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호숫가로 물러가셨다. 그러자 갈릴래아에서 큰 무리가 따라왔다. 또 유다와 예루살렘, 이두매아와 요르단 건너편, 그리고 티로와 시돈 근처에서도 그분께서 하시는 일을 전해 듣고 큰 무리가 그분께 몰려왔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이 당신을 밀쳐 대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려고, 당신께서 타실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그분께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으므로, 병고에 시달리는 이들은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또 더러운 영들은 그분을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소리 질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당신을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이르곤 하셨다.
예수님께서 산에 올라가신 다음,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가까이 부르시니 그들이 그분께 나아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르 3, 7-19)
갈릴래아 초기 사역의 마무리와 후기 사역의 시작
예수는 적대자들과의 다섯 차례에 걸친 긴 논쟁을 마치고 호숫가로 물러난다. 그들이 두려워서 회피한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언급했듯이 ‘나아감과 물러섬’의 패턴에 따른 장소의 이동이라 할 수 있다. 마르코는 극적 사건이나 대중들의 열광적 반응 다음에는 ‘광야’, ‘외딴곳’, ‘호숫가’ 등과 같은 한적한 장소로의 이동을 통해 성찰적 거리감을 확보하는 서술 전략을 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물러난 장소에서조차 예수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감추려 해도 숨길 수 없는 예수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호숫가는 예수가 네 명의 어부들과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은 장소이고(1, 16; 2, 15),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가르친 곳이며(4, 1), 수많은 이적과 기적들을 일으킨 장소이기도 하다(4, 35-41; 5, 1-2; 5, 21; 6, 31-32; 6, 45-52). 이번에는 이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찾아 모여드는 모습을 통해 기득권자들의 적대적인 반응과 상반된 대조를 이룬다. 또한 예수의 영향력이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1, 5)에 국한되었던 세례자 요한의 영향력을 능가할 만큼 확대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나열되고 있는 지역들 중에서 갈릴래아는 역사적 예수의 계시의 장소이자 그의 재림시 회합의 장소로 특권화된 위치를 차지한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갈릴래아의 남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유대인들의 본토였다. 유다의 남쪽에 인접한 이두매아는 헤로데 가문의 출신 지역이었고, 유대 동쪽 페레아 지역을 가리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요르단 건너편(트랜스요르단)은 사해나 요르단 강을 건너 닿을 수 있는 이방인들의 땅이었다. 티로와 시돈은 갈릴래아보다 훨씬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이곳 역시 이방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이 지역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장소들로, 마르코 복음의 예수는 이 지역들로 사역을 확장하게 된다.
이렇듯 사방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든 까닭은 그들이 예수가 “하시는 일”(‘행하신 큰 일’로 번역해야 한다)을 들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예수가 일련의 논쟁들을 통해 지상에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버림받은 자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인간이 인간의 죄를 용서할 수 있고 심지어 종교의 주인이라는 예수의 선언과 병자와 죄인을 용납하는 예수의 밥상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가져다준 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이야말로 그들에게는 복음이었던 것이다. 변두리의 종교적 지도자에 불과한 예수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드는 모습은 기성 종교인들과 종교적 제도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역으로 말해준다.
하지만 압착시킬 정도로 밀려드는 사람들 탓에 예수와 제자들은 피신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들은 거룻배 한 척을 마련하게 된다. 교회 혹은 설교단을 상징하는 배는 가르침의 수단(4, 1-2)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이방 지역으로 이동하는 교통 수단(4, 35-36)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편 사람들이 예수에게 몰려든 또 다른 이유는 병을 치유하는 그의 능력 때문이다. 당시 헬레니즘 문화권 사람들은 기적 능력자의 몸이나 옷에 손을 대면 그에게 내재되어 있는 능력이 전이 되어 병이 치료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르코는 이러한 통념을 예수의 신적 인간으로서 면모를 드러내는데 사용한다. 그래서 베드로의 장모(1, 30), 나병환자(1, 41),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7, 31-37) 그리고 벳사이다의 장님(8, 22-26) 등의 경우에 예수는 만짐을 통해 그들의 병을 치유하기도 하고, 또 혈루병 걸린 여인(5, 27-28)이나 겐네사렛에서의 병자들(6, 56)의 경우처럼 만져짐을 통해 병이 낫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이 단락은 갈릴래아 초기 사역(1, 14-3, 6)을 요약하는 한편, 갈릴래아 후기 사역(3, 7-6, 6a)의 서론 역할을 겸한다. 호숫가, 나아감과 물러섬, 은폐와 계시, 만짐과 만져짐, 침묵 명령과 메시아 비밀 등 다양한 모티브와 비유를 통해 내러티브의 통일성을 유지하면서 앞으로 방문할 사역 지역들의 나열이나 거룻배처럼 새로운 계기를 예비하고 있다. 이 요약 단락의 이중적 특성은 다른 차원에서도 발견된다. 대중들의 열광적 반응은 앞 단락에서 지배계층이 보여준 적대적 반응과 대비된다. 그러면서 이 단락에서 등장하는 많은 무리들(3, 7)은 점차 사도(3, 14) 그리고 가족(3, 35)으로 정제된다.
