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 13장-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치다

ddolappa 2016. 7. 12. 05:26

 

제 13장

 

 

예수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하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치 않았다. 그분께서는 노기를 띠시고 그들을 둘러보셨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몹시 슬퍼하시면서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뻗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곧바로 헤로데 당원들과 더불어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마르 3, 1-6)

 

 

 

 

예수의 권위 VS 지배계층의 권위

 

      갈릴래아 논쟁 사화의 마지막 에피소드는 지금까지 일어난 예수의 논쟁들을 최종적으로 종합하는 성격을 지닌다. 회당에서의 더러운 영 축출 사건(1, 21-28)처럼 안식일에 회당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중풍 병자를 치유한 사건(2, 1-12)처럼 ‘치유+논쟁+치유’의 서사 구조로 이루어져 있고,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사건과 나병 환자를 고친 사건(1, 29-31; 1, 40-45)에서처럼 ‘손’ 모티브가 사용되고, 죄인들과의 식탁교제, 단식 논쟁 그리고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은 사건(2, 13-17; 2, 18-22; 2, 23-28)에서처럼 바리사이들과의 논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이 단락은 단순히 치유의 기적 이야기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먼저 병자나 병자 친구들의 치유 청원이 없다. 예수의 병자 치유는 그를 고발하기 위해 지켜보는 적대자들에 대한 도발에 가깝다. 그러므로 중풍 병자의 치유 이야기에서 예수의 기적이 논쟁을 일으켰다면, 이 단락은 치유 때문에 유발된 논쟁이라고 볼 수 없다. 기적을 목격한 청중들의 반응도 기적 행사자나 기적에 대한 놀람이나 칭송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와 적대자들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그들이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된다.

 

      논쟁의 핵심적 주제 역시 예수와 바리사이파 간의 안식일에 대한 해석학적 갈등이 아니다. 그것은 표면상의 갈등에 불과하고 보다 심층에는 예수의 사역이 시작된 이래 줄곧 제기되었던 권한의 적법성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즉 지배계층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수의 권위는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바로 이 문제가 모든 논쟁들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 단락을 통해 다시 한 번 강조된다(1, 22, 27; 2, 10; 3, 15; 6, 7; 11, 18, 29, 33; 13, 34). 예수가 예루살렘의 최고 권력자들과 대면했을 때 그들이 문제 삼았던 것도 바로 이 권위의 문제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르 11, 28) 따라서 이 단락은 예수의 권위와 지배계층의 권위, 하느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위와 사람이 만든 권위 체계로부터 나오는 권위 간의 충돌을 다루고 있다.

 

 

안식일의 근본 정신을 묻다

 

      왜 하필 ‘한쪽 손’일까? 팔이나 다리 등 다른 신체 부위도 아니고 또 양쪽 손이 모두 그런 것도 아니고 왜 ‘한쪽’ 손만 오그라든 사람이 회당에서 예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베드로 장모와 나병환자의 치유 기사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성서에서 ‘팔’이나 ‘손’은 권세나 능력을 상징한다(이사 50, 2; 51, 9; 시편 118, 16). 따라서 ‘한쪽 손’만 오그라든 사람은 능력의 일부를 상실한 사람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어서 제기되는 물음은 그런 신체적 불구와 안식일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역시 안식일 문제를 다룬 앞 단락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즉 안식일은 ‘일 안 하는 날’(탈출 20, 10)로 이해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 날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온갖 형식적 율법들을 제정했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제약을 받고 위축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오그라든 한쪽 손은 율법으로 인한 “삶의 위축과 불구상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왜 병자는 예수에게 치료를 부탁하지 않았던 것일까? 다른 치유 이야기들에서는 환자가 자신이 병 들어 있음을 자각하고 예수에게 나왔지만, 이 이야기 속 환자에게는 그런 자각이 결핍되어 있다. 즉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려는 경건한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안식일 율법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다수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의 적대자인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일반적 사람들이 그를 고발하려고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의 선택은 사뭇 도발적이다. 그런 적대적 분위기를 감지했다면 안식일이 지난 후에 치유해도 될 것을 그는 과감히 도전을 선택한다. 그는 환자를 회당 한 가운데 세우고 그들에게 질문한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합당한가,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 합당한가?’ 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선이라고 생각해서 회당에 모였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질문은 환자를 치료하는 일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보다 우선하는 선이란 말인가? 이미 당시에는 “생명이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있을 경우에 안식일 율법을 유보해도 좋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 하지만 한 손이 오그라든 환자는 이런 예외 사례에 속할 만큼 생명이 위태롭지는 않기 때문에 안식일을 준수하는 선을 능가하는 선이라 볼 수 없다.

 

      예수의 질문을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사이의 선택으로 파악하는 건 그의 질문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의 강조점은 ‘합당성’에 있다. 즉 예수는 율법적 차원의 합법성이 아니라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느님의 뜻에 맞는 합법성을 묻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것인가를 예수는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만을 선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근본 정신을 묻는 예수의 질문은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 투쟁의 무대

 

