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16장- 비유로 가르치다 (1)

ddolappa 2016. 8. 13. 12:17

제16장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너무 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그분께서는 호수에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군중은 모두 호숫가 뭍에 그대로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게 가르치시면서 말씀하셨다. “자, 들어 보아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그가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에 떨어져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 어떤 것은 흙이 많지 않은 돌밭에 떨어졌다. 흙이 깊지 않아 싹은 곧 돋아났지만, 해가 솟아오르자 타고 말았다.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 것이다. 또 어떤 것은 가시덤불 속에 떨어졌는데, 가시덤불이 자라면서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져,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를 맺었다. 그리하여 어떤 것은 서른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백 배의 열매를 맺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셨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

 

예수님께서 혼자 계실 때, 그분 둘레에 있던 이들이 열두 제자와 함께 와서 비유들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이사 6, 9-10)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비유를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그러면서 어떻게 모든 비유를 깨달을 수 있겠느냐? 씨 뿌리는 사람은 실상 말씀을 뿌리는 것이다. 말씀이 길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들이 말씀을 들으면 곧바로 사탄이 와서 그들 안에 뿌려진 말씀을 앗아 가버린다. 그리고 말씀이 돌밭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들에게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말씀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지는 것은 또 다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이 들어가,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그러나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어떤 이는 서른 배, 어떤 이는 예순 배, 어떤 이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르 4, 1-20)

 

 

비유 해석의 어려움

 

      마르코는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만 예수의 긴 가르침을 들을 수 있는 부분은 이 곳(4, 1-34)과 13장(13, 1-37) 두 곳뿐이다. 따라서 이 단락은 ‘가르치는 자’로서 예수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 그 의미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를 대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비유를 사용했고, 그런 점에서 예수의 비유들은 그가 선포한 핵심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내러티브 차원에서 비유들은 마르코 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신학자 톨벗(Tolbert)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12, 1-12)와 함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등장 인물들의 “주된 행동들의 요약 혹은 개요”를 제공하기 때문에 마르코 복음서 전체의 구조와 전개를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단락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해석적 난제들을 제기한다.

 

      가장 큰 원인은 예수가 비유를 말한 역사적 정황이 망각된 사실에서 비롯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설은 흔히 초대 교회의 해석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교회에서 복음을 뜻하는 전문용어인 ‘말씀’이 사용되었고, 바오로의 서신에서 흔히 발견되는 낱말들이 쓰였다는 점에서 그렇다. 무엇보다 예수는 선포 활동을 파종이 아닌 추수에 비유했다는 점에서 그의 어법과 일치하지 않는다(마태 9, 37-38; 루카 10, 2; 요한 4, 35. 38). 그 결과 비유에 대한 해석은 원래의 비유가 갖고 있는 종말론적 핵심을 놓친 채 심리적이고 교훈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이사야서를 인용한 부분은 역사적 예수의 사역과 비유 본래의 성격과도 어긋난다. 세상을 구원하러 온 예수가 사람들이 구원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를 사용했다는 것은 매우 부자연스럽다. 또한 이 구절은 예수가 대중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4, 33) 비유를 말했다는 부분과 모순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마르코가 비유의 기능에 대해 자가 당착에 빠져 있다고 비난하기조차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비유에 등장하는 어떤 요소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한다. “씨 뿌리는 자”를 중심으로 볼 경우 비유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 활동의 미진한 성과에 대한 변호이자 그의 사후 전도자들에 대한 격려로 해석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씨 뿌리는 자가 비유의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란 점에서, 그리고 비유를 복음서의 맥락에서 분리시켜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또 “씨”나 씨가 뿌려진 “땅”을 중심으로 해석할 경우 비유는 교회 안에서 말씀을 듣는 신자들에게 적용되는 교훈이 되어버린다. 이 경우 본래의 비유가 갖고 있는 묵시론적 차원은 무시된다. 마지막으로 비유에서 거두어 드리게 될 수확에 초점을 맞출 경우 비유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도래하게 될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성취로 해석된다. 그러나 종말론을 해석의 열쇠로 삼은 이러한 해석은 앞의 다른 해석들과 마찬가지로 비유에서 개별적 요소에 초점을 맞춘 알레고리적 해석이란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예수의 비유를 알레고리가 아닌 “이야기(narrative)로 확대된 은유(metaphor)"로 읽으면서도, 그것이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 속에서 차지하고 있는 연관성을 놓치지 않고 해석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이 글에서는 예수의 비유가 그의 당대는 물론 40여 년의 세월이 지나서 그의 비유를 듣는 마르코 복음서의 청중들에게 호소력을 지닌 이유가 비유에 담긴 현실적 묘사에 있다고 판단하고, 1세기 경 갈릴래아 농민들의 삶을 비유 해석의 출발점으로 삼을 것이다. 다시 말해 기존 해석에서 도외시되고 있는 비유를 들었던 청중들의 역사적 현실에서 출발해서 비유가 담고 있는 새로운 층위를 탐구하는 것이 이 글의 목표다.

