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읽기/마르코 복음서 읽기

제25장 물 위를 걷다

ddolappa 2018. 3. 23. 12:26

25장 물 위를 걷다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로 생각하여 비명을 질렀다. 모두 그분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그들이 배에서 내리자 사람들은 곧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지방을 두루 뛰어다니며 병든 이들을 들것에 눕혀, 그분께서 계시다는 곳마다 데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마을이든 고을이든 촌락이든 예수님께서 들어가기만 하시면, 장터에 병자들을 데려다 놓고 그 옷자락 술에 그들이 손이라도 대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과연 그것에 손을 댄 사람마다 구원을 받았다. (마르 6, 45-56)

 

 

피신인가 사역의 확장인가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행한 후 예수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뱃사이다로 가도록 한다. 이 장면을 서술하기 위해 동사 아낭카조가 사용되는데 이는 강요하다’, ‘억지로 하게 하다등의 의미를 갖는 강한 표현이다. 이 동사의 사용을 통해 암시되는 서사적 내용을 유추하기 위해 전후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 단락에서 제자들의 사역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안티파스를 자극했고, 그로 인해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예수는 제자들의 활동을 잠시 중단시켰다(마르 6, 31). 이 맥락에서 예수가 강한 어조로 제자들에게 강 건너편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한 것은 긴박한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결단으로 해석된다. 제자들은 선교 활동을 계속 이어나가기를 원했지만 예수는 지금은 피신해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요한복음은 이 단락에 대한 또 다른 해석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경험한 무리가 예수를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 하자 예수 자신은 산으로 물러나고 제자들은 배를 타고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는 것이다(요한 6, 14-16). 따라서 예수가 억지로 제자들을 떠나보낸 것은 그들을 열광하는 무리로부터 격리시켜 그릇된 기대를 품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그런데 예수의 명령을 위급한 상황으로부터의 피신이나 종교적 열광으로부터의 격리로 해석하는 것은 소극적 이해로, 그 명령이 지닌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측면을 놓친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먼저 가게하는데,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헬라어 프로아고의 합성어로 위치상으로 앞서다는 의미 외에 앞장 서서 인도하고 이끈다는 의미를 지닌다(마르 10, 32; 11, 9; 14, 28; 17, 7). 앞 단락에서 목자 없는 양들같은 무리들이 육로로 달려와 배를 타고 오던 예수의 일행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한 적이 있다(마르 6, 33). 이것은 교회가 민중의 필요를 예측해서 선도하지 못하고 사후적으로 대처하기에 급급했다는 인상을 준다. 그래서 예수는 이번에는 지난 실수를 만회하고 상황을 선도할 수 있는 기회를 제자들에게 주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건너편 뱃사이다로 가라는 예수의 명령은 단순히 피난이나 격리의 의도가 아니라 제자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 것으로 해석된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는 선택의 순간마다 기도하는 모습을 보인다. 카파르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장모의 집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푼 후 예수는 홀로 외딴곳으로 가서 기도한다. 그 다음 그의 사역은 온 갈릴래아로 확대된다(마르 1, 35. 39).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상황에서 예수는 겟세마니에 가서 기도를 드린다(마르 14, 32-42). 신과 벌이는 치열한 대결 같았던 기도를 마친 후 예수는 십자가에 올라 죽음을 맞이한다. 이렇게 예수는 모든 선택의 순간에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며, 기도의 결과는 사역의 확장이나 다른 단계로의 이행 등으로 나타난다. 이 단락에서 건너편 뱃사이다로 가라는 명령 속에 그러한 확장과 이행의 요청이 담겨 있다. 따라서 예수가 요르단 강 건너에 있는 이방인들의 땅인 뱃사이다로 제자들을 파견한 것은 그의 사역을 유대 지역에서 이방 지역으로 확장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이다.

 

      이미 예수는 제자들과 이방지역을 방문해서 군대라 불리는 더러운 영들의 떼를 내쫓아내는 인상적인 귀신축출 사역을 행한 적이 있다(마르 4, 35-5, 20). 두 번째 뱃길여행에 해당하는 이번 임무는 제자들이 예수 없이 떠난 첫 이방사역이자, 유대의 열악한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중단된 제자들의 파견 훈련의 연속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를 이방인들에게 전파하려는 예수의 계획과 의도는 제자들의 저항과 반발을 유발시켰다는 사실이 동사 아낭카조를 통해 암시된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어떤 이유로 예수의 명령을 억지로해야 하는 활동으로 받아들였던 것일까.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불어오는 적대적인 바람

 

