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19장-군대 귀신을 쫓아내다

ddolappa 2016. 9. 2. 20:57

 

제19장

 

 

그들은 호수 건너편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자마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는 무덤에서 살았는데, 어느 누구도 더 이상 그를 쇠사슬로 묶어 둘 수가 없었다. 이미 여러 번 족쇄도 부수어 버려 아무도 그를 휘어잡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밤낮으로 무덤과 산에서 소리를 지르고 돌로 제 몸을 치곤 하였다. 그는 멀리서 예수님을 보고 달려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큰 소리로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께서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당신께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가 “제 이름은 군대입니다. 저희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 자기들을 그 지방 밖으로 쫓아내지 말아 달라고 간곡히 청하였다.

 

마침 그곳 산 쪽에는 놓아 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그래서 더러운 영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돼지들에게 보내시어 그 속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허락하시니 더러운 영들이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이천 마리쯤 되는 돼지 떼가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호수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과 여러 촌락에 알렸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 들렸던 사람, 곧 군대라는 마귀가 들렸던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 그 일을 본 사람들이 마귀 들렸던 이와 돼지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저희 고장에서 떠나 주십사고 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마르 5, 1- 20)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

 

      예수가 풍랑으로 상징되는 악의 세력을 진압한 사건은 이방 지역인 거라사에서 행한 귀신축출 사역으로 이어진다. 이 두 사건은 하느님의 종말론적 구원 활동이 이방인들의 땅으로 확대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하느님과 사탄 간의 충돌과 하느님의 승리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된다. 특히 귀신축출은 유대 지역에서 행한 예수의 첫 사역(1, 21-28)이자 그가 이방 지역으로 건너와서 행한 첫 사역(5, 1-20)이란 점에서 중요하다. 예수가 제자 열둘을 따로 세운 목적도 그들에게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3, 15; 6, 6. 13)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도 이 사역의 중요성을 말해준다. 이것은 예수의 구원 활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악의 세력과의 투쟁을 반드시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종류의 불의하고 억압적인 세력으로부터의 해방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존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의 귀신축출 사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두 가지 요소를 지적한다. 하나는 귀신들림 현상이 식민지 백성이 겪는 분열된 인격의 상태이며, 다른 하나는 식민지 상황에서 귀신축출은 개인적으로 치유의 기능을 갖지만, 사회적으로는 저항의 기능을 갖는다는 것이다. 리처드 호슬리에 따르면 하느님과 사탄 사이의 대결이라는 묵시문학적 구도 역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상황에 대한 묘사이면서 동시에 그것의 상징화”이다. 즉 예수와 악의 세력 간의 투쟁은 당시의 사회-정치-종교적 갈등의 상징화나 반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래서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만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율법 학자들의 억압적 권위와 정결 이데올로기에 포박되고 착취당한 한 개인의 모습이자 그를 통해 상징되는 공동체 전체의 형상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예수가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마주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이방인들의 땅

 

      카파르나움 회당에서의 귀신축출과 게라사 지역에서의 귀신축출은 유사한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먼저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가 ‘들어가다-나오다’의 도식에 의해 싸여 있다. 즉 예수는 회당 안으로 ‘들어가’ 귀신축출 후 ‘나온다(1, 21. 29). 마찬가지로 예수는 배를 타고 게라사인들의 지방으로 ‘들어가’ 귀신축출 후 ‘나온다’(5, 1. 21). 예수가 만난 사람 역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1, 23; 5, 2). 귀신 들린 사람은 예수에게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냐?’며 항의한다(1, 24; 5, 7). 예수는 더러운 영에게 ‘나오라!’고 명령한다(1, 25; 5, 7). 그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놀란다(1, 27; 5, 15).

 

      마르코 복음에는 이와 유사한 병행 구조들이 더 있다. 가령, 두 번의 갈릴래아 호수에서의 구출 이야기(4, 36-41; 6, 47-52)나 두 번의 급식 기적 설화(6, 33-44; 8, 1-10) 등이 대표적 사례들이다. 이러한 반복적 구조는 마르코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복음서의 독자나 청자는 이야기의 진행을 잠시 멈추고 텍스트를 앞뒤로 오가며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도록 요구한다. 이런 이야기의 형식을 통해 내러티브의 상징들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도록 도전하는 셈이다. 더 나아가 베르너 켈버는 마르코 복음에서 발견되는 이러한 병행 이야기들을 다음처럼 정리한다.

