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20장-하혈하는 여인을 고치고 야이로의 딸을 살리다

ddolappa 2016. 9. 8. 15:42

제20장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건너편으로 가시자 많은 군중이 그분께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계시는데, 야이로라는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와 함께 나서시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 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곧 당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군중에게 돌아서시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반문하였다. “보시다시피 군중이 스승님을 밀쳐 대는데, ‘누가 나에게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누구 그렇게 하였는지 보시려고 사방을 살피셨다. 그 부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나와서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다 아뢰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그리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동생 요한 외에는 아무도 당신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 그들이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소란한 광경과 사람들이 큰 소리로 울며 탄식하는 것을 보시고,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 내쫓으신 다음,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와 당신의 일행만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거듭 부분하시고 나서,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르셨다. (마르 5, 21-43)

 

 

 

다시 유대인의 땅으로

   

      이방인의 땅인 게라사에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 후 예수는 배를 타고 다시 갈릴래아 호수 서쪽에 있는 유대인의 땅으로 되돌아온다. 마르코는 이 단락의 서사적 구조를 예수가 뱃길 여행을 떠나기 이전 상황과 유사하게 설정하고 있다. 예수가 비유로 가르칠 때처럼 호숫가 주변은 일반 대중들을 위한 가르침의 장소로, 집은 예수의 제자들을 위한 가르침의 공간으로 사용된다. 그 때와 마찬가지로 회당장의 딸을 소생 시킨 이야기와 혈루병 여인을 치유한 이야기가 샌드위치 구조로 결합되어 있다. 하혈하는 여인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그를 찾아왔다는 표현은 듣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비유 단락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4, 3. 9. 12. 13. 20. 23). 유사한 내러티브 설정은 서사적 연계성을 마련하는 한편, 이 단락이 비유 담화와 마찬가지로 제자들 혹은 청중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 될 것임을 예고한다.

 

      이 단락의 내러티브는 서로 상반되는 두 힘들 간의 길항작용으로 특징지워진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에게로 가려는 예수와 그 일행의 움직임이 있고, 이 움직임을 중단시키는 반대쪽의 움직임(하혈하는 여인, 회당장의 집 사람들, 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에 등장인물들 간의 대립과 갈등이 덧붙여진다. 딸을 구해달라는 부유한 지배계층 남자의 간청은 가난한 피지배계층 출신의 부정한 여자의 갑작스런 난입에 의해 지연되고 결국 그의 딸은 죽음에 이른다. 정결법을 위반한 혈루병 여인은 오히려 그 믿음을 칭찬받지만 예수의 남성 제자 열둘은 무지에서 드러난 믿음 없음으로 인해 비난받는다. 이야기의 비극적 결말은 예수가 야이로의 딸을 소생시킴으로써 기적적으로 반전된다. 그러므로 이 단락의 신학적 메시지는 이러한 갈등과 반전을 어떻게 읽어내느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계와 금기를 넘어선 믿음

 

