 '용서'와 연결시키는 한편, 식사 모티브를 도입해서 그것을 바리사이파와 구분되는 예수 공동체의 차별화 원리로 확장시킨다. 식탁 교제의 새로운 관행이야말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분파를 만들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 중 하나"(멀튼 스미스Morton Smith)였기 때문이다. 이후 전개되는 마르코 복음의 논쟁들 대부분이 먹는 문제에 집중된 것 역시 그것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단락은 식탁 교제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전체적 해석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그들은 그것을 왜 그토록 중대한 문제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그 전에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있다. 세리는 왜 죄인으로 간주되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국경 도시인 카파르나움에서 관세 업무를 담당하던 직업인 세리가 등장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세리로 번역된 그리스어 '텔로니온'은 보다 정확히 요금징수원을 뜻한다. 당시 관세 수입은 조세와 달리 국가 관리가 아니라 세금 청부업을 위임받은 개인들이 징수했다. 그들은 세액이 정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점을 이용해 멋대로 탐욕을 채웠고, 그래서 민중들로부터 '직업상 사기꾼'으로 간주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방인들과 그들의 '부정한' 물건들을 자주 접해야 하는 직업적 특성상 정결 규정을 지키기 어려웠고, 식민지의 통치자인 로마 당국에 협조해야 했기에 심한 경우 매국노로 손가락질을 받았다. 복음서에서도 그들은 이방인들(마태 18, 17)이나 창녀들(마태 21, 32-32)과 함께 언급되며, '세리와 죄인'(마태 11, 19)은 일종의 관용구로 사용될 정도였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의 치유 대상인 병들고 귀신 들린 자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바로 그런 '죄인' 레위를 제자로 부른 것이다. 이 장면은 네 제자를 부른 장면(마르 1, 16-20)과 매우 유사하지만 차이가 있다. 레위를 제자로 부른 장면에서는 그에 합당한 임무("사람 낚는 어부")가 생략되었고, 그에 수반되는 '버림' 대신 그냥 자리에서 일어난 모습만 제시되었다. 이 단락에서 '제자들'('마데타이스')이란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데, 레위는 흔히 열두 제자로 알려진 전업선교사 집단보다 더 광범위한 제자 집단에 속한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마르 3, 13-19). 제자됨을 뜻하는 '따르다'('에콜루테인') 동사를 이용해서 예수를 따르는 이가 많았다는 진술 역시 이러한 추측을 뒷받침한다.
예수의 제자로 받아들여진 레위는 예수와 제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함께 식사를 한다. 여기서 '음식을 먹다', '자리를 함께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각각 '카타케이스티이'와 '순아네케인토'인데 이 단어들은 모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있는 자세(reclining)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연회 때 방석이나 담요에 왼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식사하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이 단어들은 바로 잔치 때의 식사 자세를 나타낸다. 따라서 예수와 식사하는 장면은 일반적인 식사가 아니라 제자가 된 기쁨을 표현하는 연회의 자리임을 알 수 있다. 이 장면에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에 새로운 의미가 추가된다. 즉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를 '따른다'는 것이고 그와 함께 '먹는다'는 것이다. '따름'이 제자 됨의 추상적 표현이라면, '먹음'은 그것의 구체적 상징이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 장면을 목격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따지듯 묻는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 받는 사람들과 식사 좀 한 것이 대체 무슨 대수로운 일이기에 저들은 따지고 묻는 것일까?
'성결'에서 '온전함'으로
성전 제의부터 일상 생활에 이르기까지 유대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단 하나의 원리는 '성결'이다. 그 원칙은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 2)는 명령에 기초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정결'을 실천하며 살아야 했다. 특히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상의 경건을 제의적 정결 수준으로 고양시키기 위해 사제적 생활 양식을 일상생활에 적용시켰다. 음식과 그 소비를 제사적 행위로 받아들인 그들은 특히 밥상 친교를 제의적 정결이 구현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장소로 인식했다. 그래서 일상에서 지켜야 할 그들의 율법 단화(pericopae) 총 341개 중 229개 이상(율법 전통 가운데 67%인 약 3분의 2)이 식탁교제법(dietary law)에 관한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먹을 수 있는 지에 관한 세분화된 규정들을 통해 거룩한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주후 70년경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 이후 사두가이파와 에세네파가 거의 소멸되고 바리사이파가 유대교를 대표하게 된 다음부터 그리스도 공동체와의 갈등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져만 갔다. 제의적 정결 이념에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던 바리사이파와 그리스도 공동체는 안식일, 조상들의 전통 등 많은 영역들에서 서로 충돌했지만 특히 식탁 교제에 관한 문제에서 갈등의 극에 달했다. 제의적으로 정결하지 못한 이방인들이나 죄인들과의 식사에 거리낌이 없었던 그리스도 공동체의 관행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거룩함의 우주를 파괴하는 행위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마르코 복음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리사이파와 그리스도 공동체의 입장 차이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유대 사회가 선택할 수 있었던 두 가지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즉 로마의 식민 통치와 날로 거세지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력 속에서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당면 과제를 놓고 두 세력은 상이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먼저 바리사이파는 분리와 배제를 통해 순수성을 유지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들은 거룩한 계율을 세분화시켜 일상에 강도 높게 적용시킴으로써 정결의 순도를 극대화하고자 했다. 