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23장-세례자 요한의 죽음

ddolappa 2016. 11. 5. 05:34

제23장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 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였다.

 

이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붙잡아 감옥에 묶어 둔 일이 있었다. 그의 동생 필리포스의 아내 헤로디아 때문이었는데, 헤로데가 이 여자와 혼인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한은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여러 차례 말하였다. 헤로디아는 요한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기회가 왔다. 헤로데가 자기 생일에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을 청하여 잔치를 베풀었다. 그 자리에 헤로디아의 딸이 들어가 춤을 추어, 헤로데와 그의 손님들을 즐겁게 하였다. 그래서 임금은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나에게 청하여라. 너에게 주겠다.” 하고 말할 뿐만 아니라, “네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 내 왕국의 절반이라도 너에게 주겠다.” 하고 굳게 맹세까지 하였다. 소녀가 나가서 자기 어머니에게 “무엇을 청할까요?” 하자, 그 여자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여라.” 하고 일렀다. 소녀는 곧 서둘러 임금에게 가서,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청하였다.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임금은 곧 경비병을 보내며, 요한의 머리를 가져오라고 명령하였다. 경비병이 물러가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어, 머리를 쟁반에 담아다가 소녀에게 주자, 소녀는 그것을 자기 어머니에게 주었다. 그 뒤에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 (마르 6, 14-29)

 

 

 

예수의 수난 예고로서 요한의 수난 이야기

 

      제자들의 성공적인 사역 활동으로 인해 갈릴래아 전역에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중들은 예수를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가운데 하나'로 인식했다. 이것은 당시 여론이 예수를 하느님의 뜻을 인간 사회에 전하는 예언자로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적 속에서 예수가 예언자 이상의 존재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예수의 명성이 그의 정체를 노출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실체를 은폐시키는 베일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헤로데의 반응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헤로데는 예수로 인해 요동치는 민심 때문에 그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되지만, 그는 예수를 자신이 살해한 요한이 되살아난 것으로 생각한다. 마르코 복음은 요한을 예수의 선구자로 파악한 반면(마르 1, 2-8), 대중 여론과 헤로데는 예수를 요한의 후계자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예수에 대한 헤로데의 관심은 오로지 대중 선동과 그로 인한 정치적 불안에 대한 우려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의 반응은 예수의 죽음을 이해할 중요한 틀을 제공한다. 즉 요한에 대한 헤로데의 죄의식이 투영된 반응에는 권력자에 의한 불의한 죽음과 신에 의한 정당화란 해석학적 구조가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예수 역시 요한과 마찬가지로 불의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지만 부활을 통해 존재의 정당성을 입증하게 되리라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예수에 대한 대중 여론과 세례자 요한의 수난 이야기를 결합하고 있는 이 단락은 서사적 구조를 고려할 때 보다 심도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 우선 이 단락은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의 수난 예고에 대하여 구조적 병행 관계에 있다.

 

A. 대중적 여론: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 하나(6, 14-15)

B. 헤로데의 견해: 요한(6, 16)

C. 요한이 수난을 당하다(6, 17-29)

A'. 대중적 여론: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 하나(8, 27-28)

B'. 베드로의 고백: 그리스도(8, 29-30)

C'. 그리스도가 수난을 당하다(8, 31)

 

      이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묻고, 베드로는 그리스도라고 답하게 된다. 고향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예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대중들의 여론을 거쳐 마침내 제자들에 의해서 올바른 대답을 얻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세 차례나 계속 된 예수의 수난 예고(8, 31-33; 9, 30-32; 10, 32-34)에 대해 제자들은 매번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며, 따라서 제자들의 견해를 대변하는 베드로의 고백 역시 예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로 볼 수 없다.

 

      이러한 사실에서 이 단락이 제자들의 파송 활동과 결과 보고 사이에 삽입된 이유를 유추해볼 수 있다. 즉 제자들은 자신들의 성공적인 활동에 열광하고 도취되어 있지만, 그것은 권력에 도취된 헤로데의 태도와 흡사할 뿐이다(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의 경고. 8, 15). 제자들의 실상은 예수의 수난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불신앙의 위험에 직면해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 곧 들이닥칠 운명조차 예상하지 못하는 맹목 상태에 빠져 있다. 왜냐하면 제자들 역시 세례자 요한(1, 4. 14)과 예수(1, 14; 9, 31)과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파하고 넘겨질 운명이기 때문이다(13, 9. 10). 제자들의 그리스도 이해 속에는 예수의 신적 능력과 초인간적 지혜를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만 있을 뿐 예수의 대속적 죽음(10, 42-45)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이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자연스러운 서사적 진행을 중단하고 갑자기 삽입된 요한의 수난 이야기는 예수의 수난 서사를 예고한다는 점에서 기능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실제로 요한의 수난 이야기에서 사용된 많은 요소들이 예수의 수난 이야기(14, 1-15, 47)에서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가령, 체포(6, 17; 14, 46), 살해음모(6, 19; 14, 1), 두려움(6, 20;14, 2), 사형 압력(6, 26; 15, 10), 매장(6, 29; 15, 45), 부활(6, 16; 16, 6) 등이 그 대표적 병행 요소들이다.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