      마르코 복음에서는 드물게 구체적 이름으로 등장하는 야이로는 한 가정의 수장이자 유대 사회의 근간이 되는 회당의 우두머리이기도 하다. 부와 권력을 모두 소유한 남성으로서 야이로는 1세기 지중해 문화권의 지배적 가치인 명예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에 비해 가난한 군중들 속에서 나온 하혈하는 여인은 모든 면에서 야이로의 정반대에 있는 수치스런 존재이다. 그녀는 유대 사회에서 이방인보다 더 부정한 존재로 취급받던 여성이며, 더욱이 극도의 오염을 나타내는 은유로 사용되던 월경이 멈추지 않는 병으로 인해 말할 수 없이 혐오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월경 중인 여성은 그녀가 접촉하는 모든 인간과 물건이 다 부정해지기 때문에 결코 집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가정 내에서 정상적인 부부생활은 상상할 수 없었고, 자식들은 그녀가 잡았던 문고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이렇게 대조적인 두 인물을 소개한 후 마르코는 청중들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리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집 안에 유폐되어 있어야 할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여인이 집 밖으로 나와 지극히 성스러운 존재인 예수를 만진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가 자신을 오염시킨 그 부정한 여인의 간청을 고결한 회당장의 청원보다 더 먼저 들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지엄한 정결법을 위반한 그녀가 죽음의 심판 대신 구원을 받고 심지어 그 믿음을 칭찬받은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예수는 가장 불행한 형벌로 인식되던 나병환자를 만져서 치료를 함으로써 정결법을 위반한 적이 있다(1, 40-45). 그 후 예수는 죄인들과 식탁교재를 나누고, 노동을 금지한 안식일에 환자를 치료하는 등 유대 사회를 지탱하는 이념적 근간인 정결 체제에 끊임없이 도전해왔다. 아마도 혈루병 여인이 들은예수의 소문은 이러한 것들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녀의 과격한 행동은 예수에 대한 모방이자 그에 대한 믿음의 실천이며, 그녀를 억압하는 질병과 사회적 질곡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박한 해방의 몸짓이다. 기존의 가치 체제에 도전을 한 그녀의 용기와 믿음은 병의 치료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신의 회복(예수에 의해 이라 불림)으로 응답받게 된다. 그녀의 올바른 들음이 그녀 자신을 구원한 것이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예수는 통상의 기대와는 달리 부유하고 명예로운 회당장의 요청을 잠시 유예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의 간청을 먼저 들어주었다. 예수의 이러한 결정은 남성/여성, 부유함/가난함, 명예/수치 등의 이분법적 가치 체계에 기반한 지중해 문화권의 사회적 질서에 배치되는 것이다. 마르코는 혈루병 여인과 회당장 간의 관계의 역전을 통해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가 기존의 가치 체계나 사회 질서와 무관하며, 오히려 그 나라는 현존 질서를 의문시하고 그것을 넘어선 가치를 지향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임을 역설한다.

 

 

여성 해방의 가능성으로서 예수의 정결 체제 비판

 

      예수가 자신을 의사에 비유했던 사실을 상기하면(마르 2, 17), 하혈하는 여인에 대한 서술은 기성 종교 제도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조롱으로 읽힌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 26) 즉 그 여인은 많은 종교인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효과도 없이 경제적 착취만 당했을 뿐이라는 이야기다. 예루살렘의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 행해진 과도한 경제적 착취에 대한 흔적은 가난한 과부의 헌금 이야기에서도 발견된다(마르 13, 41-44). 이처럼 하혈하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경제적 착취 기구로 전락한 채 제의적 정결 이데올로기로 여성에 대한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했던 성전 체제를 역사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유대 사회에서 제의적 정결은 성차별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기능하기도 했다. 똑같은 피흘림이지만 남성의 할례의 피는 구원의 증거로 간주된 반면, 여성의 월경은 죄악의 징표일 뿐이었다. 할례는 자발적이고 제의적인 피흘림인 데 비해, 월경은 자연적인 생리적 피흘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남녀 차별적인 피의 규범은 아들을 낳을 경우 33, 딸을 낳을 경우 66일이 지나야 산모의 산혈이 깨끗해질 것이라는 데서도 드러난다(레위 12, 2-5).

 

      하혈하는 여인은 예수의 제의적 정결 체계에 대한 비판이 여성 해방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예시한 인물이다. 마르코는 그러한 구원의 순간을 예수와 여인의 동시적 교감으로 표현했다. 여인이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순간 여인은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꼈고, 동시에 예수 역시 자신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간 것을 느꼈다. 예수의 부름에 여인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응답하는데, 이것은 자신이 금기를 위반했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신의 현현(顯現)에 대한 인간적 반응을 나타낸다. 두려움과 떨림은 구약성서에서 계시에 관한 공식적 문구로 사용되던 표현이다(탈출 15, 16; 신명 2, 25; 11, 25). 마르코는 이러한 문학적 전통을 활용해 여인의 정결 이데올로기로부터의 해방의 순간을 예수와의 신성한 만남의 순간으로 치환시키고 있다.

