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15장-예수와 베엘제불

ddolappa 2016. 7. 20. 23:44

 

제15장

 

 

예수님께서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그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그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부르셔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한 나라가 갈라서면 그 나라는 버티어 내지 못한다. 한 집안이 갈라서면 그 집안은 버티어 내지 못할 것이다. 사탄도 자신을 거슬러 일어나 갈라서면 버티어 내지 못하고 끝장이 난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신성을 모독하는 어떠한 말도 용서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이게 된다.” 이 말을 하신 것은 사람들이 “그는 더러운 영이 들렸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르 3, 20-35)

 

 

 

 

적들의 심장을 겨냥하다

 

      산에 올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선포한 예수는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했던 집(1, 29)일 수도 있는 어떤 집으로 물러난다. 모여드는 군중 때문에 식탁 교제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 예수의 친척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예수가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를 “붙잡으러” 온 것이다. 예수의 친척들에 대한 이야기(21절)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과의 논쟁(22-30절)으로 갑작스럽게 중단되었다가 다시 이어진다(31-35절). 마르코가 즐겨 사용하던 샌드위치 기법이 이 문단에도 쓰인 것이다. 이 기법을 통해 예수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친척들과 예수에게 악마가 씌었다고 비난하는 율법 학자들이 서로 연관된다. 이 단락을 해석하기 위해서 우선 율법 학자들과의 논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율법 학자들이 예수를 비난하는 내용은 두 가지다. 그들에 따르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고”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것이다. 베엘제불은 히브리어로 ‘높음’(공중), 처소, 거주를 뜻하는 ‘바알세불’에서 파생한 말로 ‘거주의 영’을 뜻하기도 한다. 바알세불은 가나안 신의 이름으로 귀신들의 왕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때로는 ‘바알세법’이라 불리며 오물의 신 또는 파리의 신을 의미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예수는 사탄의 부하로 그의 사역은 악마의 활동일 뿐이라는 게 율법 학자들의 주장이다.

 

      개인은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그가 속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고대 사회에서, 그리고 ‘수치와 명예’라는 심급에 의해 개인과 공동체에 대한 판단이 결정되던 지중해 문화 내에서 예수를 악마로 낙인 찍으려는 의도는 분명하다. 공개적으로 그에게 수치를 안겨 그를 공동체로부터 추방하려는 것이다. 예수의 친척들이 그를 붙잡으러 온 까닭도 그의 메시아 활동으로 인해 그나 그의 가족들이 불명예를 당하지 않으려는 의도에서였을 것이다.

 

      예수는 직설적인 화법 대신 ‘비유’(4, 2; 12, 1)를 선택해 그들에게 응답한다. 예수에게 비유는 적대자들을 겨냥한 심판의 형식으로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들을 귀”(4, 9)를 필요로 한다. 예수는 적대자들의 비난을 역으로 그들에게 적용시켜 그들을 자기 모순에 빠뜨리는 한편,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로 만들어 그들을 공격한다. 그에 따르면, 만일 예수가 그들의 주장처럼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들을 쫓아낸 것이라면, 그것은 사탄이 사탄을 내쫓는 것과 마찬가지며, 그러한 자기 분열은 결국 사탄을 망하게 할 것이다. 여기까지가 예수의 반박이 갖는 논리적 층위며, 비유적 차원에서 그의 주장은 훨씬 강도 높은 비판을 함축한다.

 

      우선 적대자들이 예수가 앞에서 만난 평범한 율법 학자들이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사람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코 복음의 지형학적 구도에서 예루살렘은 예수가 죽임을 당한 적대적인 도시이다. 예수는 바로 그 도시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다윗의 나라와 구분된다고 주장하게 된다(12, 35-37). 그는 성전을 ‘기도하는 집’으로 만들기 위해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쫓아내며(11, 15-17), 심지어 성전의 멸망(13, 2)과 그 후 자신이 “집주인”으로 다시 돌아올 것(13, 35)을 예고한다. 즉 예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나라’는 다윗 왕국의 중앙 집권화된 정치를 뜻하며, ‘집’은 그 나라의 상징적 중심인 성전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러한 ‘나라’(24절)과 ‘집’(25절)이 23절과 26절에 등장하는 ‘사탄’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은 예루살렘의 성전 체제야말로 사탄의 다스림을 상징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광야에서 시작된 예수의 투쟁(1, 13)은 회당에서의 귀신 축출(1, 21-28)과 지배적 상징 체제에 대한 도전(2, 1-3, 6)을 거쳐 마침내 로마 팔레스타인의 정치적 심장을 겨냥하고 있다. 사탄은 이렇게 개인의 영혼 뿐만 아니라 사회 제도나 국가 속에도 ‘거주’하고 있다.