 

      여기에서 언급되고 있는 헤로데는 헤로데 대왕(BC 37-4)의 다섯 번째 아들인 헤로데 안티파스를 가리킨다. 헤로데 대왕의 사후 그의 왕국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분할되어 그의 아들들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누구도 헤로데가 누리던 왕의 칭호를 부여받지 못했고 분봉왕의 칭호에 만족해야 했다. 동화풍으로 번역된 "임금"이란 말은 원래 헤로데 대왕을 지칭하던 명칭이다. 따라서 로마에 종속되어 있는 일개 예속 지배자에 불과한 안티파스에게 "왕"이란 호칭을 부여한 것은 비꼼의 의도로밖에 볼 수 있다.

 

      실제 역사에서 안티파스는 왕이라는 칭호에 대한 집착 때문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 안티파스는 왕이 되려는 숙원을 성취하기 위해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의 딸과 정략결혼을 했다. 그러나 후궁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지지기반이 취약했던 안티파스는 정통성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나바테아의 공주와 이혼을 하고 헤로디아와 결혼하게 된다.

 

      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헤로디아는 안티파스의 이복 형제인 아리스토불로스의 딸이자 또 다른 이복 형제인 보에투스의 아내로서 헤로데 가문과 하스몬 가문의 피를 이어받았다. 마르코가 헤로디아를 필리포스의 아내라고 기술한 것은 명백한 착오로, 필리포스는 안티파스의 생일날 그의 앞에서 춤을 춘 헤로디아의 딸 살로메와 결혼했다. 유대를 대표하는 양대 가문으로부터 권력욕을 이어받은 헤로디아는 그녀의 무능력한 남편 보에투스와 이혼하고 그녀의 야망을 충족시켜줄 야심만만한 권력자 안티파스와 결합하게 된다. 따라서 안티파스와 헤로디아의 결혼은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켜준 이상적인 결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왕위를 향한 집착에 가까운 그들의 열망은 결국 그들을 파멸시키고 말았다. 주후 37년 로마의 황제로 등극한 칼리굴라는 헤로디아의 친오빠 아그리파 1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칼리굴라가 아그리파 1세에게 왕위를 부여하리라는 소식을 접한 헤로디아는 안티파스를 충동질해 두 사람의 사이를 이간질하도록 했다. 하지만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는 오히려 로마에 대한 반란의 혐의로 영지를 몰수당한 뒤 갈리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최후를 맞는다.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가 평생토록 그토록 열망했던 왕의 칭호는 예수에게 부여된다. 예수의 죄명 패에는 ‘유대인들의 왕’이라 적혀 있었다(마르 15, 26). 그것은 십자가에 달린 농민 출신의 예언자에 대한 조롱이었지만 예수의 정체에 대한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했고(마르 1, 15),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을 조직했으며(마르 3, 13-19), 새로운 통치 원리로 ‘섬김’을 제시했다(마르 10, 41-45). 그는 그리스도이자 또한 왕이었으며, 그가 건설하려는 나라는 협소한 유대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 세계의 인류를 아우르는 것이었다.

 

      이 단락의 서술 초점이 예수에서 세례자 요한으로, 그리고 헤로데와 그의 궁전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점차 이동한 것은 예수의 적대자로 설정된 헤로데당에 대한 이데올로기 투쟁의 의도가 관철된 결과다. 헤로데 가문을 중심으로 통일된 유대 왕국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헤로데당의 실체는 요한이 갇힌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화려한 주지육림의 잔치상, 살로메의 음란한 춤사위, 간교한 계략과 음모, 쟁반 위에 담긴 요한의 잘린 목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들을 통해 요약적으로 제시된다.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로 구성된 그들은 친로마적 어용정권인 만큼 반유대적이었고, 목적을 위해서는 딸조차 창녀로 만들 만큼 부도덕했으며, 정권 유지가 지상 최대의 목표였으므로 이를 위해서는 살인도 서슴치 않을 만큼 잔악했다. 한 마디로 철저하게 반민중적이고 지독히 권력지향적인 그들이 성향이 다른 바리사이파와 합심해서 예수의 적대자로 등장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마르 3, 6; 12, 13).

