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장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마르6, 7-13)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마르 6, 30-31)
제자들의 파송과 죽음의 예감
고향에서 쓰라린 경험을 한 예수는 이제 공적 활동에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그가 홀로 하던 사역을 제자들이 이어받도록 한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이 했던 대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더러운 귀신들을 쫓아내게 된다. 제자들의 파송을 통해 예수의 하느님 나라는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계승의 차원에서 시간적으로 확장된다. 예수가 없더라도 그의 사역은 제자들에게 이어져 그의 과업이 완수될 때까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제자들을 갈릴래아의 마을들로 보낸 것이자 미래의 시간 속으로 보낸 것이다.
예수의 이러한 결정은 그의 고향 방문에서 획득한 경험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먼저 1세기 지중해 세계는 현대의 개인주의와 정반대되는 상호관계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였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상호관계적 인격체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따라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고,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내면화시키면서 자아 이미지를 형성한다. 각 개인은 그들이 소속되어 있고, 그들이 구체화시킨 공동체의 가치들을 통해서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구분되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은 한 개인을 판단하는데 그의 출신지와 그가 속한 가문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가령,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사람들이 예수의 출신지로 그를 판단한 것이나 예수의 고향 사람들이 “마리아의 아들”로 그를 부른 것은 그 당시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을 반영한 것이다. 각 개인은 그가 속한 집단의 표상이자 대리자였기 때문에 한 개인을 판단하기 위해서 그가 속한 집단을 아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과 집단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는 사회에서 한 개인이 집단으로부터 추방을 당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일까? 어떤 사람이 그가 속했던 가문이나 마을의 사람이 더 이상 아니라는 선언은 곧 사회적 죽음을 판결 받은 것과 마찬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예수의 고향 사람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는데(6, 3), 이것을 직역하면 ‘걸려 넘어지다’로 ‘배척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고향 사람들의 통념과 가치관과 충돌하는 예수의 가르침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지시하며, 더 나아가 그러한 신념을 지닌 자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도를 내포한다. 따라서 예수가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당한 사건은 곧 그의 사회적 죽음이 선언된 사건이기도 하다. 이 단락에 이어 곧바로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서술된 것도 그것이 예수의 죽음에 대한 복선의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 문맥과 연관된다.
따라서 고향 방문 후 예수가 제자들을 파송한 것은 그의 죽음을 고려한 결정임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사후에도 제자들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사역이 계속 이어지길 희망했던 것이다. ‘이미’ 와 있지만 ‘아직’ 도래하지 않은 그 나라는 이제 인간이 시간 속에서 성취해야 할 과제가 된다.
제자도의 은유로서 신발과 지팡이
예수가 산에서 제자들 중 열둘을 따로 선출한 목적은 그들을 자신과 함께 지내게 하고, 또 그들을 파견해서 복음을 선호하게 하기 위함이었다(3, 14). 예수는 그들과 동행하며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쳤고, 이제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부여해 파견하기로 한 것이다. 제자들은 사역을 무사히 마치고 복귀했을 때 “사도들”(6, 30)로 새롭게 불리게 된다. 즉 그 열둘은 예수와 함께 있을 때는 그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이지만 예수가 없을 때는 그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자로서 그의 사역을 계승한 ‘사도들’이 된다.
