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장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 18-22)
공동체의 차별화 전략으로서 논쟁
앞 단락에서 먹는 것이 문제가 됐다면, 이제는 굶는 것이 문제가 된다. 도대체 금식이 왜 문제란 말인가. 유대인들은 경건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선, 기도, 금식을 중시했다(마태 6, 1-18). 이중 금식은 신 앞에서 겸손, 속죄, 간구를 표현하기 위한 예식으로, 율법이 정한 공적 금식일인 속죄일은 누구나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레위 16, 29-31. 23, 27-32; 민수 29, 7). 바리사이파는 자신의 신앙심을 나타내기 위해 공적 금식 외에 사적 금식을 하기도 했는데, 문제가 되고 있는 건 바로 이 사적 금식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이 예수의 제자들에게 제기하는 질문의 성격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수의 답변에서 역으로 유추하면, 전자는 금식의 여부에 대해 묻고 있고, 후자는 금식의 시기에 대해 묻고 있다. 또한 시간적으로 전자는 신랑으로 비유된 예수와 함께 있었던 시기와 관련되고, 후자는 그가 사라진 이후의 시기와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미묘한 차이들은 금식이라는 주제에 흡수되어 은폐되는 대신, 각각의 공동체 집단들 간의 차이는 더욱 부각되도록 서술되고 있다. 바꿔 말해 이 단락의 핵심은 금식 자체가 아니라 그를 통해 선명해지는 예수 공동체의 관행이다.
단식 논쟁이 공동체 형성의 관점에서 기술되고 있다는 사실은 “바리사이의 제자들”이란 어색한 표현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바리사이 종파는 따로 제자를 두지 않았음에도 이런 표현이 등장한 것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제자들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는 그리스도 공동체를 경쟁 공동체들로부터 차별화시키는 집단적 기억의 준거점으로 등장하며 그로부터 기원한 공동체의 관행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른 공동체와 차별화되는 예수 공동체의 특징이란 무엇인가?
먹보요 술꾼인 예수
세례자 요한은 예수에게 영감을 제공했고, 예수는 그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이 둘은 서로 구분되는 행동양식을 보였다. 요한이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갖고 있었던 반면, 예수는 ‘먹보요 술꾼’으로 불리길 마다하지 않았다(마태 11, 18; 루카 7, 33). 신학자 노만 페린Normann Perrin이 식탁교제의 전통을 예수 사역의 가장 큰 특징으로 지목할 정도로 예수는 ‘함께 먹는 행위’에 유별난 집착을 보였다. 심지어 그가 제자를 부른 목적도 함께 먹기 위해서였고(마르 2, 13-17),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성들만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을 배불리 먹이는 기적을 일으키기도 했으며(마르 6, 30-44), 그가 죽기 전 제자들과 함께 한 최후의 만찬은 그리스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의식인 성찬전례로 제정되었다(마르 14, 22-26).
먹음에 대한 예수의 집착에 가까울 정도의 행태는 그를 따르던 무리 대부분이 굶주림에 시달리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사흘이나 굶은 채 예수를 따라다니기도 했고(마르 8, 2), 그래서 예수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는 구절을 제자들을 위해 가르친 기도문에 넣기도 했다(마태 6, 11). 예수의 이와 같은 태도는 일용할 양식을 하느님의 선물로 간주했던 유대인의 관점이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코헬 3, 13) 당시 경건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이와 같은 인식을 공유하고 있었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신의 축복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일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었을 것이다.
현재를 인식하는 방식에서도 요한과 예수는 서로 달랐다. 요한에게 현재는 신의 심판이 이루어지기 직전 단계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경건한 자세로 회개해야 할 때였다. 반면 예수는 하느님의 통치가 앞으로 올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현재에 도래한 것으로 인식했고, 사람들은 그것을 자신의 사역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용서와 식탁교제에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죄의 용서를 위한 금욕적 태도가 아니라 구원의 기쁨을 함께 즐기는 자세를 필요로 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해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사적인 금식을 했는데, 예수의 제자들의 눈에 그들의 행태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로 비춰졌다(루카 18, 9). 한마디로 그들은 단식한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침통한 표정을 짓는 “위선자들”이었다(마태 6, 16).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의 신앙심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금식을 비판했고, 금식을 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신께 보이라고 충고했다(마태 6, 13). 예수 공동체 역시 나중에 일주일에 두 번(수요일과 금요일) 금식하는 관행이 생기기도 했는데, 그것은 예수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한다는 목적을 갖는 것이어서 바리사이의 금식과 구분된다.
예수의 혼인 잔치 비유는 바로 이와 같은 포괄적 인식을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 마르코는 예수의 식탁교제를 혼인 잔치에 비유함으로써 묵시론적 성격을 강조하는 한편, 예수와 함께 질적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예언자들은 종말의 메시아 시대를 종종 결혼식에 비유하기도 했다. 즉 종말의 때에 이루어질 하느님 통치의 도래는 신랑인 하느님과 신부인 이스라엘 백성들 간의 결혼식으로 상상되었다(호세 2, 21-22; 이사 62, 5. 54, 5-6). 이를 마르코 복음의 혼인 잔치에 대입시켜보면, 신랑은 예수에 해당되고, 손님들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사람들, 즉 그의 제자들, 죄인들과 세리들,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 해당된다. 마르코는 혼인 잔치라는 묵시론적 이미지를 통해 예수의 사역과 함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즉 결혼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듯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는 전적인 새로움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마르 1, 27). 그런데 이러한 새로움은 과거로부터의 탈출을 통해서만 경험되는 삶의 실체로서 오직 철저한 버림, 다시 말해 근본적인 회개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따라서 제의적 정결의 구시대적 이데올로기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요한 공동체나, 그것을 이용해 차별적 사회구조를 만들어 이득을 취하는 바리사이 공동체는 예수의 새로운 하느님 나라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마르코의 혼인 잔치 비유에서 충격적인 점은 “신랑이 빼앗길 날”이 언급된다는 점이다. 유대의 결혼식 풍습에서 손님들이 떠나면서 식이 끝나는 반면, 본문에서는 신랑이 사라진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복선이다. 갈릴래아 논쟁 5가지 중 가운데에 해당하는 3번째 금식 논쟁에서 예수의 죽음이 예고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예수가 사회의 지배적 질서와의 대결로 인해 죽임을 당한 것임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공동체의 금식은 바로 이러한 그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의식이다. 예수가 불의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그의 새로운 가르침을 낡은 부대에 담는 일과 마찬가지다. 불의한 지배체제에 항거했던 예수의 도전 정신이 거세된 예수 공동체는 짠맛을 잃은 소금과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마르코는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의 이원론에 기초한 비유를 반복적으로 사용해 이 두 질서들이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는 것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겨야 하듯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상징 체계를 통해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과연 그리스도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제의 체계를 대체할 만한 새로운 전례형식을 개발할 수 있었을까? 가능했다면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by ddolappa
'성서 읽기 > 마르코 복음서 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 13장-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다 (0) | 2016.07.12 |
---|---|
제 12장-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0) | 2016.07.08 |
제 10장-죄인들과 함께 식사하다 (0) | 2016.07.01 |
제 9장-중풍 병자를 고치다 (0) | 2016.06.25 |
제 8장-나병 환자를 고치다 (0) | 2016.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