 

사건

유대 지역

이방 지역

첫 귀신축출

1, 21-28

5, 1-20

대중 사역

1, 29-39

6, 54-56

상징적 치유

5, 22-43

7, 24-37

급식 기적

6, 32-44

8, 1-10

빵에 대한 몰이해

6, 51f.

8, 14-21


 

      켈버는 갈릴래아 호수를 경계로 각각 유대 지역과 이방 지역에서 병행 사건들이 발생하는 것에 주목하여 마르코 복음의 내러티브가 유대의 사이클과 이방의 사이클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사이클은 유사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고 거의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즉 예수의 제자들은 뱃길로 유대 땅과 이방 땅을 오가며 수많은 유사한 사건들을 경험하지만 그들은 예수의 사역에 담긴 의미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다.

 

      마르코 복음의 상징적 공간 배치에 대한 켈버의 통찰은 귀신축출에 관한 가장 길고 또 가장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는 게라사에서의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즉 이 사건이 일어나는 무대는 강열한 이방적 색채로 도색되어 있다. 유대의 문화에서 무덤은 가장 불결한 장소이며 돼지는 가장 불결한 짐승이다. 이 두 가지 서사적 장치는 이방인들을 불결하다고 간주하는 유대인들의 의식을 드러내는 가장 전형적인 예이다. 이사야는 우상숭배자들을 “굴 무덤 속으로 들어가 앉고 은밀한 곳에서 밤을 지내는 자들, 돼지고기를 먹으며 부정한 고기 국물을 제 그릇에 담는 자들”이라고 언급한다(이사 65, 4). 게라사의 귀신들린 자가 사용한 예수에 대한 호칭 역시 이교적 성격을 반영한다. 카파르나움 회당의 귀신들린 자는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부르는 반면(1, 24), 게라사의 귀신들린 자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라고 부른다(5, 7). 이 호칭은 구약성서에서 거의 모두 이방인들의 입에서 혹은 이방적 환경에서 사용되었고(창세 14, 18-20; 민수 24, 16; 이사 14, 14; 다니 3, 26. 42) 신약성서에서는 오직 히브리 성서(7, 1)와 루카 복음에서만 9번 가량 사용된다.

 

      이러한 묘사 방식은 내러티브의 상징적 논리에 따라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기여한다. 그에 따르면 1) 예수의 사역이 유대인의 지역을 넘어 이방인의 지역으로 확대된다 2) 이방 지역의 불결함은 예수가 행한 귀신축출에 의해 정화된다 3) 예수의 정화를 통해 이방인들 역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러나 이러한 서사적 흐름은 유대 민족 중심주의로부터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유대 지역에서는 가난한 자들의 연대를 주장하며 억압적 지배 체제에 저항하던 예수가 이방 지역에서는 권력 지향적이고 권위적인 모습으로 돌변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지 않다. 예수에게 이방인들은 연대의 대상이 아니라 정화시켜야 할, 즉 계몽해야 할 대상일 뿐이란 말인가? 이것은 전형적인 식민주의의 논리 아닌가? 자신이 목숨을 걸고 맞서던 로마의 제국주의 논리를 이방인들에게 관철시키는 것이 예수의 구원 사역이었단 말인가?

 

 

왜 게라사 지역인가?

 

      게라사는 갈릴래아 호수에서 남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지역으로 ‘데카폴리스’(열 도시 연맹체)에 속한 도시였다. 데카폴리스는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정복 후에 전략적인 목적으로 세워진 도시들로, 로마 시대에는 아라비아 왕국과 접경을 이루는 로마 제국의 동쪽 최전방에 위치한 이방인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측면에서 보면,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가 50km나 되는 거리를 질주해서 호수에 빠져 몰살당한 사건은 실제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갈릴래아 호수의 남동 해안에 위치한 ‘게르게사’ 지역이 호수에로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본문이 서술하고 있는 장소와 일치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서술된 사건의 공간과 실제의 지리적 공간의 불일치를 인식하고 있었던 마태오는 게라사를 갈릴래아 호수 남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지역인 ‘가다라’로 바꾼다(마태 8, 28) 이러한 증거들은 마르코가 지리적 사실과 무관하게 사건의 무대로 게라사 지역을 선택한 것은 특정한 의도가 작용한 것임을 시사한다. 즉 마르코는 이 사건을 게라사를 포함하여 데카폴리스와 연결시킴으로써 의도적으로 이방인의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강조한다(5, 20). 이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예수의 사역이 이방 지역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마르코의 의도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게라사인들은 유대인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또한 마르코 복음서의 저술 시기인 유대-로마 전쟁 때 게라사 지방은 로마 진압군에 의한 대량 학살을 경험했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그(베스파시안)는 또한 게라사에 루키우스 얀니우스를 보내면서 그에게 기병과 상당히 많은 보병을 함께 보냈다. 그래서 루키우스 얀니우스는 단 한번 공격으로 게라사를 점령하고 도망하지 못한 젊은이들을 천 명 가량 살해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들을 포로로 잡고 병사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약탈하도록 허락했다. 그 후에 루키우스 얀니우스는 집들을 불태우게 하고 주변 마을들로 진격했다. 반면 힘있는 자들은 도망했지만, 약한 자들은 죽임을 당했으며,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은 화염에 휩싸였다. 이제 전쟁은 산악 지방과 평야 지대로 확산되어 나갔다.”