침묵 명령과 메시아 비밀 모티브
복음서 내에서 어떤 사람도 예수의 정체를 정확히 인식하지 못했던 반면, 더러운 영들은 그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매번 예수에 의해 침묵 당한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예수의 정체가 드러날 ‘때’가 아직 아니라는 것을 암시한다. 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모세의 현현을 체험한 후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9, 9) 그 사실을 비밀로 하라고 명령한다. 이 장면 역시 예수의 참 모습은 ‘시기’가 중요하다는 점을, 즉 그의 정체는 십자가의 부활을 통해서만 드러나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독일의 학자 빌헬름 브레데(Wilhelm Wrede)가 그의 저서 <메시아 비밀>(1901)에서 처음으로 이론화했고, 그 이후 메시아 비밀 모티브는 지금까지도 마르코 복음을 다룰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을 인정 받고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을 메시아로 인식하지 않았던 역사적 예수의 삶과 그의 부활을 체험한 공동체가 그를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한 신앙 사이에 놓인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마르코 복음 이전의 전승에서 이 모티브가 유래했고 마르코가 이것을 문학적으로 정교하게 다듬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의 중요성은 인정하면서도 모든 침묵 명령을 일괄적으로 메시아 비밀 모티브로 해석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가령 병 고침과 관련된 침묵 명령의 경우 금지 명령이 수반되지 않은 경우가 더 많으며(1, 29-31; 2, 1-12; 3, 1-6; 5, 25-34; 7, 24-30; 9, 14-27; 10, 46-52), 수많은 군중들에 의해 목격되었기 때문에 침묵 명령이 지켜질 수 없는 경우도 있고(2, 2; 3, 1-6; 5, 31; 9, 14; 10, 46) 또 실제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도 있다(1, 45; 5, 20).
이것은 메시아 비밀 모티브를 하나의 통일된 문학적 비유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발생한 이론상의 한계로 보이며, 차라리 그것을 다양한 비밀들의 복합체로 생각해 각각의 경우들을 나누어 해석할 필요가 있다. 가령, 제자들에 대한 침묵 명령(8, 30; 9, 9)은 제자들이 예수를 수난의 그리스도가 아닌 영광의 그리스도로만 받아들이려는 자세에 대한 비판의 의도로 사용된다. 이와 연관된 제자들의 몰이해 모티브(4, 13; 7, 18; 8, 17-21; 10, 35ff.) 역시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와 달리 비유들(4, 11-12; 4, 34)에 등장하는 비밀 모티브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의 정체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비밀이기 때문에 구분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은 마르코 복음의 청중은 더러운 영의 폭로에 의해서 그리고 그들의 신앙을 통해서 예수를 이미 하느님의 아들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당시 청중들에게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대신 마르코는 전승에서 발견한 비밀 모티브를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기제로 변형시킨다. 즉 마르코 공동체 내부에는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자들이 있었고, 그래서 마르코는 수난의 메시아를 비밀에 쌓인 진정한 그리스도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들을 상대화하려 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대안 공동체의 시작
호숫가에서 산으로 장소를 이동한 예수는 제자들 중 자신이 원하는 열둘을 세운다. 산은 고대의 상징 체계에서 흔히 우주의 중심(omphalos)을 나타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기원하고 그들의 신과 계약을 맺은 장소도 산이다(탈출 19, 3-6). 따라서 이 장면은 예수가 “신랑을 빼앗길 날”(2, 20)을 대비해서 그의 사명을 계승할 새로운 공동체를 조직하는 준비 단계로 볼 수 있다. 예수는 그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해서 새로운 정체성을 갖도록 하고,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4, 11)를 가르치고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6, 7)을 부여해 세상으로 파견하게 된다. 또한 예수의 새로운 대안 공동체는 기존의 친족 체계를 급진적으로 재조직화하게 될 것이다(3, 35).
