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예수님께서 또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낮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 4, 21-34)
마르코 복음 4장의 문학적 구조
텍스트의 구조를 살피는 일은 그 텍스트의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작업 중 하나다. 특히 비유들의 집합체인 마르코 복음 4장의 경우 복잡한 문학적 구조는 그 난해성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기 때문에 4장 전체의 서술 구조에 대한 조망은 요긴한 해석학적 단서를 제공한다.
A. 서사적 도입(1-2절)
B.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3-9절)
C. 비유의 방법에 대한 일반 진술(10-13절)
D.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설(14-20절)
C‘. 비유의 방법에 대한 일반 진술(21-25절)
B'.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26-32절)
A'. 서사적 결론(33-34절)
우선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4장 전체가 마르코가 즐겨 사용한 서술기법인 샌드위치 구성(인클루지오)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예수가 호숫가에서 배를 타고 무리들에게 비유로 가르친 이야기(1-9절, 26-34절)는 예수가 혼자 있을 때 그의 제자들에게 비유를 설명한 이야기(10-25절)를 감싸고 있다. 앞에서 샌드위치 구성 기법이 사용된 이야기들, 가령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축축할 사건(1, 21-28), 중풍 병자를 고친 사건(2, 1-12), 베엘제불 논쟁(3, 20-35) 등이 같은 시간과 같은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이 단락에서는 상이한 시간과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사건들이 결합되어 있다. 동시에 예수가 대면하고 있는 청중 역시 각각 호숫가에 모인 무리와 예수를 따르고 있는 제자들로 구분된다. 이처럼 시간과 장소, 심지어 청중에 구애 받지 않고 서로 다른 두 이야기들을 결합해서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앞으로 등장할 이야기들에도 사용되므로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이미 이전에 발생한 사건인 세례자 요한의 죽음(6, 14-29)은 플래시백 기법으로 예수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한 이야기(6, 7-13. 30) 사이에 삽입되어서 그의 제자들 역시 요한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특히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한 해설은 몇 겹의 인클루지오 구조로 둘러싸여 있다. 11절에 사용된 단어 “신비”는 22절의 “숨겨진 것”과 “감추어진 것”과 상응한다. 또한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제자들에게 주어졌다는 11절은 가진 자는 자는 더 받게 된다는 25절과 대구를 이룬다. 그리고 소수의 내부인을 향한 발화의 시작을 알리는 기호인 “그들에게 대답하셨다”(11절)는 구절은 13절, 21절, 24절에 반복적으로 사용되어 전달되는 가르침의 은밀성을 강조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문학적 구조는 비유에 대한 해설이 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은밀히 전달되는 비밀스런 지식임을 암시하며 예수 공동체에 속한 내부인과 그 바깥에 있는 외부인의 경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미 앞 단락에서 마르코는 하나의 집을 중심으로 그 안에 있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내부자들로, 그리고 집 밖에 있는 자들을 외부자들로 구분했다. 집 안에 있는 내부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3, 35)로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가족들이다. 그들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4, 11)가 주어진다. 반대로 집 밖에 있는 사람들인 외부자들은 예수의 선포와 축귀를 통해 구현되는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들로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4, 11) 따라서 예수의 공동체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하며, 또한 예수의 말씀을 올바로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들을 귀”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즉 예수의 비유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로 다가올 지 아니면 이해하지 못할 수수께끼로 받아들여질 지는 전적으로 듣는 사람의 이해 능력에 달려 있다.
듣는 행위의 중요성은 본문 전체에 ‘듣다’라는 용어가 압도적인 빈도(12회)로 사용된 사실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비유 중의 비유인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역시 시작과 끝에 배치된 ‘들어라’는 명령을 통해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4, 3. 9). 이것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이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 역시 이해할 수 없다는 점(4, 13)에서 다른 비유들을 이해하도록 안내하는 비유이자 듣기에 관한 비유임을 시사한다. 따라서 이 단락 전체의 핵심은 예수의 비유를 어떻게 듣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유를 듣는다는 것
‘듣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샤마아’와 그리스어 ‘아쿠오’는 폭넓은 의미망을 갖고 있다. 즉 듣는다는 것은 1) 소리를 듣는 것 2) 한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 3) 의미를 파악한다는 의미에서 이해한다는 것 4) 알아본다는 것 5) 식별한다는 것 6) 주목한다는 것 7) 말한 것에 동의하거나 받아들인다는 것 8) 순종한다는 것 등의 뉘앙스를 지닌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를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말해지는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의미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따르는 행위를 포함한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믿음이란 신앙의 대상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행위까지 포함하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를 ‘듣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과 의지만으로는 부족하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다”(4, 11)는 문장은 신적 수동태로 쓰였고, 이것은 그 나라의 신비가 하느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사실이 암시한다. 다시 말해 비유의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특별한 은총이 필요하다. 또한 여기서 ‘신비’는 감추어진 은밀한 비밀이 아니라 계시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되고 있다. 그렇다면 문맥상 이 문장은 예수의 사역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계시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의 비유를 듣는다는 것은 예수의 사역을 이해하고 그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한 활동이다.
