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18장-풍랑을 가라앉히다

ddolappa 2016. 8. 25. 02:58

제18장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마르 4, 35-41)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

 

      무리들을 상대로 긴 연설을 마친 예수는 타고 있던 배로 호수 건너 편으로 나아간다. 일몰의 시점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던 유대인들의 시간 계산법에 따르면 저녁이란 시간은 새로운 날의 출발이다. 그래서 저녁에 시작된 예수의 뱃길 여행은 어떤 의미심장한 사건이 벌어질 것을 예고한다(6, 47; 14, 17; 15, 42).

 

      그런데 갈릴래아 호수 서편이 유대인들의 땅이라면, 그 반대편인 호수 동편은 이방인들의 땅이다. 그러므로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는 예수의 요구는 유대 지역에 국한된 사역을 이방인의 땅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갖는다. 따라서 뱃길 여행은 ‘하늘의 새들’로 상징되는 이방 민족들까지 포함하는 원대한 구원의 비전을 완성시키기 위해 이방의 땅으로 복음의 씨를 뿌리러 나선 활동이다.

 

      마르코는 예수와 그의 제자들의 몇 차례 뱃길 여행을 기록하고 있다(4, 35-41; 5, 21; 6, 45-53; 8, 10; 8, 13-21). 특이한 사실은 그가 서쪽 유대인의 땅에서 동쪽 이방인의 땅으로의 여행만을 상세히 보도한다는 점이다. 또한 그 때마다 마르코는 예수의 신적 정체성을 노출하는 사건을 여행 속에 배치한다(4, 39; 6, 49-50; 8, 14). 이것은 유대와 이방의 경계를 허무는 뱃길 여행이 전 인류를 구원하려는 예수의 종말론적 구원 활동과 연관된 상징적 사건임을 시사한다.

 

 

풍랑을 가라앉히다

 

      그러나 항해는 곧 난항에 부딪히게 된다. 거센 돌풍으로 인해 배에 물이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성서의 상징 세계 속에서 바다는 무질서와 혼돈, 곧 악을 상징한다(이사 51, 10; 시편 89, 10). 괴물 레비아탄이 사는 바다는 무제한적 카오스와 사탄적 혼란의 영역이다. “당신께서는 바다를 당신 힘으로 뒤흔드시고 물 위에서 용들의 머리를 부수셨습니다. 레비아탄의 머리들을 깨뜨리시어 바다의 상어들에게 먹이로 주셨습니다.”(시편 74, 13-14) 마르코는 바다를 하느님에 반대하는 세력으로 상징하는 전통을 활용해 이방인들의 땅으로 자신의 사역을 확장하려는 예수의 의지가 저항에 부딪힌 상황을 형상화한다. 예수가 잠들어 있을 때 거세게 불던 풍랑이 그가 잠에서 깨자 다시 잠잠해진 것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을 나타낸다.

 

      갑작스런 돌풍에 불안해 하던 제자들은 배의 고물에서 자고 있던 예수를 깨운다. 예수의 잠은 육체적 피로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발견된 예수의 낙관주의, 다시 말해 하느님을 향한 그의 무한한 신뢰를 나타낸다. 어쨌든 잠에서 깨어난 예수는 바람을 ‘꾸짖고’, 호수를 ‘침묵시킨다’. 여기서 ‘꾸짖다’로 번역된 ‘에피티마오’와 ‘침묵시키다’를 뜻하는 ‘피모오’는 귀신을 축출할 때 사용하는 전문용어이다(1, 25; 3, 12; 4, 39; 8, 30. 32. 33; 9, 25; 10, 13. 48).. 예수는 이 단어들을 이용해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더러운 영을 쫓아낸 바 있다(1, 25). 따라서 예수가 풍랑을 가라앉힌 기적은 단순한 자연 이적이 아니라 바다와 돌풍이 상징하는 사탄 세력과의 투쟁과 그의 승리를 의미한다. 마르코는 교묘한 수사적 기교를 통해 하느님의 자리에 예수를 위치시키고 있는데, 성서 전통에서 노호한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는 일은 모든 혼돈을 제어하는 하느님의 승리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기 때문이다(시편 65, 8; 89, 10; 104, 6-9;욥 38, 8-11; 예레 5, 22). 위기의 순간 예수의 신적 정체성은 자연스레 계시된다.