 

 

힘센 자를 묶어라

 

      예수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는 사실 다음 구절이다. “먼저 힘센 자를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힘센 자의 집에 들어가 재물을 털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 수 있다.”(3, 27) 여기서 ‘재물’로 옮겨진 단어('skeue')는 원래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기구나 그릇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마르코 복음 11장 16절에서도 사용되는데, 거기서는 성전에서 사용되는 기물을 의미한다. ‘묶다’(‘dese')라는 동사는 축귀의 문맥에서 사용되기도 하고(5, 3), 세례자 요한(6, 17), 예수(15, 1), 바라빠(15, 7) 등이 투옥될 때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이 문장은 ‘힘센 자’ 즉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집 안으로 들어가 ‘세간 혹은 그릇’ 즉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예수가 자기 사역의 본질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세례자 요한이 선언했듯이 예수가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더 힘센 자’)(1, 7)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해를 해서는 안 된다. 예수가 단순히 능력이나 권능 면에서 사탄보다 더 우월하기 때문에 그와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사탄보다 ‘더 힘센 자’인 까닭은 그의 능력이 선 그 자체인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현실에서는 선한 힘이 미약해 보이더라도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선밖에 없다는 믿음이야말로 예수가 목숨을 바쳐 지키고자 했던 신념이었다.

 

      예수가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죄로 언급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예수가 사탄을 쫓아내고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힘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성령의 활동을 악령의 파괴적 행위로 왜곡하는 것은 하느님을 부인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며, 따라서 하느님이 허락한 사죄의 은총 역시 거부되고 만다. 예루살렘에서 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의 사역이 갖는 성격을 올바로 판별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자신들만이 하느님을 대변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신들이 허락하지 않은 권한을 행사하며 자신들의 권위에 도전하는 예수는 사탄의 힘을 이용해 마귀들을 부리는 자로밖에 인식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리고 인간을 탈취하라!’는 모토는 예수 사역의 방법과 목적을 요약한다. 예수는 인간 삶의 전반에 ‘거주’하고 있는 사악한 영을 쫓아내고 그의 속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해방은 세속적 힘이나 사탄의 권위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선함에서 비롯된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다. 그래서 예수는 투쟁의 무기로 말씀, 즉 언어를 선택한다. 율법 학자들과의 논쟁은 그가 언어라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예수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오염되고 지배 수단으로 전락한 언어를 그들로부터 탈취해서 해방의 도구로 전환한다. 바로 이 순간은 약속된 종말론적 해방이 성취된 순간이기도 하다. “용사에게서 포로들을 빼앗을 수도 있으며 폭군에게서 전리품을 빼낼 수도 있다. 너를 대적하는 자에게 내가 대적하여 너의 자식들을 내가 구해 내리라.”(이사 49, 25)

 

 

예수의 새로운 가족

 

      마르코는 샌드위치 기법을 통해 율법 학자들과 예수의 친족들 모두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 하지만 비판의 지향점은 차이가 있다. 전자가 국가와 그것의 지배 구조와 연관된다면, 후자는 사회를 구성하는 기초 단위인 가족과 관계된다. 현실의 지배 체제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와 대비되는 사탄의 나라로 판명되었다. 그렇다면 예수에게 가족 혹은 가족 제도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이를 위해 마르코는 ‘안과 밖’이라는 이분법을 도입한다. 예수의 어머니와 형제들은 집 ‘바깥’에 머문다. 반면에 집 ‘안’에는 예수의 제자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배치는 ‘내부인과 외부인’(4, 11-12)의 구분을 예비하는 동시에 누가 예수의 진정한 가족인가에 대한 답변을 준비한다. 그에 따르면 혈연 관계로 맺어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예수의 가족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기존의 전통적 질서와의 급진적 단절을 수반한다. 그것은 혈연적 유대와 가부장적 권위 대신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가족을 구성하는 새로운 조건으로 내세움으로써 팔레스타인 사회의 전통적 권위 구조에 도전한다. 이렇게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는 수평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권력을 중심으로 차별적 계층 구조화되어 있는 사탄의 나라와 구분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와 제자들이 머물고 있는 집은 교회, 새로운 이스라엘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상징한다. 앞 단락에서 선언된 새로운 이스라엘이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조직 원칙이 여기서 밝혀진 셈이다.

 

      이후 예수는 다시 호숫가로 물러 난다. 그곳에서 그는 제자들을 비유로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