그러면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그의 비유들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이후에도 빵이 부족하다고 수군대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꾸짖는다.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8, 18) 예수는 4장 12절에 인용된 이사야서의 구절을 그대로 사용해 제자들을 비난한다. 이것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의 사역은 물론 비유의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
오히려 예수의 적대자들은 예수의 비유가 지시하는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수의 권한을 문제 삼는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예수는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를 통해 대답한다. 그들은 “자기들을 두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알아차리고 그분을 붙잡으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12, 12) 그대로 두고 떠나간다.
이 맥락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내부자와 외부자의 구분이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주변 사람들과 제자들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계시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분명한 깨달음이나 이해를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예수의 적대자들처럼 비유의 의미와 의도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예수의 비유는 듣는 사람이 기대되는 반응을 보일 때만, 즉 회개하고 돌아와 하느님 나라에 참여할 때만 성공적인 청취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성공적인 듣기의 사례로 예리코의 눈먼 거지 바르티매오(10, 46-52)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길가에" 앉아 있다가 예수가 제자들과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예수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한다. 다시 볼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청원을 예수가 들어주자 그는 예수를 따라 "길"을 나서게 된다. 바르티매오는 눈이 멀었지만 예수의 정체를 올바로 보았고 그의 사역을 제대로 들었다(이해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길", 즉 예루살렘을 향한 죽음의 길에 기꺼이 동참한 것이다. 그는 비유에서처럼 "길가에" 뿌려진 씨앗이었지만 성공적인 듣기를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마르코가 인용한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봄'과 '들음'의 모티브는 이후 전개되는 내러티브에서 특히 제자직의 문제와 결부되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미 예수의 세례 체험(1, 10-11)에서 사용된 이 모티브들은 제자들의 신비 체험(9, 2-10)에서도 사용되고, 제자들의 실패에 대한 예수의 분노를 표현할 때도 사용된다(8, 17-18). 벳사이다의 장님 이야기(8, 22-26)와 예리코의 장님 이야기(11, 46-52)가 '눈뜸'을 주제로 한다면, 귀먹고 말 더듬는 이와 벙어리를 치유한 이야기들(7, 31-37; 9, 14-27)은 '소리'의 되찾음을 주제로 한다.
예언자의 바판적 도구로서 비유
여기서 하나의 질문이 다시 제기된다. 예수가 비유를 사용한 목적이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는 진술은 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이 문장은 인류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예수의 사역과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의 비유는 많은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어울리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선 인용된 이사야서의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주전 740년경 우찌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는 예언자로 소명 받는다. 왕의 영적 타락으로 상징되는 백성들의 불신앙과 죄악을 일깨우기 위해 이사야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 속에 마르코가 인용한 구절이 들어 있다.
"너는 가서 저 백성에게 말하여라.
'너희는 듣고 또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마라.
너희는 보고 또 보아라. 그러나 깨치지는 마라.'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이사 6, 9-10)
이사야가 백성들이 회개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이러한 선포를 했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만일 정말 그런 의도가 있었다면 가장 손쉬운 방법은 선포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사야는 이런 단호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듣는 자'를 찾고 '제자들'을 모은다(이사 8, 16-18). 따라서 예언자적 선포의 본래적 의도는 앞으로 일어날 불행한 심판에 대한 경고이자 죄의 상태에서 벗어나 회개를 촉구하는 초대이다. 이사야의 이 구절은 예레미야(5, 21), 에제키엘(12, 2), 즈카르야(7, 11) 등의 예언서들에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사람들이 듣지 않으리라는 예상에도 불구하고 심판에 대한 경고와 구원에의 희망이 동시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 예언자들의 사명이었음을 가리킨다.
