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24장-오 천 명을 먹이다

ddolappa 2016. 11. 30. 05:38

 

제24장

 

 

사도들이 예수님께 모여 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어느덧 늦은 시간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저들을 돌려보내시어, 주변 촌락이나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것을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은 "그러면 저희가 가서 빵을 이백 데나리온어치나 사다가 그들을 먹이라는 말씀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아라." 하고 이르셨다. 그들이 알아보고서, "빵 다섯 개,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시어, 모두 푸른 풀밭에 한 마리씩 어울려 자리 잡게 하셨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떼를 지어 자리를 잡았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물고기 두 마리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빵을 먹은 사람은 장정만도 오천 명이었다.(마르 6, 30-44) 

 

 

휴식인가 도피인가

 

      파송을 떠났던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에게 ‘자기들이 한 일’(축귀와 치유)와 ‘가르친 것’(회개의 선포)을 보고했다. 이에 예수는 제자들에게 휴식을 권했지만 몰려드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제자들은 식사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장면을 앞 단락과 연관시켜 살펴보면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받게 된다. 바로 앞 장면에서 헤로데에 의해 요한이 참혹한 죽음을 맞이한 모습이 그려졌다. 헤로데는 제자들의 왕성한 활동으로 인해 예수에 관한 소문을 접하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 하고 말하기조차 했다. 헤로데의 대사는 그가 요한을 죽였던 것처럼 예수도 죽이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제자들의 보고에는 헤로데에 의한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도 분명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하고도 예수는 별다른 동요 없이 제자들에게 휴식을 권하고 평소처럼 하던 일을 계속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예수와 제자들은 왜 갑자기 따로 배를 타고 외딴 곳으로 떠났던 것일까?

 

      마르코 복음서의 최초의 독자들 중 하나였던 마태오는 이 장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서술한 다음 이어지는 장면에서 제자들과 관련된 문장을 생략하고 곧바로 다음 문장으로 서두를 연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거기에서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마태 14, 13) 즉 요한의 죽음을 알게 된 예수는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났다는 것인데, 이것은 신변의 위험을 느낀 예수가 헤로데의 영향권을 피해 떠났다는 의미이다. 예수 당시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페레아 지역에 대한 통치와 치안을 맡고 있었고,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은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다. 각 지역은 분리된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있었고 서로의 치안권을 달리했다. 그러므로 예수는 안티파스의 치안권 밖으로 피신해서 안전을 도모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는 구절을 다시 해석해볼 여지가 생긴다. 여기서 “쉬어라”를 뜻하는 ‘아나파우오’ 동사는 ‘멈추다, 정지하다, 그만두다’의 의미도 갖고 있다. 하던 일을 멈추는 것이 곧 쉬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문맥에서는 ‘활동을 중단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예수는 위험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제자들의 활동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렇게 볼 경우 “따로”로 번역된 그리스어 ‘카트 이디안’ 역시 ‘각자’로 옮겨지는 게 나을 것 같다. '따로‘로 옮길 경우 외딴곳이 따로 떨어진 장소라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파송에서 돌아온 제자들에게 예수가 휴식을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상황을 고려하여 잠시 활동을 중단할 것을 강하게 명령하는 것을 뜻한다. 너희는 각자 외딴곳으로 가라! 그리고 활동을 잠시 중단하라! 왜냐하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 신분이 노출되기 쉬웠고 먹을 겨를조차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하게 돌변했기 때문이다.

 

 

목자 없는 양들

 

      예수와 제자들이 피신한 곳에는 그들보다 먼저 도착한 수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다. 예수는 모인 군중들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이다. 목자 없는 양떼는 그들을 인도할 보호자가 없기 때문에 흩어져서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고 마는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문맥상 민중의 정신적 지도자인 세례자 요한을 상실한 백성들을 가리킨다. 요한의 죽음으로 인한 예수의 슬픔은 지도자를 상실한 백성들에게로 전이되어 그들을 목자 없는 양떼의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구약 성서적 배경(민수 27, 17)을 지니는 이 표현은 또한 헤로데의 폭정에 대한 비판을 함축한다. 분봉왕이긴 하나 안티파스가 왕으로 엄연히 존재함에도 그의 백성들을 지도자가 없는 무리로 이해한 것은 역으로 안티파스를 참다운 목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정치 비판적 의도는 ‘헤로데의 궁전/외딴곳’, ‘화려한 잔치/소박한 식사’, ‘쟁반에 담긴 요한의 머리/푸른 풀밭’ 등의 대조적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된다. 헤로데의 궁전이 인간을 말살하는 타락한 옛 세계를 표상한다면, 예수와 제자들이 피신한 외딴곳은 인간다움의 가치와 하느님의 통치가 살아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