 

 

땅은 하느님의 것

 

      유대와 갈릴래아의 농부들은 그들의 하느님이 가나안 지역에서 이방 민족들을 내쫓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된 땅을 주실 것을 믿고 있었다. 그 땅은 이집트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키면서 그들에게 주기로 계약을 맺은 땅이었다(탈출6, 4; 민수33, 53; 신명 17, 14).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땅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것(창세 35, 12; 레위 25, 23)이며, 그들은 다만 하느님으로부터 경작할 권리를 갖고 있을 뿐이었다(레위 25, 23). 그들이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한, 그들은 땅으로부터 충분한 양식을 거두어 부족함이 없을 것이며(레위 25, 19; 신명 8, 9-10; 시편 85, 12), 땅은 영원히 그들과 그들의 후손의 것이 될 것이었다(창세 48, 4; 신명 1, 8).

 

      하지만 주후 1세기 경 농민들이 경험한 현실은 착취와 수탈로 얼룩진 냉혹한 현실이었다. 주전 63년에 로마의 식민지로 편입되면서부터 농민들에 대한 착취는 더욱 극심해졌다. 그 이전에는 하스몬 왕가의 대제사장의 통치만 받으면 됐다면, 이제는 3중의 지배자들로부터 경제적 수탈을 당해야 했다. 즉 농민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십일조와 성전세를, 로마인들에게는 조공을, 헤로데 안티파스와 같은 분봉왕에게는 세금을 바쳐야 했다. 여기에 안티파스는 예수의 고향 근처에 있던 도시 세포리스를 재건하고, 가파르나움과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에 로마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티베리아스를 건설하며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가중시켰다. 지역 귀족들, 헤로데 당원 그리고 성전 사제들과 같은 지배 엘리트들은 헬레니즘식으로 건설된 도시에 거주하며 부재지주로서 소작농으로 전락한 농민들로부터 막대한 지대를 거두어드렸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여건 속에서 농민들은 작황이 아무리 좋은 해였다 해도 가족들을 부양하고 동시에 세금을 납부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다수의 농민들은 다음 해의 수확을 담보로 대부를 받아 그 다음해까지 버티기는 했지만, 그 다음해 더욱 크게 늘어난 빚더미 때문에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팔고 소작농이 되거나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좋은 땅은 도시의 지배층에게 빼앗기고 그나마 농민들이 소유할 수 있었던 땅은 가시와 돌로 뒤덮인 땅이거나 길가에 버려진 땅이었다.

 

      요세푸스의 저술과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은 갈릴래아의 저지대인 기살라(Gischala), 남부 지역인 베스 쉬아림(Beth Shearim), 그리고 세포리스 등지에 로마에 조공으로 바칠 곡물이 저장된 수많은 저장시설과 보관실이 있었다고 보고한다. 이미 헤로데 대왕은 로마와의 무역과 상품의 유통을 원활히 하기 위해 선박 100 여척이 정박할 수 있는 대규모의 항구 도시 카이사리아를 건설하는 한편 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를 건설해 갈릴래아 전역을 네트워크화했다. 농민들은 조공, 세금, 지대를 현물로 바쳐야 할 경우 이 도로를 이용해 운송했고, 돈으로 지불하도록 요구될 경우 이 도로를 이용해 지역 시장에 가서 곡식을 내다팔아야 했다. 따라서 수확을 거두고도 생산된 곡식을 도로를 이용해 지배계층의 수중에 고스란히 넘겨주어야만 했던 농민들에게 도로는 경제적 착취와 억압의 상징으로 받아드려 질 수 밖에 없었다.

