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21장-고향에서 무시당하다

ddolappa 2016. 10. 20. 17:37



제21장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마르 6, 1-6)

 

 

 

고향을 방문한 예수

 

      하혈하는 여인의 병을 치유하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구한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고향 나자렛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안식일이 되자 예수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은 예수가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있었던 사건과 유사하게 서술된다. 인식일, 회당, 예수의 가르침, 군중의 놀람 그리고 예수에 대한 배척까지 유사한 요소들이 등장한다. 또한 각각의 회당에서 일어난 사건 전후로 여인들에 대한 치유기사가 배치되어 있는 것도 구조적 유사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이 두 장면이 샌드위치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A. 카파르나움의 회당(1, 21-28)

B. 베드로의 장모 치유(1, 29-31)

B'. 하혈하는 여인과 야이로의 딸 치유(5, 21-43)

A'. 나자렛의 회당(6, 1-6)

 

      카파르나움의 회당과 나자렛의 회당은 ‘원(圓)’을 뜻하는 갈릴래아의 지명처럼 그 지역에서 행한 예수의 사역들과 가르침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자 사회적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기구인 회당은 여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데, 그것은 회당이 남성 중심적 착취 기능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복음은 바로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민중의 일원인 여성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주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가 전하는 새로운 가르침을 거부하고 그를 배척한다. 그들이 예수를 “마리아의 아들”이라 부른 것은 그들이 가부장적 가치관에 따라 예수를 판단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고대 사회에서 아들은 항상 아버지를 따라 불리워졌으며, 어머니의 이름이 불리워진 것은 아주 이례적인 것으로 그것은 사생아를 뜻하는 경멸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판관 11, 1-2). 결국 고향 사람들은 예수와 그의 가르침을 거부했고, 이후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가 회당을 방문하는 장면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고향 방문 후 예수는 제자들을 각지로 파견하는 한편 이방선교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것은 헌 가죽 부대와 같은 유대 사회의 폐쇄성으로 인해 새 포도주와 같은 예수의 새로운 가르침이 거부되자 그것을 담을 새로운 부대를 찾아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의 두 본성과 그의 정체

 

      카파르나움의 회당에서 예수는 비천한 출신지 때문에 모욕을 당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고향에서도 예수는 비루한 출신으로 인해 외면을 당한다. 두 지역 사람들은 모두 예수의 인간적 기원에 집착한 나머지 그의 신성을 올바로 인식하지 못한다. 이와 정반대의 입장에 선 인물은 처형장에 있던 로마의 백인대장이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예수의 찢어진 육신 속에서 신성을 발견하고 그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한다(15, 39).

 

      따라서 예수의 고향 방문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것은 그의 인간적 본성과 신성한 기원 사이의 충돌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을 함축하는데, 이어지는 마르코 복음의 이야기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끊임없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한다. 예수의 정체에 대한 물음은 곧 제자도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는데, 제자직은 그들이 따라가야 할 예수가 누구인가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예수의 고향 방문이 제자들을 위한 교육적 의도를 지닌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첫 문장에서 암시되고 있다. 예수가 앞서서 고향으로 향하고 제자들은 그를 따른다. 여기서 사용된 '따르다' 동사는 예수를 본받아 그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특수 용어이다(1, 17. 18. 20.; 2, 14; 10, 32; 15, 41). 따라서 이 단락에서 예수가 제자들을 동반하여 고향을 방문한 목적은 제자들의 파송에 대비해 그들이 배척을 받을 때 실망하지 않도록 경험을 쌓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미 마르코는 제자 열둘과 예수가 자신의 가족 및 친척들로부터 배척당한 이야기를 결합시킨 적이 있다(3, 13-19; 3, 20-35). 그는 이번에도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서 가족들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이야기 다음에 열두 제자를 파송하는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다. 예수가 자신의 고향에서 배척 당한 경험은 세상으로 나간 그의 제자들이 앞으로 겪게 될 운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A. 그 열둘의 선택(3, 13-19)