예수는 바닷가에서 처음 제자들을 부를 때처럼 둘씩 짝지어 파송을 보낸다(1, 16-20). 이것은 두 명씩 파견을 나갔던 초대 교회의 선교 관행과 일치한다(사도 13, 1-3). 두 명 이상의 증언만이 법률적 효력을 지녔던 유대의 법률적 관습에 따라 2인으로 구성된 선교 파트너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 결코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험난했던 당시의 여행 환경을 고려할 때 2인의 파트너십은 서로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실제적 필요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제자들을 파송하기 전 예수는 그들에게 엄격한 행색의 지침을 내린다. 빵이나 여행 중 얻은 것을 담을 여행 보따리, 돈은 물론이고 돈을 넣을 전대도 금지되었다. 모두 생계와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이다. 대신 공격해 오는 짐승을 물리치는 지팡이와 단벌 옷과 신 한 켤레만이 허락되었다. 방랑하는 견유학파 철학자들이 요긴한 물건을 담을 수 있었던 배낭을 지참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예수의 제자들에게는 보다 더 엄격한 무소유의 삶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스승인 예수의 삶 자체가 그러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이미 가족도 잃었고 고향도 잃었고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었다. 혈연의 단절과 소유의 포기는 그들이 예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 이미 요구되었던 것이기도 하다(1, 16-20).
예수의 행색 지침은 생명 혹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은 금지하는 반면 여행 수단은 허락한다. 혹자는 이러한 특징에서 예수 운동의 방랑하는 카리스마나 마르코 공동체의 순례적 성격을 읽어내기도 한다. 즉 이 단락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로 표상되는 카리스마적 유랑지도자들의 삶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또 주후 66년에 발발한 유대-로마 전쟁에서 자신의 가족과 재산 등 모든 것을 잃은 처참한 상태에 처한 마르코 공동체 구성원들의 순례자적 삶의 정황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서 텍스트에서 공동체가 처한 삶의 정황을 밝히려는 이러한 사회사적 시도들은 이 단락의 비유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즉 ‘지팡이와 신발’은 제자도의 은유로서 “길의 복음서”인 마르코 복음의 의도에 부합되며, 그것은 나그네의 삶을 살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무시한다. 생계 수단이 전무한 나그네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람들의 환대에 의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고,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 역시 설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환대에 의존한 삶 속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팡이와 신발마저 금지시킨 마태오와 루카는 이러한 마르코의 의도를 완전히 오인한 것이다(루카 9, 3; 10, 4; 마태 10, 9-10).
환대의 공동체
나그네는 이스라엘 민족의 땅에서 더부살이하던 떠돌이 이방인들로서 과부나 고아들과 동등하게 사회적 약자로 인정받아왔다. 구약성서의 율법적인 가르침은 이러한 나그네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고 사랑으로 대하라는 교훈을 전통으로 전하고 있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신명10, 18-19; 탈출 22; 21; 23, 9)
예수는 이질적인 타자들, 특히 연약한 변두리 존재들을 사랑으로 환대하는 율법적인 전통을 새로운 공동체의 윤리적 토대로 더욱 급진화한다. 예수가 유대의 정결 이데올로기에 의해 ‘죄인들’로 취급되던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 나라의 식탁교제에 초대했던 기억은 이제 카리스마적 예언자들을 지역교회에서 영접하는 관행으로 확대된다. 제자들은 말씀 선포와 치유와 축귀의 은총을 베풀고, 지역 사람들은 응답으로 잠자리와 먹을 것을 제공함으로써 그들 간에 호혜적 공동체성이 생겨난다. 환대의 윤리와 호혜적 관계성에 기반한 새로운 공동체는 타자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를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제시되고 있는 행색 목록은 새롭게 건설되어야 할 공동체의 구성 원칙에 대한 비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공동체는 이방인, 여성 그리고 나그네와 같은 사회적 타자들을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태도로 환대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신학적 논리에 따르면 이질적인 타자를 타자성의 이름으로 영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공동체는 예수를 배척한 그의 고향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를 배척하는 논리적 근거는 혈연적 관계에 토대를 두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공동체가 얼마나 자기 동일적이고 폐쇄적인가를 여실히 증명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고향은 하느님의 구원을 거부한 희망 없는 옛 세계를 상징한다.