 

      게라사인들 중에는 유대인들의 항쟁에 동조하여 자신들의 자유와 자치를 위하여 봉기하려 했거나 봉기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압군 사령관인 베스파시안은 그러한 사태를 직시하고 예루살렘으로 진격하기 전 후방의 적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하여 루키우스 얀니우스를 게라사 지역으로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곳에 주둔한 로마의 레기온은 주후 3세기까지 그 지역에 머무르게 된다.

 

      이렇게 볼 때, 마르코가 게라사 지방을 선택한 또 다른 의도는 정치적인 것임이 드러난다. 즉 마르코는 레기온으로 상징되는 로마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유발하는 비인간화 현상을 게라사의 군대 귀신에 포로가 된 사람을 통하여 신랄하게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쫓아낸 더러운 영은 단순히 불결한 이방의 문화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모두 탄압하고 착취하던 로마 제국주의를 겨냥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카파르나움 회당의 더러운 영이 율법 학자들의 정결주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억압적 지배체제를 상징하고 있다면, 게라사의 더러운 영은 로마의 제국주의와 군사적 지배체제를 상징한다. 예수는 당대의 현실을 결정하는 이 두 세력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사악한 손아귀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자신의 구원 사업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예수가 자신의 사역을 이방 지역으로 확장시키려 했던 이유도, 또한 그것이 이방인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로마 제국주의로 인한 탄압과 고통은 유대인들만의 몫이 아니라 그 체제에 신음하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며, 따라서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와 우정을 통해 불의한 체제에 저항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메시지를 예수는 전달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유대 민족 중심주의를 탈피하지 못했던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의 원대한 비전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불안과 의혹의 시선으로 그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레기온을 몰아내다

 

      게라사 지방에서 예수가 만난 귀신들린 사람은 과도한 폭력성을 특징으로 한다. 사람들은 그의 광기를 통제하기 위해 쇠사슬과 족쇄로 그를 묵어두기도 했지만 그는 번번히 초인적인 괴력을 발휘해 쇠사슬을 끊고 족쇄를 부수어 통제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는 돌로 자신의 몸을 치는 비정상적 행동을 보이는데, 이것은 그의 광기가 폭력에 의해 유발된 것임을 암시한다. 즉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자들에 대한 증오와 이러한 증오를 보복이 두려워 억제해야만 하는 필요성 사이의 갈등이 그를 정신분열과 자기 파괴적 상태에 빠지도록 몰아넣은 것이다. 그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말은 그의 내면에 억제된 답답함, 괴로움, 울분 그리고 분노의 감정을 암시한다. 그가 배회하고 있는 무덤들이 로마군에 의해 희생당한 그의 부모, 형제, 자매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것이었다고 상상해 본다면, 적들에 대한 분노가 자신의 무능력과 무기력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어 마침내 자기 혐오와 자기 파괴로 변질되는 과정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그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먼저 그 귀신의 이름을 묻는다. 고대 근동 문화에서 귀신의 이름을 아는 것은 그 귀신에 대한 우위적 권세를 획득하는 것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이다. 귀신을 향한 예수의 명령인 “나오라”는 말은 계속된 혹은 반복된 행위를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로 표시되었는데, 이것은 예수가 반복해서 명령해야 할 만큼 귀신의 저항이 완강했음을 뜻한다. 이에 반해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예수의 명령은 일회적 행위를 나타내는 단순과거 시제로 표시되었고(1, 25), 귀신 역시 단번에 복종한 것으로 나온다(1, 26).