      해가 지고 나서 하루가 새롭게 시작된다는 시간 관념을 갖고 있었던 유대인들에게 저녁이란 때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어둠이 시작되는 때이기도 한 저녁이란 시간은 무지와 몽매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바로 이 시간 예수는 홀로 뭍에 있었고, 제자들은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쓰고 있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제자들은 노를 저으면서 괴롭힘을 당하고”(수동태) 있었는데, 왜냐하면 바람이 그들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제자들이 노를 저으면서 괴롭힘을 당한 이유는 단순히 바람이 거슬러 불었기 때문이 아니라 바람 자체가 적대적(‘에난티오스’)이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적대적이었다는 표현이 지시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1차 뱃길여행에서 예수와 제자들은 거센 돌풍을 만난 적이 있다(마르 4, 37). 그 바람은 배 전체를 침몰시킬 만큼 위협적이었지만, ‘조용히 하라!’는 예수의 단호한 꾸짖음에 다시 잠잠해졌다. 이와 달리 제자들만 떠난 2차 뱃길여행에서 바람은 제자들의 노젓기만을 괴롭게 할 뿐이며, 예수의 꾸짖음이 없이 그가 배에 오른 것만으로도 잦아들었다. 이러한 묘사 방식의 차이는 이 두 사건들이 외형상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서로 구분되는 서사적 상황을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은유로 흔히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첫 뱃길여행에서 마주친 바람은 교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위협적인 어떤 사회적 사건을 상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두 번째 뱃길여행에서 바람은 제자들의 활동을 괴롭히는 어떤 적대적 풍조나 경향이 교회 내부에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야기 속에서 제자들이 예수의 명령에 따라 이방인들의 땅으로 건너가려는 상황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제자들을 괴롭히던 바람의 정체는 이방인들과 자신들을 엄격히 구분하고 그들을 적대시하던 유대인들의 일반적 통념을 상징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내에서 이방 선교 문제를 놓고 히브리계 출신의 신자들과 그리스계 출신의 신자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갈등과 논쟁이 있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사도 6, 1-7; 갈라 2, 11-14). 히브리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집약하는 전통적 의례들(할례, 식탁규정, 안식일)의 준수를 비유대계 출신의 신자들에게 강요했고, 이러한 요구는 이방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포섭하는 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했다. ‘이방인의 사도라 불리던 바오로가 예루살렘 교회를 대표하던 베드로가 이민족들과의 식사를 거부한 행위를 단죄받을 일이자 위선으로 비난했던 사건(갈라 2, 11-14)이나 베드로가 유대인의 하느님을 경외하는 자였던 이방인 코르넬리우스와의 식탁교제를 망설이는 태도를 보인 사건(사도 10, 9-16) 등은 유대교의 한 종파에 불과했던 그리스도교가 세계적인 보편종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극복해야만 했던 적대적 바람과 같은 사건들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주후 4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사도 회의에서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독립적인 선교 영역을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사도 15, 1-21).

 

      마르코가 초기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기억을 적대적 바람으로 상징해서 문학적 기록으로 남긴 목적은 단순히 지나간 사건들을 회상하는 것에 있지 않다. 그것은 마르코 공동체 내부에 존재할 지 모를 적대적 경향을 단속하는 한편, 예루살렘 교회와 구분되는 마르코 공동체의 예수 이해를 부각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배 위의 제자들이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 다가온 예수를 유령으로 오인한 모습에는 예수의 직계 제자들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암묵적 비판이 담겨 있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예수 이해는 '유령'과 같은 허상일 뿐 그의 진목면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역으로 마르코 공동체가 이해하고 있는 예수의 참다운 정체에 대한 질문을 동시에 담고 있다. 마르코 공동체는 이 질문에 대한 비밀스런 답변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혼란스러운 제자들

 

      “새벽녘은 밤을 사등분해서 계산했던 고대의 시간법상 ‘4을 가리키며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시간에 해당한다(마르 13, 35). 고대의 유대인들에게 이 시간은 하느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때로 받아들여졌다(이사 17, 14; 시편 46, 6). 마르코는 이러한 전통적 시간 관념을 활용해서 제자들을 둘러싸고 있던 무지의 어둠을 걷어내고 구원의 빛으로 예수가 등장할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놓고 있다.

 