 

      마르코는 더 나아가 예수가 세우려는 새로운 이스라엘에서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적 억압과 착취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이 공유하는 숫자 12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한다. 즉 혈루병으로 여인이 12년이나 여성으로서 온전한 삶을 살아오지 못한 것이나, 이제 막 여성으로서의 문턱에 들어선 야이로의 딸이 초경이 시작되기 전 죽음에 이른 것은 다음 세대의 희망이 차단된 유대 사회를 나타낸다. 세리와 창녀와 같은 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 되듯 이방인 보다 못한 존재로 천대받았던 여성들이 남성들과 평등한 존재로 존중받는 세상이 예수가 꿈꾸던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사도 바오로는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 3, 27-28) 마르코는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을 수용하지 않는다면 유대 사회에 더 이상 미래는 없다고 역설한다.

 

      이제 예수에 의해 치유되고 소생한 두 여인은 새 이스라엘의 딸이자 새로운 세상을 잉태할 어머니가 된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끈다고 말했던 괴테처럼 예수는 새로운 공동체의 미래를 여성에게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 나라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궁극적 모습은 모든 차별이 철폐된 평등한 세상이다.

 

      반면 예수의 남성 제자 열둘은 그 접촉의 순간을 군중에 의한 밀침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간과하고 만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기득권자들인 그들은 단 한 번도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포기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의 가르침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경건하다고 존경 받는 자들이 아니라 세리와 창녀들"이며(마태 21, 31), 그러니 첫째가 꼴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마르 9, 35; 10, 31. 43) 남성 제자들은 들을 귀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무지한 제자들은 이 단락에서 배경에 머물 뿐 주도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성전 체제 비판의 가교

 

      마르코는 예수가 하혈하는 여인과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5, 35) 야이로 집안의 심부름꾼이 딸의 죽음을 알리러 찾아왔다. 열두 해 동안 지배적 질서 하에서 죽음에 다가가던 여인이 예수로 인해 다시 생명을 얻은 순간 동일한 세월 동안 기득권을 누리며 살던 여인은 죽음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마르코는 한 체제 내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던 두 여인의 운명이 교차하는 순간을 동시적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는 흔들리는 야이로에게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며 권고한다. 그리고 예수는 죽음의 소식을 듣고 야이로의 집에 이미 와 있던 곡하는 여인들과 피리 부는 사람들을 내쫓고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운다. 이 광경은 흡사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가 그곳에 있던 환전상들과 비둘기 장수들을 내쫓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실제로 성전 정화 사건은 이 단락과 동일하게 샌드위치 구조로 되어 있다.

 

A. 딸을 위한 야이로의 간청 - 혈루증 여인의 폭력 - 야이로의 딸의 소생(5, 21-43)

B. 무화과나무의 저주 - 성전에서의 예수의 폭력 - 무화과나무의 죽음(11, 12-25)

 

      비유 담화에서 마르코는 신앙의 열매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4, 8. 20. 28.). 열매를 산출하는 태반은 땅으로, 비록 비유에 대한 해설에서는 땅을 인간 개인 혹은 개인의 마음으로 해석했지만, 유대인의 관념 속에서 땅은 본래 하느님의 소유이다. 따라서 신앙의 열매를 생산하도록 하는 원천은 하느님의 권한을 위임받은 종교와 그 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예수의 저주는 더 이상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할 만큼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그의 혹독한 비판과 연관된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시작되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마무리되는 예수의 성전 체제 비판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빵의 상징과 몸의 신학

 

      이 단락에서 표현된 믿음 혹은 신앙은 육체적 현상과 결부되어 있다. 하혈하는 여인은 자신이 치유된 것을 몸으로느낀다. 육체적 접촉을 나타내는 만짐’(손을 대다)의 계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5, 23. 27. 28. 30. 31. 41.). 소녀를 소생시킨 후에 예수는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이른다. 이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믿음이나 구원이 케리그마적 신앙과 구분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는 전통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승리의 부활을 믿을 때에만 그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 구원 역시 죽은 후에 얻게 되는 사후구원(死後救援)이나 사후영생(死後永生)에 한정된 개념이었다. 하지만 본문에 표현된 구원은 죽어가는 인생이 극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자 의 온전성을 회복하는 현재적 사건이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계기는 곧 제의적 상징화 작업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마르코는 이후 이야기에서 먹을 것이라는 말 대신 항상 이라는 표현만 사용한다(6, 52; 7, 2. 5. 27; 8, 4-6. 14. 16-17. 19.; 14, 22). 빵은 정교한 문학적 작업을 거쳐 예수의 이자 그의 가르침 혹은 교회를 가리키는 상징이 된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14, 22)