이런 맥락에서 마르코가 이사야를 인용한 의도는 예언자로서 예수의 면모를 부각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예수는 구약의 다른 예언자들처럼 신의 심판과 구원을 고지하기 위해 지상에 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메시지는 오랫동안 고대하던 그 나라가 이미 도래했다는 것이어서 그들과 구분된다. 마태오가 예수를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 9)로 평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이사야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제공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사야는 타락한 백성들 중에 남아 있는 경건한 사람들을 "거룩한 씨앗"(이사 6, 13)으로 상징했다. 이사야는 이러한 "남은 자들"(이사 1, 9; 10, 20-22)을 모으는 활동을 '씨 뿌리기'나 '나무 심기' 등으로 은유했다(이사 5, 1-7; 40, 24; 60, 21; 61, 3). 즉 씨란 '들을 귀' 있는 자들이며, 씨 뿌리기란 백성들을 구원하는 하느님의 활동이다.
마르코 복음 4장이 참조하고 있는 또 다른 레퍼런스는 에제키엘 17장이다. 에제키엘 17장은 '반항의 집안'으로 상징되는 불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 경고하기 위한 비유와 그것에 대한 설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마르코 복음 4장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그것에 대한 해설로 이루어진 것과 유사하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에 등장하는 향백나무 비유(4, 32)는 에제키엘(17, 22)에도 등장한다.
에제키엘서의 중요성은 마르코 복음에서 비유가 사용되는 방식에 대한 이해의 단서를 제공한다는 데 있다. 에제키엘에서 비유는 '반항의 집안'인 이스라엘 백성들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며(에제 17, 2; 24, 3), 사람들은 예언자를 "비유나 들어 말하는 자"(에제 21, 25)로 조롱한다. 마르코 복음에서도 비유는 적대적인 상황에서 사용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를 "베엘제불이 들렸다"고 비난했을 때 비유가 처음으로 사용되었다(3, 23). 예수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과 조상들의 전통에 관한 논쟁을 벌인 후에도 비유를 사용했다(7, 1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의 권한을 문제 삼을 때도 예수는 비유로 답했다(12, 1). 마르코 복음 4장에서 비유가 사용되는 정황 역시 바로 그 앞 단락의 베엘제불 논쟁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임을 감안하면, 이 모든 상황은 비유가 예언자의 비판 수단임을 증명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떻게 오는가
마르코는 등불을 예로 들어 예수의 비유 일반에 대한 성찰을 전개한다. 여기서 '가진 자는 더 갖게 되고 못 가진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는 구절(4, 24-25)은 흔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진다'(4, 11)는 구절과 연관되어 해석되어 왔다. 즉 "들을 귀 있는 사람"(4, 9)은 비유에 대한 더 많은 이해가 가능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더욱 이해할 수 없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 앞에 이 구절을 삽입한 마태오가 제시한 해석에 근거한 것이다(마태 13, 12).
그런데 "너희는 새겨들어라"는 명령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동일한 표현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의 누룩을 경고할 때(8, 15), 율법 학자들의 위선과 탐욕을 경고할 때(12, 38) 그리고 전투적 민족주의자들의 거짓 프로파간다를 경고할 때(13, 5. 9. 23. 33) 사용되었다. 즉 이 표현이 사용된 다음에는 주의해야 할 대상이 나온다. 따라서 이 구절은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세상의 법칙을 주의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해석은 함지 비유와도 조화를 이룬다.
함지는 곡물을 재는 도량형으로 십일조를 계산하는 데 꼭 필요했기 때문에 유대의 가정에는 반드시 비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이 함지를 등불을 끌 때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등불을 등경 위가 아니라 함지나 침상 밑에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이것은 현실의 경제적 원칙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는 현실주의자의 눈에 구체성이 결여된 비현실적 주장으로 비추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부지하는 것도 어려운 형편에 놓인 농부들에게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웃까지 보살펴야 한다는 주장이나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통해 하느님 나라를 성취할 수 있다는 제안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을 지 의문이다. 예수는 바로 이러한 현실주의자들의 회의와 냉소에 반박한다.
그렇다면 하느님 나라는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이 질문에 대답한다. 이 비유에서 농부의 수동성은 땅의 능동성과 대조를 이룬다. 농부는 땅에 씨를 뿌리는 수고만 했을 뿐 씨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은 채 평범한 일상을 영위한다. 하지만 땅은 농부와 무관하게 씨앗의 성장을 멈추지 않고 도와 마침내 열매를 맺도록 한다. 이 비유는 제자들의 소명이 추수를 촉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씨를 뿌리는 것에 있을 뿐이며 그 씨앗을 성장 시키는 것은 오직 하느님의 일(1코린 1, 7)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석할 경우 이 비유는 인위적이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추수의 시기를 앞당기려는 젤롯파의 열광주의나 현실주의자들의 불신앙적인 냉소주의에 대한 부정으로 읽힌다.