 

      헤로데의 궁전과 예수의 광야 간의 공간적 대립은 갈릴래아 지역에서 도시와 촌락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기억에 근거한다. 안티파스는 이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획득한 직후 세포리스를 재건했고, 20년도 채 안 돼서 티베리아스를 새로 건설했다. 세포리스는 페르시아 시대부터 로마 시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의 정권들이 주민들을 통치하고 과세를 징수하기 위한 행정 도시로 사용되었다. 안티파스는 갈릴래아 바다 서쪽에 새로운 황제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딴 티베리아스를 건설하고 이곳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다. 안티파스가 티베리아스를 새로운 수도로 정한 목적은 갈릴래아 바다를 상업화해서 새로운 세원(稅源)을 늘리기 위함이었다. 세포리스 주변의 비옥한 토지를 이미 착취하고 있었던 것처럼 티베리아스 부근의 바다를 통제하고 어민들을 착취해서 생산성을 증대시켜서 로마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것이 안티파스의 궁극적 계획이었다. 하지만 도시를 새로 건설하고 또 유지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재화를 필요로 했고, 그로 인해 갈릴래아와 페레아의 농민들 및 어민들의 경제적 부담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세포리스는 예수의 고향 나자렛에서 불과 4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티베리아스는 예수의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던 카파르나움과 갈릴래아 바다를 두고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갈릴래아의 촌락민들은 이전에는 멀리 떨어진 수도들로부터 통치를 받다가 이제는 반나절이면 걸어갈 수 있는 근거리에 위치한 왕의 수도를 직접 겪게 된 것이다. 로마 제국과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이익을 대변했던 두 도시는 갈릴래아 사람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압박하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실체였다. 전통적 공동체의 질서에 따라 살던 촌락민들이 율법과 관습을 무시하고 무덤가 위에 세워진 티베리아스에서 헬레니즘적 라이프 스타일에 따라 살던 지배계층의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지 상상해보도록 하자. 헤로데의 궁정 장면에서 등장한 음모, 방탕, 문란함, 죽음 등의 이미지는 지배계층에 대한 민중들의 정서적 반응들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는 죽음을 맞이하러 예루살렘을 방문한 것 외에 도시를 들른 적이 없으며, 그의 선교 활동이 주로 갈릴래아의 촌락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예수와 예수 운동이 지배자들의 헬레니즘적 도시화 정책에 저항했던 민중들의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운동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목자 없는 양들”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정황에 대한 성서적 답변이다.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약탈당하고, 나의 양떼는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는데, 나의 목자들은 내 양떼를 찾아보지도 않았다. 목자들은 내 양떼를 먹이지 않고 자기들만 먹은 것이다.”(에제 34, 8) “나는 그들 위에 유일한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게 하겠다. 바로 나의 종 다윗이다.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 것이다.”(에제 34, 23) 구약의 예언은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서 탐욕스럽기만 한 목자들(지도자들)을 벌하고 양떼를 돌볼 새로운 목자가 나타날 것을 예언하는데, 복음서는 그것을 다윗의 후손인 예수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 단락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환기하는 한편, ‘목자 없는 양들’ 모티브에서 발견되는 ‘지도자’와 ‘먹임’의 주제를 그리스도론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목자 없는 양들”은 예수 사후의 제자들과 교회를 가리키는 은유로도 볼 수 있다. 예수는 자신의 비극적인 죽음과 제자들의 비겁한 도주를 예견한다.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마르 14, 27) 예수는 자신의 죽음 후 곧 ‘목자 없는 때’를 상정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단 한 번 사용된 ‘사도들’(보냄을 받은 자)이란 초기 그리스도교의 용어가 이곳에서 등장한 것 역시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한다. 즉 이 이야기는 예수의 죽음 이후 제자들이 활동하는 교회의 시대를 반영한다.

 

 

지도자와 빵의 문제

 

      외딴곳으로 모여든 군중들을 보고 불쌍한 마음이 생긴 예수는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지만 가르침의 구체적 내용은 언급되지 않는다. 대신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인원을 먹인 기적 이야기가 그 뒤에 이어진다. 그렇다면 급식 기적 설화는 군중에게 가르친 내용을 형상화한 이야기이고, 가르침의 내용을 먹이는 이야기로 구체화시켜 풀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야이로의 딸을 살린 이야기에서부터 예수는 곧 ‘빵’(먹을 것)이며, 빵을 먹는다는 것은 곧 예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도식이 설정되었기 때문이다(5, 43).