 

      이미 마르코는 하혈하는 여인의 고통을 서술하며 예수에게만 해당하는 표현들을 사용함으로써 예수의 수난을 예고하는 듯한 암시했다. 여인이 겪은 숱한 고생”(5, 26)은 예수가 겪게 될 많은 고난”(8, 31; 9, 12)에 해당하며, 여인의 ”(5, 29)”(5, 29)에 대한 언급은 이 본문을 제외하고 오직 예수의 ”(14, 8. 22; 15, 43)”(14, 24)를 언급할 때만 사용된다. 야이로의 딸의 소생 역시 예수의 부활(16, 6)을 예고한다. 따라서 여인들의 고통과 소생은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예견한 사건들이다.

 

      이처럼 이 단락에서 제의적 관심이 전면에 부각된 이유는 본문에 제시된 위기의 징후들과 연관되어 있다. 혈루병 여인은 사회적 정화 기능 및 통합 기능을 상실한 채 착취기구로 전락한 기존의 종교 시스템을 고발한다. 예수가 제의적 정결을 문제 삼고 성전 체제를 비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것이 1차적 위기의 징후라면, 그것에 대한 대안 없는 비판은 또 다른 위기의 징후가 될 수 있다. 하혈하는 여인은 유대 사회의 모든 질서의 근간이 되는 정결체계를 무시하고 자신의 피로 오염시킨다. 예수 역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된다는 계율을 어기고 스스로 오염된다. 유대의 청중들에게 공포와 혐오를 불러일으켰을 피의 유동성과 오염의 전염성은 그 자체로 위기의 신호로 지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제기되는 질문은 하나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기능을 상실한 기존의 제의적 체제를 대신해서 공동체를 폭력의 악순환과 무질서로부터 구원할 제의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가? 그들은 오염의 상징으로서 피와 구원의 상징으로서 피를 하나로 통합시킬 만한 상징적 메카니즘을 갖추고 있는가?

 

      마르코가 그 초석을 마련하고 있는 빵의 상징과 몸의 신학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리스도교가 이후 역사에서 거두게 될 기적에 가까운 성공은 놀라울 정도로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제의적 상징 체계를 창안한 데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교가 고대의 인신공양을 동물의 살과 피로 대체하는 제의로 전환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것을 다시 빵과 포도주라는 추상적 기호의 체계로 대체했다. 동물의 희생을 대신한 예수의 희생은 물질적 신체와 추상적 기호를 매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성소의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 곳에, 곧 사람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느님 앞에 나타나시려고 바로 하늘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대사제가 해마다 다른 생물의 피를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듯이, 당신 자신을 여러 번 바치시려고 들어가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세상 창조 때부터 여러 번 고난을 받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분께서는 마지막 시대에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죄를 없애시려고 단 한 번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을 바치셨습니다.” (히브 9, 24-28)

 

      마르코의 놀라운 신학적 상상력은 예수의 피를 여성의 피와 연결시킨데 있다. 가장 고결한 보혈을 가장 불결한 혐오의 대상과 연관시킴으로써 주변부 인생들을 위한 예수의 희생과 구원이 갖는 의미가 한층 부각된다. 더 나아가 마르코는 여성이야말로 하느님 나라를 주도할 사람들이라고 강조한다. 예수는 소녀에게 빵을 주라고 이르는데, 만일 빵이 예수의 몸이자 예수 자신이며, 그의 이야기 곧 복음이라면, 예수의 이 명령은 곧 여성이 생명의 담지자이자 그 나라의 주인임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들에서 남성 제자들을 빵을 빼앗기게 되고, 여성 제자들은 빵을 차지하게 된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