 

      마르코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즉 악의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를 표현하기 위해 내륙에 있는 담수호인 갈릴래아 호수를 ‘바다’로 지칭한 첫 번째 사람이다. 갈릴래아 호수는 ‘겐네사렛 호수’(루카 5, 1), ‘티베리아스 바다’(요한 21, 21)(카톨릭 성서에서는 ‘호수’로 번역) 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렸다. 코이네 헬라어 ‘달라사’는 바다 혹은 호수로 번역되는데, 일반적으로 ‘바다’를 가리키는데 쓰였고, 호수를 지칭할 때는 ‘리멘’이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신학적 의미를 고려한다면, 마르코 복음에서 모두 ‘호수’로 번역된 단어는 ‘바다’로 정정해서 번역하는 게 보다 적절할 듯싶다(1, 16; 4, 35; 7, 31).

 

 

제자들의 무지 모티브

 

      풍랑을 꾸짖고 잠잠케 한 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아직’이란 부사에서 스승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의 안타까움과 분노가 감지된다. 예수에 의해 구출 받은 제자들의 반응이 감사와 존경의 표현이 아니라 큰 충격과 두려움이 뒤섞인 감정의 표출이란 점도 그들의 믿음 없음을 부각시킨다. 마르코는 ‘아직’이란 부사를 첫 뱃길 여행(4, 40)과 마지막 여행(8, 17. 21)에 사용해서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를 강조한다.

 

      제자들의 무지 모티브는 뱃길 여행의 또 다른 목적을 드러난다. 즉 이방인의 땅을 향한 예수의 여정은 예수의 정체와 그의 사역의 본질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 단락이 비유로 된 연설의 서사적 배경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도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즉 갈릴래아 호숫가는 무리를 향한 일반적 가르침의 장소이지만(2, 13; 3, 7; 4, 1-2; 5, 21), 호수 가운데에 떠 있는 배는 선교의 도구(4, 35-41; 6, 45-52; 8, 13-22)이자 제자들을 향한 가르침의 장소이다(4, 1). 그러나 예수의 권능과 정체는 뱃길 여행을 통해 보다 뚜렷하게 계시되지만 제자들은 번번히 몰이해와 불신앙의 늪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서 바닷길 여정은 성공한 횡단과 실패한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렇게 이해할 경우 예수의 배를 가로막는 풍랑은 이방인의 땅으로 가고자 한 예수의 비전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의 반감과 거부가 투사된 상징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제자들의 유대민족 중심주의는 이방인들까지 포함된 예수의 보편적 구원 활동을 수용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의 뜻과 의지를 거역하는 행위 자체를 악으로 규정한다(8, 33). 바다 여행 중에 예수는 제자들이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이 품고 있던 ‘완고한 마음’(3, 5)에 전염되었다고 비난한다(6, 52; 8, 17). 예수의 제자들은 이방 땅 벳사이다로 가라는 예수의 파견 명령(6, 45)을 지키지 못하고 유대 땅인 게네사렛에 도착하기도 한다(6, 53). 제자들의 이러한 실패는 예수로부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았지만 '듣는 귀'를 갖지 못한 그들의 한계를 드러낸다.

 

      이 단락은 비록 기적 사화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와 사탄 사이의 투쟁의 비중이 너무 작고, 오히려 예수와 제자들 간의 갈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또한 예수의 정체에 대한 그리스도론적 관심과 제자들의 몰이해에 대한 비난이 교차하지만, 결과적으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것은 마르코의 주된 신학적 관심이 제자직에 있음을 말해준다. 즉 이 이야기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건널 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하나의 비유다. 이렇게 호숫가에서 가르친 ‘비유의 신비’는 호수에서 일어난 ‘여행의 신비’로 확장되고 있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