요엘서에서 인용한 낫과 수확의 은유(요엘 4, 13)는 묵시론적 심판을 연상시키지만 그것이 폭력적인 정의의 추구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 비유의 핵심은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저절로" 온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예수의 "도전적이기까지 한 태평스러움"이야말로 비관적 현실주의에 대한 해독제로 제시된다.
이 대목에서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 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오는 것이지만 최소한 씨를 뿌리는 단계와 수확의 단계에서는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씨앗을 성장시키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몫이지만 등불을 함지 속에 넣어둘 경우, 즉 인간이 그 가능성을 완전히 부정할 경우 그 나라는 더디 오거나 아예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이것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가 인간의 노력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며 또한 현실에 숨겨지고 감추어진 것이지만, 인간의 선택과 참여를 통해 경험될 수 있는 것임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하느님 나라는 마치 예수의 비유를 듣는 것과 같다. 인간이 비유를 듣기로 선택할 때 그것의 진리가 인간에게 계시될 가능성도 열리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비유의 진리는 '들을 귀'를 기다리며 숨겨진 채 존재한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비유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참여와 협력을 필요로 한다. 이미 가능성으로 현존하는 그 나라에 인간이 참여할수록 그 나라는 더욱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황제의 나라인가 하느님의 나라인가
겨자씨의 비유는 흔히 크기의 대조를 중심으로 해석된다. 즉 어떤 씨앗보다 작은 겨자씨가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초기의 미약한 사역이 훗날 크게 성공을 거두리라는 예수의 신념을 피력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당시 청중들의 문화적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해석이다.
만일 갈릴래아의 농부가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는 예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면, 그는 충격과 경악에 휩싸여 예수에게 항의했을 것이다. 예수는 거룩하고 신성한 하느님의 나라를 논에 돋아난 잡초 따위에 비유했기 때문이다. 씨앗은 작지만 성장하면 2m 가량의 크기로 자라는 겨자는 일단 심겨지면 제거가 불가능할 정도의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그래서 레위기의 성결법전을 정교하게 다듬은 유대교의 미쉬나는 정원에 겨자씨를 뿌리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따라서 농부들에게는 제거하기 어려운 잡초이자 성결법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식물인 겨자를 하느님 나라에 비유한다는 것은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유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레바논의 백향목에 대한 인용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4, 32)는 구절은 에제키엘서와 다니엘서에 등장하는 레바논의 백향목을 떠올리게 한다. 예언서에서 그 나무는 회복된 이스라엘(에제 17,23), 이집트와 앗시리아(에제 31, 6), 바빌로니아(다니 4, 9)를 각각 상징한다. 즉 거대한 레바논 백향목은 세속적 제국의 상징이다. 예수 시대의 로마 제국 역시 스스로를 백향목과 같다고 자부했을 것이다.
그러면 예수는 하느님 나라가 로마 제국처럼 강대해지길 희망했던 것일까? 마르코 복음의 문맥상 이것은 전혀 맞지 않는 해석이다. 마르코의 예수는 분명한 어조로 세상의 통치자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0, 42-44)
오히려 예수의 사역은 유대 사회를 대표하는 회당, 집, 마을, 식탁 등으로 침투해 그것들이 기반한 질서의 허위성을 고발하고 전복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겨자와 유사하다. 이에 반해 백향목은 예수 운동의 목표가 아니라 비판과 비꼼의 의도로 인용되고 있다. 로마 황제를 지칭하던 ‘하느님의 아들’(1, 1) 칭호를 갈릴래아의 한 농부를 가리키는 말로 빼앗아왔듯이 제국을 상징하는 백향목은 가난한 농부들의 연합체가 쟁취해와야 할 탈취의 대상일 뿐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겨자씨 비유는 로마 제국의 오만한 자부심을 조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가 로마 제국처럼 강대한 나라이길 바라는 대중의 기대를 비판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신학자 버나드 스캇은 이 비유를 청중들에게 황제의 나라와 하느님의 나라 사이에서 선택을 제안하는 비유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비유의 청자는 거대한 백향목처럼 군림하는 황제의 나라와 잡초처럼 스며드는 하느님의 나라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도전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도전을 통해 겨자씨의 비유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제기한 물음을 다시 묻고 있다. 당신이 선택한 나라는 황제의 나라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나라인가.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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