 

      예수와 제자들이 갈등하는 문제 역시 ‘빵’의 문제다. 제자들은 군중이 각자 알아서 굶주림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예수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스승의 주장에 대해 제자들은 모인 사람들을 먹일 빵을 살 수 있는 충분한 돈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난색을 표한다(당시 하루 일당은 1데나리온이었고, 빵을 사기 위해 필요한 200데나리온은 상당한 거금이었다). 제자들에게 빵의 문제는 곧 돈의 문제다. 예수의 ‘가엾은 마음’ 속에서 무리는 ‘목자 없는 양들’로서 먹여야 할 대상이지만, 그러한 마음을 갖지 못한 제자들에게 군중의 배고픔은 단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인식된다. 배고픈 사람들은 예수를 향해 모여들지만,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을 심지어 ‘돌려보내려’, 즉 해산시키려 한다. 제자들의 이러한 태도는 행색지침에서 돈과 전대의 소유를 금지시켰던 예수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한다(6, 8).

 

      농촌과 도시 간의 갈등은 돈을 매개로 예수와 제자들 사이의 갈등으로 전이된다. 시장 경제가 등장하기 전 인간은 사회 집단의 일원이었고, 개인의 경제 행위는 비경제적 목표들을 포함하는 더 넓은 범위의 사회적 관계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갈릴래아의 촌락들을 통제하고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세포리스와 티베리아스는 조세 제도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사회적 관계를 재편했다. 헤로데에 대한 세금, 로마에 대한 조세, 성전과 사제 계급을 위한 십일조와 현물 등 삼중의 경제적 착취로 인해 자급자족적 삶을 이상으로 삼고 살았던 촌락민들은 조상들의 땅을 빼앗기고 농노나 노예로 전락하거나 뿌리 뽑힌 존재로 유랑걸식해야 했다. 돈은 포괄적인 사회적 관계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기 시작했고, 갈릴래아의 주민들에게 돈의 힘은 전통적인 공동체의 삶을 파괴하는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제자들의 언술 속에 돈과 돈의 파괴적 힘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정황을 암시한다. 따라서 예수와 제자들 간의 갈등은 무리를 어떻게 먹일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적 차이 이상의 문제를 내포한다. 그것은 로마 제국과 헤로데에 의해 장악당한 현실 속에서 하느님 나라의 경제적 비전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예수는 제자들에게 빵을 몇 개나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이에 제자들은 그에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져왔다. 예수는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데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그리고 사람들을 백 명씩 혹은 오십 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했다. 불모지와 다름없던 빈터는 예수의 개입을 통해 질서와 조화를 갖춘 '약속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날이 저물어 사방을 점령한 어둠을 뚫고 돋아난 풀밭의 푸른빛은 죽어가던 사람들의 마음 속에 돋아난 생명의 빛을 시각화한 것으로 예수가 일으킨 기적의 시작을 알린다. 예수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한 뒤 제자들을 시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도록 했다. 그러자 모든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은 빵 조각과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울 정도로 남았다.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행위와 그로 인해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은 결과 사이에는 기적이란 이름의 비약이 존재한다. 몇 사람이 먹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음식으로 어떻게 장정만 오천 명이 넘는 인원이 먹고 배부를 수 있었을까? 이성과 신앙 사이의 간극은 예수의 연속적 동작을 가리키는데 사용된 네 개의 동사에 대한 신학적 성찰을 통해 메워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마르 6, 41)

 

"예수님께서는 (....)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마르 8, 6)

 

"(....)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마르 14, 22)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방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1코린 11, 23-24)

 

      가지다(들다), 축사하다(찬미하다), 떼다, 주다. 이 네 동사는 두 번째의 급식 기적(8, 6)과 최후의 만찬(14, 22)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이 네 가지 연속적인 동작은, 사도 바오로가 기록한 코린토 서신에서 보듯, 성만찬의 핵심을 구성한다(1코린 11, 23-24). 네 가지 동작은 각각의 의미를 갖는데, 우선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어진 조건이 모든 가능성의 시작이라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전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찬미와 감사가 따른다. 즉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받은 것이며, 본래의 주인은 하느님으로 우리는 그로부터 잠시 빌려 쓰는 것일 뿐이다. 소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자기의 것을 다른 이와 함께 나누고(떼다), 자신의 소유와 생명을 희생하여 다른 이에게 줄 수 있게 한다(주다). 왜냐하면 '주신 분'의 뜻을 헤아려 '받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받은 자'에게 기대되는 합당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주신 분'의 뜻은 '가엾은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다면 아무리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있더라도 선뜻 그것을 나누어주지는 못하며, 설령 율법의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선행을 베풀더라도 그것은 자율적 도덕이 아닌 타율적 강제일 따름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이미 나병 환자의 치유를 통해 제시된 바 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마르 1, 40) 율법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을 규정한다면, 예수의 복음은 행하고 싶어서 실천할 수밖에 없는 것, 즉 인간의 이타심에 호소한다. 그래서 복음은 율법보다 높은 차원의 도덕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 20)