여기서 주목할 또 다른 사실은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그네가 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자발적으로 타자가 된다는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발적 빈곤과 무소유의 삶을 살도록 요청했던 까닭은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이 가난하고 병든 빈민층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타자에게 환대를 베푸는 시혜자가 아닌 환대를 받아야 할 사회적 타자로서 다른 타자들과 만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적 타자로서 다른 타자들을 만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모든 생존 수단을 박탈당한 제자들의 극단적 상황은 다른 사람들의 우호적 환대에 의존해서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만든다. 그들은 날마다 자신들에게 베풀어지는 타인들의 물질적 호의와 환대 속에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는 하느님의 은총을 경험하게 된다. 사람들이 제자들의 선포와 사역을 통해 하느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처럼 제자들 역시 자신들에게 되돌아오는 사람들의 환대에서 하느님을 경험하게 된다. 즉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가르치는 동시에 그들로부터 복음을 배우게 된다. 결국 제자들과 사람들은 일방적인 시혜자와 피시혜자,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닌 상호부조적인 협동 관계를 형성한다. 즉 타자로서 타자를 만난다는 것은 서로에게서 타자성으로 표현되는 신성을 지각하고, 서로 돕는 수평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내려놓음은 새로운 공동체의 첫 시작이다. 모두가 생존을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사회에서 먼저 자기가 가진 것 모두를 포기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 그 나라에 대한 절대적 믿음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물질적 결핍을 보충해주리라는 낙관적 태도를 요구한다. 우리는 이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에서 예수의 심원한 낙관주의를 확인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초기 예수운동의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절대적 확신이 있었다.
“오늘 들에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마라. 염려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 세상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것들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루카 12, 28-31; 마태 6, 33-33)
또한 사회적 타자가 된다는 것은 그 사회의 불의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할 때 그들에게 부여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단지 사악한 영적 존재에 대한 지배권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미 전에 언급했듯이 더러운 영은 개인의 육체 속으로 침투할 뿐만 아니라 불의한 권력 구조, 착취적 경제 관계, 억압적 이데올로기 등 사회의 제도들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제자들의 활동 결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헤로데 왕에게도 소문이 전달되고, 그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이 예수를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부활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6, 14-16). 이 장면은 제자들의 파견 활동이 헤로데 왕의 주의를 끌 정도로 사회 비판적 성격을 띤 활동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왕의 부정한 결혼을 비판하다가 죽은 요한과 예수를 동일시하는 헤로데의 반응은 예수의 이름으로 실천된 제자들의 활동 역시 기존 권력에 비판적인 것이었음을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불의한 사회 구조에 포섭되지 않은 타자가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타자들과의 만남을 통해 연대를 형성해서 기존 사회구조를 타파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과제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운명 공동체로 묶인 요한, 예수 그리고 제자들
선포와 축귀는 예수 사역의 두 핵심이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다니시며, 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셨다.”(1, 39) 예수가 제자들 중 열둘을 따로 뽑은 까닭도 그들을 파견해서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들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3, 14-15) 파송된 제자들이 한 활동도 선포하고 마귀를 쫓아내는 일이었다(6, 12-13). 따라서 예수의 선포와 축귀는 제자들을 위한 ‘모범’이고, 열둘을 따로 세운 것은 예수의 사역을 이어가도록 하기 위한 ‘위탁’이며, 파송된 제자들의 활동은 예수 사역의 ‘계승’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제자들은 회개하라고 선포도 했는데, 그 순간 그들은 먼저 회개를 선포했던 요한(1, 4)과 예수(1, 15)와 같은 운명으로 묶이게 된다. 마르코는 이야기의 구조를 통해 그들 간의 연관성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제자들의 파송 이야기(6, 7-13)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 이야기(6, 14-29)로 잠시 중단되었다가 제자들이 돌아와 보고하는 것(6, 30-31)으로 마무리된다. 마르코는 이러한 샌드위치 구성을 통해 파송된 제자들이 활동한 공간과 시간이 의로운 예언자가 죽임을 당하는 현실임을 암시한다. 불의한 세상에서 하느님의 의를 실천하다가 죽임을 당한 요한처럼 예수와 그의 제자들 역시 동일한 운명을 겪게 될 것이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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