 

 

박해와 수난의 기록

 

      세례자 요한이 안티파스의 혼인을 비난한 것은 단순히 조카이자 제수인 여자와 결혼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그것이 하느님의 율법에 어긋나는 비합법적 결합이라는 사실에 있다. 유대의 율법은 형의 후사를 잇기 위하여 형수와 결혼하는 경우(형사취수제)를 제외하고 다른 형제의 부인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레위 18, 16; 20, 21). 그러므로 마르코 복음은 세례자 요한이 율법의 준수를 주장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그리고 있다.

 

      요세푸스는 요한이 뛰어난 능변과 대중적 인기에 힘입어 소요를 일으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안티파스가 그를 살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요한의 죽음의 원인을 안티파스의 비합법적 결혼에 대한 비판에서 찾고 있는 마르코의 견해와 모순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 둘의 의견은 사실 동전의 앞뒤 면과 같다. 당시의 대중적 운동 자체가 본래 반체제적 성격을 띤 것이어서, 만일 요한이나 그 추종자들이 안티파스의 불법성을 공공연히 비난했더라면 요한이 이끌던 대중운동 역시 얼마든지 반체제적인 운동으로 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세푸스는 하느님의 율법을 위반하면 반드시 징벌이 내린다는 일관된 주제로 역사를 기술했다.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는 자신의 딸을 버린 안티파스의 행동을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하고 그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고, 안티파스는 이 전쟁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당시의 여론은 헤로데의 군대가 파멸당한 것을 경건한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한 하느님의 복수라고 생각했다. 요세푸스의 관점에서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는 자신의 탐구 주제에 걸맞는 한 사례였을 뿐이다.

 

      요세푸스와 달리 마르코를 포함한 복음서의 저자들은 요한을 “그리스도교의 전통 안에 있는 인물”로 이해한다. 이미 복음서의 첫머리에서부터 요한은 예수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 등장한다(마르 1, 2-3). 하지만 신약성서 안에는 요한의 제자들이 그의 사후 그리스도교로 흡수되지 않고 독립된 그룹으로 활동을 계속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구절도 등장한다(사도 19, 1-5). 특정한 교훈이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과감히 생략하거나 축소하기도 했던 고대인들의 역사 서술 방식을 고려할 때, 요세푸스의 기록이 무조건 맞고 마르코의 서술이 완전히 틀렸다고 일방적으로 평가할 수 없다. 요세푸스가 예수와 요한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생략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야기가 전달되는 전후맥락, 사용된 문학적 기법의 분석, 관련 저술들과의 비교, 텍스트가 생성된 역사적 맥락 등 다양한 요소들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텍스트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요한의 수난 이야기의 경우 다양한 구약성서의 모티브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다윗 왕이 권력을 이용해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 세바를 취하고 이것을 예언자 나탄이 비판한 사건에서 취한 것이다(2사무 12장).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가 요한을 죽이는 줄거리는 사악한 아합 왕과 그의 간교한 아내 이제벨이 예언자 엘리야의 목숨을 노린 사건에서 온 것으로, 이것은 요한을 부활한 엘리야로 간주한 당시의 여론에 부합한다. 또 연회에서 여인의 미모를 이용하여 적의 목숨을 노린 계략이나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는 왕의 맹세는 에스테르 이야기로부터 인용한 것이다(에스 1, 3; 5, 3; 7, 2).

 

      마르코는 당시의 대중들에게 익숙한 문학 모티브를 활용해 요한의 죽음을 재구성함으로써 이 사건을 쉽게 기억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의로운 예언자가 불의한 권력자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는 주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었다. 요한의 죽음을 요세푸스는 하느님의 정의로운 심판이라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이용한 반면, 마르코는 불의한 세력에 의한 정의의 상실에 보다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요한이 요세푸스의 기록에서처럼 마캐러스 요새에서 죽지 않고 세포리스의 연회에서 참수당한 것처럼 묘사한 것 역시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의로운 자의 비극적 죽음을 강조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문학적 요소들은 마르코가 예수의 수난에 대한 복선으로 요한의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로마인들과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핍박을 당해야 했던 그의 공동체의 경험이 반영된 결과이다(마르 13, 9-13). 마르코의 공동체 사람들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고난을 요한과 예수가 당해야 했던 수난이 여전히 지속된 것으로 이해하고 이로부터 위안을 받고 살아갈 용기를 얻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실증 가능한 사실에 집착하는 경향은 서양의 근대적 산물로 고대인들의 기록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역사의 기록인 요세푸스의 저술에도 고의로 누락되거나 은폐된 진실이 존재하며, 신앙의 기록인 복음서에도 감출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구적 형식을 통해 전달된 진실은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가혹하기조차 한 것이다. 따라서 사실인가 아닌가에 집착하기 보다는 텍스트가 들려주는 이야기 자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럴 경우 마르코 복음은 이런 질문을 현재의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신이 경험한 실제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의로운 곳인가, 아니면 불의한 세력들이 여전히 정의로운 자들을 죽이거나 침묵시키는 정의롭지 못한 곳인가.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