 

      예수가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전하고 했던 가르침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나눌 수 있는 마음 곧 '가엾은 마음'에 있다. 예수가 빵과 물고기를 사람들에게 직접 나누어 주는 대신 제자들을 시켜 나누어 주도록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배고프고 굶주린 상태는 모두 동일하지만 자신의 주린 배를 먼저 채우기보다는 생면부지의 낯선 이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줌으로써 사람들 사이에서 나눔의 은혜를 촉발시켰고,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킨 결과 모두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야기 모델과 그 변형

 

      안티파스의 식탁이 사람을 죽이는 살육의 잔치였다면, 예수의 식탁은 인간을 살리는 생명의 잔치이다. 이미 예수는 세리와 죄인을 자신의 식탁 안으로 포용했고(2, 13-17), 식탁교제를 통해 죄의 용서와 해방의 축제를 선포했으며(2, 18-22),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안식일의 본래 정신임을 천명했다(2, 22-28). 예수의 식탁교제는 더욱 확장되어 "목자 없는 양떼"와 같은 거대한 군중을 먹이게 되었다(6, 32-44).

 

      예수의 급식 기적은 엘리야와 엘리사의 고사를 모델로 하고 있다. 엘리야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가뭄이 해갈될 때까지 단지에서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는 기적을 베풀었다(1열왕 17, 8-16). 엘리사는 가뭄이 들었을 때 보리 빵 스무 개와 햇곡식 이삭으로 백 명이나 되는 무리를 먹이고도 남긴 기적을 베풀었다(2열왕 4, 42-44). 엘리야와 엘리사는 가뭄과 같은 재해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 과부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먹이는 것이 참된 목자의 자세임을 예시한다.

 

      예수의 경우 군중이 배고픔을 겪는 이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시대적 정황과 문맥을 고려할 때 로마 제국과 헤로데의 착취로 인한 것임을 유추할 수 있다. 예수와 제자들이 배로 이동을 할 때 그들을 따라 육로로 이동해서 모여든 사람들은 갈릴래아 바다 주변에서 어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어민들로 볼 수 있다. 성만찬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 대신 '빵과 물고기'가 등장한 이유도 예수의 급식 사건이 갈릴래아 바닷가 주변의 빈터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암시한다. 그들은 헤로데가 건설한 티베리아스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고 내쫓긴 어민들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갈릴래아 바다를 '티베리아스의 바다'(요한 21, 1)로 만들려는 헤로데의 야심에 맞서서 그 바다는 '하느님의 바다'임을 선포했다. 왜냐하면 빵과 물고기가 하느님이 주신 것이라면, 빵을 만드는 밀이 자라는 땅과 물고기가 잡히는 바다 역시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빵과 물고기'로 군중을 먹인 기적은 갈릴래아의 농부와 어민이 조상대대로 삶을 이어온 터전인 땅과 바다가 로마와 헤로데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소유임을 선포한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수의 급식 기적이 참조하고 있는 또 다른 이야기 모델은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형성에 관한 초석 신화인 출애굽 사건은 자기 백성이 겪는 고통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에서 시작되었다(탈출 3, 7-12). 예수의 기적 역시 무리를 향한 '가엾은 마음'에서 출발했다. 하느님이 이집트의 압제로부터 백성들을 해방시켜 광야로 이끈 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였듯이 예수 역시 자신을 찾아 모여든 무리를 먹였다. 모세의 이야기가 위대한 해방과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인 것처럼 예수의 급식 기적 역시 로마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이스라엘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모세가 장인 이트로의 충고에 따라 백성들을 천인대장, 백인대장, 오십인대장, 십인대장 등으로 조직화했던 것과 같이(탈출 18, 25), 예수 역시 그 탈출 공동체를 "백 명씩 또는 쉰 명씩" 조직화했다.

 

      그러나 모세의 이야기와 예수의 이야기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모세의 백성들은 하느님이 보내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고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했지만, 예수의 무리들은 예수의 '몸'을 함께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의 몸' 즉 교회를 형성한다(1코린 12, 27; 에페 1, 23). 예수는 마지막 마찬의 자리에서 빵을 들어 축사한 후 제자들에게 떼어주며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라고 말한다(마르 14, 22). 즉 예수의 죽음이 새로운 탈출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빵이 떼어져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졌듯이 예수의 육신 역시 부서져야 했던 것이다. 불행히도 예수의 제자들은 그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들의 '완고한 마음'(3, 5)에 전염되고 만다(6, 52).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