 

      로마의 식민 통치는 땅은 하느님의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전통 관념에도 도전했다. 소위 ‘황금 시대(aurea aetas)'라 불리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주조된 화폐는 땅에 대한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일단을 보여준다. 중앙에 로마 황제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옥수수 다발로 장식된 이 동전은 수확물과 땅의 주인이 황제라는 프로파간다를 선전했다. 그러나 자신의 백성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는 황제의 나라에서 유대와 갈릴래아의 농민들이 실제로 마주하게 된 현실은 끝없는 착취로 빈곤의 나락에 떨어져 버린 피식민지인의 삶이었다.

 

      신학자 예레미아스는 많은 씨가 유실될 정도로 서툴게 뿌려진 씨들은 밭을 갈기 전에 파종을 하던 팔레스타인의 농경 문화를 반영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반영된 사실주의는 1세기 경의 농경 문화가 아니라 그 비유가 말해진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현실이라는 것을 그는 주목하지 못했다. 1세기 갈릴래아 농민의 시선으로 비유를 다시 읽을 경우 씨가 잘못 뿌려진 길, 돌밭, 가시덤불은 그들이 일상에서 마주해야 했던 참혹한 식민지 현실임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한 핵심 메시지는 로마 황제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를 날카롭게 대조시켜 보다 많은 대중들이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를 독려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황제의 나라 VS 하느님의 나라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구전 설화의 어법에 따라 구조화되어 있다. 비유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 그룹과 열매를 맺는 씨 그룹으로 차이와 대조를 이룬다(대조의 법칙). 세 번에 걸친 실패와 낭비에 대해 언급한 뒤 세 번에 걸친 성공과 결실에 대해 언급된다(3의 법칙). 실패한 씨들은 단수로 표현되고 성공한 씨들은 복수로 표현되어 성공한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이 암시된다. 하지만 씨를 모두 복수 형태로 표기한 마태오 복음(마태 13, 1-9)이나 모두 단수 형태로 표시한 루카 복음(루카 8, 4-8)은 두 그룹 간의 대조를 사상시킨 대신 실패한 세 경우와 성공한 한 경우로 이루어진 네 가지 타입으로 씨들을 유형화하고 있다.

 

      하지만 설화적 형식 안에는 날카로운 현실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길’은 농민들이 수확한 곡물이 수탈당할 때 사용된 수단으로 경제적 억압과 착취를 상징한다. ‘새’는 로마군의 상징이었던 독수리를 가리킨다. ‘가시덤불’은 사악한 자를 가리킬 때 사용된 은유(민수 33, 55; 시편 118, 12;에제 2, 6)로 성전 사제들을 상징한다. 로마 제국, 헤로데 가문 그리고 성전 사제들에게 착취당한 결과 농민들에게는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돌’로 뒤덮인 땅만 남게 된다. 풍요로움을 약속하는 로마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는 갈릴래아의 농민들에게 수탈과 그로 인한 빈곤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로마 황제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를 선명하게 대조시킴으로써 농민들의 현실 인식을 날카롭게 하는 한편, 자신이 선포한 하느님 나라 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비유의 문맥 상 위치를 고려할 때도 설득력이 있다. 바로 앞 단락에서 예수는 산에 올라 새로운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선발했다. 그런 다음 호숫가로 내려와 모여든 군중 앞에서 일종의 취임 연설로 설파한 것이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이다. 따라서 예수는 자신의 공생애를 시작한 순간부터 줄곧 선포해왔던 ‘하느님의 나라’(1, 15)가 현실의 지배적 질서와 어떻게 다른가를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각인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를 따르던 대다수의 무리가 갈릴래아의 가난한 농부들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그들의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식민지적 착취의 현실을 투영시킨 수사적 전략을 구사한 것은 매우 효과적인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나타난 다양한 현실적 주제들은 이후 전개되는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에 다시 등장한다. 반로마적 경향은 게라사인 지방의 광인 이야기(5, 1-20),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문제(12, 13-17), 그리고 로마 백인대장이 황제가 아니라 예수를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는 장면(15, 39) 등이 그 예이다. 헤로데 왕에 대한 비판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다루는 이야기에서 다루어진다(6, 14-29).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비판은 성전 정화 사건(11, 15-19), 가난한 과부의 헌금(12, 41-44) 그리고 성전 파괴 예고(13, 1-2)에서 나타난다. 부재지주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12, 1-12)에서 등장한다.