B. 혈육에 의한 배척(3, 20-35)

B'. 고향 사람들에 의한 배척(6, 1-6)

A'. 그 열둘의 파송(6, 7-31)

 

      가족을 포함한 친척 및 고향 사람들로부터 오해받고 외면 당하는 경험은 진정한 가족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제기하게 만든다. 이미 예수는 마리아와 그의 형제들이 그를 미쳤다고 여겨서 붙잡으러 왔을 때 그들을 ‘외부인’으로 간주하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가족이라고 선언한 바 있다(3, 35). 예수의 가족 개념은 피의 순결성을 기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엄격히 구분하던 유대 사회에 대한 도전이자 하느님의 나라를 인종적 차이를 뛰어넘어 전 인류로 확장시킬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만 한다면 누구나 하느님의 자녀이자 예수의 가족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고향 방문 이야기는 이방 선교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발판의 역할을 한다. 유대인들을 위해 하느님의 나라가 선포되었지만 그들이 거부했기 때문에 이방인들에게 그 은혜가 베풀어진다는 서사적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의 제자들 역시 스승의 이러한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였을까? 이방 선교를 위한 제자들의 뱃길 여행에서 그들이 마주치게 될 난관은 예수의 급진적 관념을 수용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6, 45-52).

 

 

기적의 필요조건으로서 믿음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의 지혜와 그가 일으킨 기적들을 소문으로 익히 알고 있었고, 심지어 목전에서 그 광경을 목격했음에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라는 그들의 감탄은 그 이유에 대한 또 다른 단서를 제공한다. 여기서 ‘기적들’로 번역된 그리스어 ‘뒤나미스’는 ‘권능’을 의미하기도 한다. ‘뒤나미스’를 권능으로 이해할 경우 이 표현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으로 이해했던 헬레니즘적 용법과 일치한다. 그러나 “그의 손”이라는 셈어적 표현은 예수가 일으킨 기적들이 그의 개인적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예수는 단지 하느님의 역사를 대리하는 인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시한다. 즉 예수의 기적들에서 하느님의 권능이 아닌 예수 개인의 능력만을 찾는 행위는 마치 가리키는 달은 보지 않고 그것을 지시하는 손만 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출신지, 직업, 가족 관계 등으로 한 개인을 판단하는 협소한 시각은 그들이 속한 현재를 오인하도록 할 뿐 아니라 다가오는 미래에 대해서도 눈을 감게 만든다.

 

      그 결과 예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킬 수 없게 된다. 예수의 기적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다가오는 구원을 고지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예수에 대한 거부는 곧 하느님의 구원에 대한 거부이고 구원이 거부되면 구원이 주어질 수 없다. 몇몇 병자들의 병을 고쳐주었다는 구절은 예수의 능력에 대한 부정적 판단을 완화시키려는 의도로 삽입된 것이다. 그렇더라도 기적을 일으키기 위한 필요조건이 믿음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믿음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기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없다면 기적도 없다. 이것은 이미 전에도 언급했듯이 하느님의 나라가 인간의 협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하느님의 나라와 인간의 관계를 믿음과 기적의 관계에 따라 재서술하면, 인간의 협력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자발적 참여가 없다면 하느님의 다스림은 지상에서 실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와 제자들의 선교사역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설득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반발과 거부 심지어 핍박을 당하기도 하겠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소명으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지상 과제이다. 더 나은 현실에 대한 소망이 포기되는 순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 같은 참혹한 현실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과정은 인간의 본향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혈연과 세속적 이해관계로 얽힌 지상의 고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나라를 본래의 고향으로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시작이자 그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명령으로 자신의 정든 고향을 떠나 이방의 땅으로 하느님이 약속한 땅을 찾아나섰듯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각자의 고향을 버리고 선교 사역에 매진했던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남긴 교훈은 바로 방랑설교자의 고단한 경험을 반영한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