예수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 중 특별히 열둘을 선택한다. 여기서 12라는 숫자 상징은 12부족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을 나타낸다. 하지만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은 2지파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열둘은 그 당시의 이스라엘을 나타낸다고 볼 수 없고, 예언서에 근거하여 종말의 때에 회복하게 될 새로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이사 49, 6). 앞에서 선포된 “하느님의 나라”(1, 15)에 거주하게 될 백성들이 이제 막 새롭게 조직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가 열둘을 따로 선택한 목적은 자신과 ‘함께 있고’ 세상으로 ‘보내기’ 위함이다. 예수와 함께 있다는 것은 그와 개인적 친분을 맺고 그의 가르침과 사역에 동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쫓아내기 위해 세상에 보내져야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의 정신을 계승해서 그의 지상 사역을 완수해야 할 의무와 책임을 갖는다. 이것은 예수 없는 예수 이후의 교회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다. 마르코는 복음의 선포와 더러운 귀신의 축출을 예수 사역의 핵심(1, 39)으로 보고, 그가 위탁한 이 사역(3, 14-15)을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계승(6, 7-13)하는 것을 교회 공동체가 완수해야 할 지상 과제로 삼은 것이다.
부름 받은 그 열둘
마르코는 예수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의 사역을 완수할 목적으로 세워진 열둘의 목록을 제시한다. 우선 흔히 “열두 제자” 또는 “열두 사도”라 부르는 집단이 마르코 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마태오의 표현이고, 후자는 루카의 지칭이다. 마르코 복음에는 “열두 제자”로 번역되어 있지만 실제로는“열둘” 또는 “그 열둘”로만 나타날 뿐이다(3, 14; 4, 10; 6, 7; 9, 35) 제자들의 목록에서도 차이점은 발견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천둥의 아들들’이라는 뜻으로 보아네르게스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그리고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르 3, 16-19)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마태 10, 1-4)
“그들은 베드로라고 이름을 지어 주신 시몬, 그의 동생 안드레아, 그리고 야고보, 요한, 필립보, 바르톨로메오, 마태오, 토마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 또 배신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루카 12, 14-16)
마태오와 루카 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의 순으로 되어 있지만, 마르코 복음에서는 ‘시몬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언급된 후에 ‘안드레아’가 호명된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의 스토리에서 이들 세 명이 차지하고 있는 특별한 지위와 연관이 있다. 이들 셋에게만 특별히 예수가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는 기적에 동참하도록 허락되며(5, 37),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의 환시를 목격할 특권이 주어지며(9, 2) 예수가 십자가에 오르기 전 겟세마니에 기도를 하러 갔을 때 동행한 이도 이들 셋이다(14, 32). 즉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예수의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선택된 열둘 내에서도 최측근에 해당하는 인물들이다.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는 제자들의 목록과 함께 ‘사도’라는 칭호가 등장하지만(마태 10, 2; 루카 6, 14) 마르코 복음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로 옮겨진 구절은 대다수의 사본들과 라틴어역과 시리아역에는 생략되어 있는 논쟁적인 문장이기 때문에 번역하더라도 별도의 표시를 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제자들 중에서 예수를 배신한 자가 있었던 것으로 최초로 서술한 마르코가 사도란 호칭을 생략한 것은 나름 합리적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마르코는 사도란 명칭을 제자들이 파견에서 돌아온 후 단 한 차례 사용하는데(6, 30), 바로 그 앞 단락에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다루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6, 17-29). 예수의 선구자인 요한의 죽음 다음에 ‘사도’ 칭호가 등장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예수의 사후 그를 계승해서 사역에 동참한 사람만이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다.