 

 

하느님 나라에 참여한다는 것

 

      그렇다면 대다수 학자들의 주장처럼 예수의 비유가 탄생한 역사적 맥락을 마르코가 전혀 몰랐기 때문에 비유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을 해야만 했던 것일까? 비유가 놓인 전후 맥락은 예수의 현실 인식을 마르코 역시 공유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예수가 활동한 주후 30년경과 마르코가 복음서를 집필한 주후 70년경의 역사적 현실이 대다수 농민들에게 크게 다르지 않게 경험되었을 게 분명하다는 점에서 기존의 주장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예수의 비유에 대한 마르코의 알레고리적 해석에는 다른 의도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예수의 비유에서 해명되어야 할 또 다른 요소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들이 거두게 될 ‘서른 배, 예순 배, 열 배’의 수확이다. 이런 성과를 당시의 농업 생산성에 비추어 평가하거나 다가올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성취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나라의 현재성을 도외시한 해석이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앞으로 올 나라이자 이미 와 있는 나라이다(1, 15). 언제 도래할 지 모를 나라를 위해 농민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다면 기존의 메시아운동과 예수 운동은 차별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의 사역은 현실에 잠재해 있는 하느님 나라를 사람들이 경험토록 했다는 점에서 현실성을 획득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에 동참함으로써 거두게 될 놀라운 성과는 기약 없는 미래의 덧없는 희망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현재 경험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과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가장 쉬운 답변은 비유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농민들이 조공과 세금의 명목으로 거두어 들이는 끊임없는 수탈로 인해 가난해진다면, 그러한 불의한 세력들이 사라지게 되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실제로 주후 6년 갈릴래아 사람 유다는 조세를 위한 키리니우스의 호구 조사에 저항하는 운동을 펼쳤다가 죽음을 당했다(사도 5, 37). 그 후 주후 66년 여름에 이 조세정책에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무력 혁명운동은 유대와 로마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바로 이 전쟁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는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가 그러한 사실을 몰랐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불합리한 조세 정책에 무력으로 투쟁하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코는 예수의 비유를 무력 투쟁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막기 위해 비유의 처음과 끝에 올바르게 이해할 것을 당부하는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자, 들어 보아라.”(3절)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9절)는 구절은 바로 그러한 주의의 표시이다.

 

      마르코는 이러한 조치만으로 부족하다고 느꼈던 것인지 예수의 비유에 대한 해석을 덧붙인다. 이 해석은 예수의 비유가 남긴 질문의 공백을 보충한다는 점에서 보완적이다. 즉 예수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이 놀라운 성과를 가져올 것이라 약속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에 침묵한다. 비유에 대한 해석은 이 질문을 제자도의 문제로 전환시켜 답변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에 동참한다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이고, 따라서 예수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태도와 자세에 따라 성과가 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유에 등장하는 요소들을 유형화해서 복음서의 등장인물들로 극화하는 서술 전략을 선택한다. 이러한 전략으로 인해 청중들은 간명하고 기억하기 쉬운 비유들을 회상함으로써, 복음서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각각의 이야기가 전달하는 메시지를, 그리고 각각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요지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비유에 등장하는 씨를 인물로 유형화시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길에 뿌려진 씨 유형

 

      이 유형은 말씀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그 말씀이 제거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것은 그 사람이 처음부터 말씀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가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율법학자들, 헤로데 당원들, 바리사이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완고한 마음’의 소유자들로 예수를 적대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죽일 음모까지 꾸몄다(3, 6). 그들은 사탄의 편에 서 있는 자들이자(3, 20-30)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자들이다(7, 13).

 

      이 유형에 해당하는 또 다른 인물들로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이 있다(8, 31). 그들은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14, 1) 궁리를 했으며, 유다 이스카리옷을 매수해 예수의 살인 음모를 진행시켰고(14, 10-11) 결국에는 그를 체포해서 심문하고(14, 53-64) 십자가 사형을 관철시켰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 역시 이 유형에 해당한다. 그들은 예수의 가족 배경을 근거로 그를 판단하고 결국은 그를 배척했다(6, 3).

 

(2) 돌밭에 뿌려진 씨 유형

 

      이 유형의 인물은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환란이나 박해를 당하면 ‘곧’ ‘넘어지고’ 만다. 여기에 해당하는 인물은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들은 예수의 부름에 ‘곧바로’ 그를 따라나섰지만, 예수의 예언처럼 시련이 닥쳐오자 ‘곧’ ‘넘어지고’ 만다(14, 27. 29). 그들은 예수가 체포되자 모두 그를 버리고 달아난다(14, 50). 심지어 그 가운데 한 사람은 몸에 둘렀던 “아마포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나기조차 한다(14, 52). 특히 베드로는 다른 모른 사람들이 예수를 버릴지라도 자신은 그렇지 않겠다고 호언장담했지만(14, 29) 나중에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한다(14, 66-72). 베드로라는 이름이 ‘바위’나 ‘돌’을 뜻하는 단어 ‘페트라’에서 온 것 역시 그가 이 유형의 대표적 인물임을 시사한다.