      예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한 채 그들을 둘러본다. 여기서 ‘둘러보다’(‘페리블렙페스다이’) 동사는 신약 성서에서 총 7회 등장하는데 그 중 6회가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용되었다(3, 5; 3, 34; 5, 32; 9, 8; 10, 23; 11, 11). 이 단어는 주로 주위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이 단락에서는 예수의 분노의 대상이 회당에 있는 사람들 전체에 해당됨을 의미한다. 신앙의 열정이 경직된 신념으로 고착되어 도착적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 대한 분노이다. 그러한 신앙을 마르코는 ‘완고한 마음’이라 표현한다. ‘완고함’을 뜻하는 그리스어 ‘포로시스’는 ‘둔함, 단단함, 완고함, 완악함’ 등을 의미하는데, ‘완고한 마음’은 불복종, 구원의 상실, 심지어 죽음을 가리키기도 한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의 열 두 제자가 이러한 마음에 감염되기도 한다(6, 52; 8, 17). 자신의 신앙만이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주관적 신념으로 내면화하게 되면 다른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경직된 마음의 상태가 되는데, 이것은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불신앙의 늪임을 마르코는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마음은 “가엾은 마음”(1, 41)이다. 예수가 나병 환자를 보고 느꼈던 불쌍한 마음이야 말로 그리스도교도에게 요청되는 것으로, 그것은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자세를 말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생각하는 안식일의 근본 정신이란 무엇일까.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예수는 “일어나 가운데로 나와라.” 그리고 “손을 뻗어라.” 하고 명령한다. ‘일어난다’는 것은 부활을 뜻하는 전문용어로 죄 된 삶을 돌이켜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다. 안식일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날이다. 그를 통해 하느님의 시선을 피해 그늘 진 변두리를 찾아 헤매던 삶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즉 안식일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놓을 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다. 그리고 안식일은 일을 안 함으로써 얻게 되는 안식(휴식)이 아니라 일을 함으로써 주어지는 안식(평안) 속에서 왜곡된 자아를 정상화하고 위축된 영혼을 확장하는 날이다. 그럼으로써 창조의 본래 뜻을 회복시킬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예수의 치유 행위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그는 한 인간을 육체적으로 온전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어긋난 하느님과의 관계를 바로 잡도록 했고, 그를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를 옮겨 놓았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예수의 치유 활동은 온전함과 새 생명을 지상에 가져오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며, 하느님의 구원 활동은 안식일 율법조차 막을 수 없다는 선언이다.

 

      예수의 활동과 가르침은 하느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활동을 나타내는 종말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율법 학자를 비롯한 지배계층의 권위와 다르다. 예수의 권위는 비인간화된 권위 아래서 희생 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회복시키는 권위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사람이 만든 인위적 권위에 기반한 지배계층과 충돌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예수가 죄사함, 식탁 교제, 금식 그리고 안식일에 관해 제시한 새로운 가르침은 유대 사회의 기본 질서를 뒤흔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는 적대적인 두 집단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당원들이 서로 손을 잡고 막아야만 할 만큼 위험 인물이었던 것이다.

 

      원래 바리사이파는 유대의 민족주의자들로 친로마적 성격을 띤 갈릴래아의 상류층이었던 헤로데 당원과 견원지간이었다. 그런 그들이 서로 담합을 해서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활동이 유대의 종교 및 정치 지도자들에게 근본적인 도전이었음을 암시한다. 이 두 집단은 황제에게 내는 세금 문제를 다룰 때 다시 함께 등장하는데, 이것 역시 예수의 활동이 지닌 반체제적인 정치적 성격을 가리킨다(12, 13-17).

 

      따라서 본 단락은 안식일과 회당으로 상징되는 유대의 상징적 질서의 심장부에서 일어난 정치적 투쟁을 그린 일종의 정치적 연극으로 볼 수 있다. 아니, 그 동안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며 예수가 해왔던 모든 행동과 가르침은 사회의 불의한 지배구조를 겨냥한 날카로운 칼날이었고, 그 해방 투쟁이 이 단락에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고 파악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이다.

 

 

갈릴래아 논쟁 사화를 마치며

 

      지금껏 다섯 차례에 걸쳐 갈릴래아에서 벌어진 논쟁들을 다루었다. 이 다섯 개의 이야기들은 이미 살펴본 것처럼 서로 긴밀하게 구성된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형성하고 있다.

 

첫 번째 논쟁, 죄의 용서와 치유(부활 모티브)

두 번째 논쟁, 죄인과의 식탁교제

세 번째 논쟁, 금식이냐, 식탁교제냐(예수의 죽음 예고)

네 번째 논쟁, 안식일의 식탁교제

다섯 번째 논쟁, 안식일의 치유(부활 모티브)

 

      첫 번째와 다섯 번째 이야기들은 ‘기적-논쟁-기적’의 구조로 되어 있고 ‘부활’ 모티브를 내재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세 번째 이야기에서 예수의 죽음이 예고되고 있다는 점에서, 갈릴래아 논쟁 사화는 마르코 복음서 전체 구조의 축소판과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논쟁 사화는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부활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유대의 지배계층과의 갈등으로 인한 것임을 암시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논쟁은 죄와 용서란 주제로 묶이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안식일이란 주제로 묶여 있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야기들은 모두 ‘먹음’이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것은 식탁 교제가 예수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음을 시사한다. 이미 언급했듯이 기적과 식탁 교제는 역사적 예수의 공생애 사역을 특징짓는 2가지 중요 활동이었고,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이후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해안으로 물러나 제자단을 구성하게 된다. 논쟁을 통해 제시된 그의 가르침과 선언들은 그가 형성하고자 한 대안 공동체의 교훈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이런 흐름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예수의 적대자들이 그의 죽음을 모의할 정도로 갈등이 치열해진 만큼 그의 활동 역시 보다 조직적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마지막으로 이 단락에서 헤로데 당원이 등장한 것은 헤로데 안티파스에 의한 세례자 요한의 죽음(6, 17-29)을 예비한 것이기도 하다는 점을 지적해두도록 하자.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