문제는 그로 인해 민중의 존경을 받을 수 있었지만, 그들의 제의적 기준에 따라 사는데 실패한 대다수의 ‘죄인들’을 양산해냄으로써 민중들과 분리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가 엘리트주의적 입장을 취했다면, 예수 운동은 용서와 관용을 통해 바리사이파에 의해 배제된 주변인들을 포섭하는 전략을 취했다. ‘거룩’을 지키기 위해 제시된 계명들 속에는 과부, 고아, 이방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야만 하는 ‘약자 보호법’이 존재했고, 예수를 따르는 공동체는 그 속에서 시대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았다(탈출 22, 20-26; 신명 10, 18-19). 즉 예수 공동체는 정결의 근본 취지가 인간이 지상에서 온전함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데 있다고 해석했고, 그를 위해 사회적 타자인 ‘죄인들’에 대한 환대와 그들 간의 연대의식을 강조했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의 식탁 교제는 하느님 나라의 상징이며, 그와 함께 하는 식탁으로의 초대는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이다.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대를 죄인이 아닌 한 사람의 온전한 인간으로 용납한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고대 사회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대를 자신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그와 사회적 유대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식탁 교제는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시키는 구성 원리가 된다. 불순하고 결핍된 존재로서 사회 주변부로 배제되었던 각양각색의 ‘죄인들’은 용서와 관용으로 충만한 식탁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 앞에서 온전한 주체로 회복되는 경험, 즉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예수의 밥상 공동체는 ‘성결’(holiness)의 원칙을 온전성(wholeness)에 대한 지향으로 재해석하는 한편, 이질적 세력들을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이스라엘 갱신 프로그램으로 제시되었던 것이다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 예수
예수는 제의적 정결 이데올로기에 고통을 당했던 대다수 민중들을 관용과 환대의 식탁으로 초대해서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했던 것이다. 그는 죄인으로 전락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데서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거룩한 삶의 자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죄인들만큼 낮아지고 그들만큼 더러워지는데 거리낌이 없었고 그래서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 불리기조차 했다. 정결한 것과 더러운 것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만이 거룩한 우주 질서를 지키는 기본 원칙이라 생각했던 바리사이파들에게 이 양자를 뒤섞고 그 경계를 혼란시키는 행동을 일삼는 예수는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폭도 이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예수의 개인적 일탈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무리의 공동체적 관행으로 자리를 잡았다는데 있다. 그래서 죄인들과의 식탁 교제를 못마땅하게 여긴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그의 제자들에게 항의를 했을 때 정작 대답은 제자들이 아니라 예수가 하게 된 까닭은 그가 공동체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견해는 그를 따르던 마르코 공동체의 기본 입장을 대변한다.
그에 따르면,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듯이 예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다. 질병과 죄를 연관시킨 비유는 당시의 사회적 통념을 반영하지만, 이 비유의 핵심은 익숙한 관념을 뒤집는 전복적 상상력에 있다. 당시에 쓰인 그리스 문헌들에서 이와 유사한 속담이 발견되곤 한다. “의사들은 건강한 자들에게는 쓸모가 없지만 병든 자들에게는 머물곤 한다.” 하지만 그리스의 속담에서는 의사가 주체로 등장하지만, 예수의 비유에서 주체는 환자이다. 죄를 용서하고 병을 치유하는 예수의 모습은 치유하는 하느님의 모습과 흡사하다. “나는 너희를 낫게 하는 주님이다.”(탈출 15, 26) 그런데 탈출기에서는 계명을 잘 지켜야만 하느님의 치유가 베풀어질 수 있다고 제시된다면, 예수의 치유는 계명에 의해 부정한 자들로 낙인찍힌 자들에게 베풀어진다. 즉 예수의 비유에는 죄인으로 주변화된 사회적 타자들이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한 자들이며, 용서와 치유는 그들과 예수가 주체로서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이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다시 말해, 환자 혹은 죄인은 예수로부터 일방적으로 시혜를 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해야 할 주체이며, 죄를 용서하는 자로서 예수는 그들과 함께 죄인을 만들어내는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그들을 해방시키는 자라는 것이다.
예수 공동체는 바리사이파와 비교할 때 일종의 역설에 기반한 공동체이다. 정의로운 자만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바리사이파가 생각한다면, 예수 공동체는 죄인들이야말로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수치와 치욕으로 받아들진 십자가가 그리스도 공동체에 의해 영광과 은총으로 재해석된 것과 매우 비슷하다. 관용과 환대의 정신과 아울러 이러한 역설의 정신은 초창기 예수 공동체를 특징짓는 중요한 정신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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