 

(3)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 유형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한 자를 가리킨다. 대표적 인물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예수에게 왔다가 재물에 대한 욕심과 염려 때문에 예수를 따르지 못한 부자 청년(10, 17-22)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10, 22) 이 구절을 들은 청중은 부자 청년이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에 해당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쉽게 기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유형에 해당하는 또 다른 인물은 빌라도이다. 그는 처음에 예수를 옹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군중에 대한 두려움과 자신의 지위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예수를 십자가에 넘겨 주고 만다(15, 15).

 

      헤로데 안티파스 역시 이 유형에 해당하는 인물로 볼 수 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보호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기꺼이 듣곤” 한 것으로제시된다(6, 20). 하지만 그는 그와 동생의 아내였던 헤로디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의 요청에 못이겨, 그리고 자신의 체면을 지키기 위해 요한의 처형을 허락한다. 비유에서 말하는 말씀은 예수의 말씀이기 때문에 세례자 요한의 말을 달게 들은 헤로데는 이 유형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에서 요한은 예수의 운명을 예시한다는 점에서 이 둘을 동일시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전적으로 잘못된 유형 분류로 볼 수는 없다.

 

(4) 좋은 땅에 뿌려진 씨 유형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듣고 결실을 맺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 유형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그것이 ‘좋은’ 땅이기 때문이다.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것 외에 그 땅이 결실을 맺기 위해 행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좋은 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는 현재 시제로 표시된 반면, 나머지 다른 세 종류의 땅은 단순 과거 시제로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말씀을 반복해서 지속적으로 듣는 사람임을 시사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이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 혹은 능력을 믿고 받아들여 치유의 이적을 경험한 자들이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기적 이야기의 특징은 예수의 기적 행사가 사람들에게 믿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어떤 사람에게 믿음이 있을 때 예수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6, 5). 따라서 치유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은 ‘좋은 땅’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에 해당하는 인물들로 혈루병 앓는 여인(5, 25-34),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7, 24-29), 소경 바르티매오(10, 46-52) 등이 있다.

 

      하지만 결실을 맺기 위해서 사람의 믿음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은 것은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은혜를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기 때문이다(1코린 3, 7).

 

      이러한 유형화 작업에서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은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대부분 사회적 소외 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씨들은 대부분 사회적 지도층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현실의 권력 관계가 전도된 세계임을 암시한다. 예수는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 35; 10, 31. 43)고 말했데, 이것에서도 현실 비판적인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을 따름으로써 얻게 되는 보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10, 29-30) 여기서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 배”나 받게 될 것이라는 진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집과 토지와 같은 재물은 배로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가 백 배로 늘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것은 예수를 중심으로 관계를 맺은 수평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집과 토지의 증가 역시 개인 재산의 증가가 아니라 공동체의 확대를 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비유에서 말한 30배, 60배, 100배에 이르는 수확의 기적은 30명, 60명 그리고 100명으로 성장해 나갈 제자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비유로 되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하느님 나라에 참여함으로써 거두게 될 풍요로운 결실이 조세에 대한 무력 투쟁으로 쟁취된 것도 아니고 미래에 받게 될 보상도 아니라면 현실에서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유일한 가능성은 수탈 당하고 남은 곡식과 식량을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웃과 나눌 때뿐이다. 그 유명한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함께 나누면서 일어났다(6, 35-44). 사천 명을 먹인 급식 기적 역시 사람들에게 있던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함께 나눔으로써 일어났다(8, 1-10). 따라서 예수가 말한 풍요로운 결실은 가난한 자들의 연대와 상호부조를 통해 가능한 것이다. 서로의 죄를 용서하고 받아들임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하느님일 수 있듯이 비록 넉넉하지 못한 물질이더라도 서로 나눔으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물질적 축복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연대해 서로의 생명을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예수가 비유를 통해 대중들에게 궁극적으로 전달하고자 했던 핵심적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제자 공동체를 통해 성장하고 실현된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