목록에서 가장 앞선 세 사람만이 별칭을 받는데,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에서 중요한 사람은 시몬과 유다이다. 이 단락 이전에 베드로는 한결 같이 ‘시몬’이라 불렸으나(1, 16, 29, 36). 이후에는 단 한 번만 예외로 하고 돌이나 바위를 뜻하는 ‘베드로’로 지칭될 것이다. 그 단 한 번의 예외는 그가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깊은 불신의 잠에 빠졌을 때이다. “시몬아, 자고 있느냐?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14, 37) 또한 그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등장하는 ‘돌밭’처럼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다(4, 5). 마르코 복음에서 돌이 상징하는 단단함과 굳음은 예수의 말씀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3, 5; 6, 52; 8, 17). 이와 대조적으로 마태오는 베드로의 이름을 홍수에도 무너지지 않는 반석 곧 교회의 굳건한 기초로 해석한다(마태 7, 24-27).
예수를 배반하게 될 제자 유다의 별칭은 그 기원이 불분명하다. ‘이스카리옷’을 “그리욧 출신의 사람”(사람을 뜻하는 ‘이스’와 지역 명칭인 ‘게리욧’이 결합된 형태)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암살자를 뜻하는 ‘시카리우스’에서 파생된 명칭으로 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승인 예수를 배반하게 된다는 사실을 새로운 공동체를 선언하는 자리에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르코의 의도는 분명하다. 교회 공동체가 극심한 박해와 핍박을 받고 있던 역사적 정황(13, 9-13) 속에서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를 경계하기 위해 유다라는 인물을 등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유다가 어떤 동기에서 예수를 배신하게 되는 지 분명하게 제시되고 있지는 않다. 단순히 돈 때문에 예수를 판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다가 먼저 돈을 요구하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는다(14, 10-11). 다만 베드로를 비롯한 열둘 모두 예수의 정체를 오인하고 그가 자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품고 있던 사실에서 유추해 보면, 유다의 배반은 예수에 대한 실망감에서 비롯된 우발적 행동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실제로 선택받은 열둘은 예수의 최후의 순간 그를 부인하거나 그로부터 도망친다는 점에서 그들 모두 배신자다. 즉 마르코는 그 열둘을 잠재적인 예수의 배신자로 설정했기 때문에 유다의 개인적 동기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수를 오인하고 부인한 것은 마찬가지지만 그 이후 한 사람은 교회의 반석으로 추앙되고, 다른 한 사람은 배신자로 저주 받는 치욕을 당하게 되는 차이는 어디서 생긴 것일까? 이것이 마르코가 그려내는 배신의 드라마가 숨겨놓은 또 다른 가르침이 아닐까.
[보충자료 #1] 예수 시대 팔레스타인 지도
[보충자료 #2] 마르코 복음의 문학적 구조
마르코 복음의 구조에 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아직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져 있지는 않다. 이 글에서는 갈릴래아와 그 주변 지역에서의 사역(1, 14-8, 26),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8, 27-10, 52) 그리고 예루살렘에서의 사역(11, 1-16, 8)으로 이루어진 3막으로 구성된 드라마로 다룰 것이다.
표제(1, 1)
서언(1, 2-13)
제1막 갈릴래아와 그 주변 지역 사역(1, 14-8, 26)
제1부 갈릴래아 초기 사역(1, 14-3, 6)
제2부 갈릴래아 후기 사역(3, 7- 6, 6a)
제3부 갈릴래아 주변 지역 사역(6, 6b-8, 21)
종결기적: 벳사이다에서 맹인을 고침(8, 22-26)
제2막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8, 27-10, 52)
제1부 카이사리아 필리피에서(8, 27-9, 29)
제2부 갈릴래아를 통과하며(9, 30-50)
제3부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10, 1-45)
종결기적: 예리코에서 맹인을 고침(10, 46-52)
제3막 예루살렘에서의 사역(11-16장)
제1부 예루살렘 종교 체제와의 충돌(11-12장)
제2부 예루살렘의 운명과 그 날(13장)
제3부 예수의 수난, 죽음, 부활(14-16장)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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