 

      귀신이 밝힌 자신의 이름은 ‘레기온’이다. 이 말은 일차적으로 귀신의 말처럼 단순히 ‘많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로마 제국의 군대와 관련하여 사용된 군사적 용어로서 보병과 기병 그리고 그 밖의 보조부대들로 구성된 육천 명 가량의 로마 제국의 군단을 가리키는데도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게라사에서의 귀신축출 사건이 로마 군대와 관련된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실제로 이 단락에서는 레기온 외에도 수많은 군사 용어가 등장한다. 예수는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귀신의 간청을 ‘허락’하는데, 이 단어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명령을 가리킨다. 또 돼지 떼가 비탈을 ‘내리달렸다’는 표현은 병사들이 전투장으로 돌진하는 형상을 나타낸다. 특히 이천 마리나 되는 돼지 떼는 당시 일반적인 돼지 떼의 숫자는 대개 100-150마리 정도이며 많아야 300마리를 넘지 않았고, 돼지들은 떼로 이동하지 않기 때문에 이방 지역의 가축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주둔해 있던 로마 군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돼지 떼로 거처를 옮겨서라도 그 지방에 남아 있으려는 귀신의 집요함 역시 로마 군단의 지배욕을 반영한다.

 

      어떻게든 게라사 지역에 주둔해 있길 바랐던 귀신의 소망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맞이하고 만다. 더러운 영들이 사람의 몸에서 나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돼지 떼가 비탈을 내달려 호수에 빠져 몰살당하고 만 것이다. 이 장면에 담긴 아이러니와 해학의 정신은 심각하고 우울한 분위기를 일시에 전환시킨다. 가족과 지인들을 희생당하고 괴로웠을 그 사람에게 그리고 로마와의 전쟁으로 인해 그 남자와 동병상련의 심정이었을 마르코 복음의 청중들에게 예수가 건네는 일종의 농담이었을지도 모를 이 장면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동시에 따뜻한 위로와 격려로 다가왔을 것이다.

 

 

예수의 복음이 전파되다

 

      마르코는 귀신들린 자가 온전하게 치유받은 상태를 ‘옷을 입다’, ‘제정신이다’, ‘앉아 있다’ 등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그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겁을 내고, 목격자들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예수에게 떠나달라고 간구한다. 귀신들린 자의 치유와 돼지 떼의 몰살이 담고 있는 정치적 상징성을 고려할 때 예수로 인해 또 다시 로마의 군사적 보복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치유된 사람은 예수와 함께 있기를 간청하지만 예수가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 중 열둘을 세우며 그들에게 자신과 함께 있고,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를 내쫓는 권한을 부여했다(3, 14). 그러므로 예수의 거절은 치유된 자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선택된 열둘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대신 예수는 그에게 일어난 사건을 알리는 임무를 부여한다. 여기서 ‘알리다’는 말은 초대 교회의 선교 용어(사도 15, 27; 27, 20)로서 그에게 선교의 사명이 주어진 것이다. 예수는 그에게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알릴 것을 위임하지만, 그는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역에 전파했다. ‘주님’은 70인역 성서의 전통에 따라 하느님의 대용어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루카는 이 단어 대신 아예 ‘하느님’이란 직접적인 호칭으로 바꾸기도 했다(루카 8, 39). 이러한 차이는 이 전승이 ‘주’라는 호칭을 아직 예수에게 적용시키지 않았던 시기에 속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지만, “하느님의 복음”(1, 14)의 선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 1)의 선포로 이해했던 마르코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마르코는 예수의 기적이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하느님의 긍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가엾은 마음’이란 표현을 사용했다(1, 41; 6, 34; 8, 2; 9, 2). ‘불쌍히 여기다’와 같은 뜻으로 이 단락에서는 ‘자비를 베풀다’가 사용되고 있다. 이 표현은 소경 바르티매오의 치유 기사(10, 47. 48)에도 등장하는데, 이것은 그들처럼 참담하고 불행한 운명의 사람들을 구원하여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예수 사역의 궁극적 목적임을 말한다. 그래서 귀신들렸던 자는 육적이며 영적인 회복뿐만이 아니라 공동체로의 복귀를 통해 상실되었던 사회적 관계의 회복까지 요구받는다.

 

      예수의 복음이 이방 지역으로까지 확대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기대가 반영된 이 단락은 이방 선교가 예수의 공생애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게라사에 뿌려진 하나의 씨앗은 이방인의 땅에서 계속될 예수의 이후 사역을 준비한다(7, 31-8, 9).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