      이 단락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예수의 이미지를 형상화하기 위해 거룩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된 전통적인 문학적 장치들이 다양하게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예수가 기도하러 올랐던 은 모세가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이자 십계명을 받았던 거룩한 장소이고(탈출 3, 1; 19, 3-23) 예수가 제자들에게 건냈던 나다라는 말은 하느님이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할 때 한 말이다(탈출 3, 14). 마르코는 오병이어의 기적에 이어 모세의 이미지를 예수에게 덧입히는 방식으로 예수를 거룩한 예언자의 풍모를 갖추도록 한다. 또한 장터에서 병자들이 몰려와 만졌던 예수의 옷자락 술은 경건한 유대인을 묘사하기 위해 흔히 이용되던 소품이다(신명 22, 11; 마태 9, 20; 23, 5). 예수가 제자들의 곁은 지나가려고 한 행위도 신이 자신을 현시하는 한 패턴이다(탈출 33, 19-33; 34, 6; 1열왕 19, 11-12). 예수가 행한 물 위를 걷는 기적은 그를 거룩하고 초월적인 존재로 각인시키는 가장 강력한 시각적 이미지이다. 예수는 세속이란 바다를 건너 그들에게 온 거룩하고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초월적 존재로서 예수의 위용에 놀란 제자들은 그를 유령으로 착각하고 겁에 질리게된다. 여기서 겁에 질렸다는 표현은 타랏소동사의 과거 수동태로서 이 동사는 원래 물을 휘젓다를 뜻하며 문맥상 혼란스러워졌다로 옮기는 게 적절하다(요한 5, 7). 따라서 예수와 마주친 제자들의 주된 반응은 겁, 공포, 놀라움 등의 정서적 형태를 띠고 있지 않고 지극히 혼란스러운 인식 상태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예수가 제자들을 지나가려고 했다는 문맥과도 부합한다. 원래 이 표현은 신적 현시를 나타낼 때 사용되지만, 제자들이 스승인 자신을 알아보는 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예수의 의도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를 실체가 없는 거짓된 형상(‘유령’)으로 오인함으로써 스승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만다. 나아가 제자들은 인식론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예수와 실제의 예수가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유발된 것이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나타난 제자들의 무지는 단순히 그들이 스승을 알아보지 못했다거나 그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에 대해 갖고 있었던 기대와 믿음이 예수가 그들에게 요구했던 사실들과 충돌함으로써 발생한 것이다.

 

      최초의 문제적 상황으로 되돌아가면,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나라를 이방인들에게도 선포할 것을 요구했고 이것은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 적대적 바람을 일으켰다. 이방인들을 하느님 나라의 백성으로 받아들이는 일에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반발할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명령한 거룩개념에 있다. “,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9, 2) 유대 민족은 신의 지상명령인 거룩한 사람이 되기 위해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을 엄격히 구분하는 정결법 체계를 만들어냈고, 사소한 의식주의 생활 영역에서부터 정치나 경제를 비롯한 문화 전반에 걸쳐 이 법칙을 엄격하게 관철시켰다. 그들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철저한 분리를 통해서만 자신들의 거룩함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율법이 정한 대로 처리되지 않은 음식은 손도 대지 않았고, 부정한 이방인과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일도 금지되었다. 바리사이들이 세리나 창녀 같은 부정한 자들과 식탁교제를 나누는 예수를 비난했듯이 예수의 제자들은 부정한 이방인들과 빵을 나누는 일을 꺼렸던 것이다.


     정결 체계를 고수하던 사람들이 성스러운 것이 쉽게 오염될 수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예수는 정확히 그 반대의 것, 즉 성스러운 것이 불결하고 오염된 것을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병자들이 장터에 머물던 예수 주변으로 몰려와 그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자 구원을 받았다는 구절이 그 예이다. 예수는 불완전하고 불결한 것을 온전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거룩한 사람이 해야 할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먼저 가라고 요구한 것은 거룩개념을 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이해하라는 권고일 수 있다. 더러운 죄인들을 피함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만들기보다는 그들을 정결하고 온전하게 만듦으로써 그들뿐만 아니라 자신도 거룩하게 되라는 것이 예수가 제자들에게 주고자 했던 가르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제자들은 본능적으로 그들보다 앞서서 예수의 요청에 부응하는 민중들에 뒤처지는 모습을 보이고 만다.

 

 

빵의 기적과 완고한 마음


      마르코는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이 완고해졌다는 논평을 남긴다. 마음이 완고해졌다는 표현은 유대 문헌에서 불복종, 구원의 상실, 죽음을 의미하며 예수에게 적대적이었던 바리사이들에게 사용되었다(마르 3, 5). 그런데 이제 동일한 비난이 예수의 제자들을 향해 가해지고 있다(마르 6, 52; 8, 17). 마르코의 관점에서 제자들은 더 이상 예수 공동체 내부의 사람들이 아니라 저 바깥 사람들과 다를 바 없다는 판단이다(마르 4, 11).

 

      제자들은 이방인들을 식탁교제에 초대하라는 예수의 요청에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은 그들이 바리사이들과 동일한 가치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바리사이들은 세리나 창녀와 같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수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는데, 그 이유는 예수가 정결법 체계를 무시하고 그것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모든 사람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예수의 거룩보다는 바리사이들과 마찬가지로 분리와 차별을 통해 유지되는 거룩을 여전히 신봉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굶주린 무리들에 대한 가엾은 마음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켰다. 이때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예수의 요구에 제자들은 빵을 구입하는 데 드는 엄청난 비용을 먼저 걱정하며 우려하는 모습을 보였다. 굶주린 자들의 고통보다는 합리적 계산이 우선하는 사람들의 마음만큼 예수의 가엾은 마음과 동떨어진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들에게 이웃(이방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들어올 리 만무하다.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서 자신들에게 온 예수를 보고 인식론적 혼란에 빠진 이유는 그들이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지식과 가치로 예수를 재단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분명 거룩한 사람이지만 기존에 알고 있었던 것과 다른 행태와 가르침을 보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그의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돌처럼 차갑고 무감각하게 반응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비반성적으로 기존의 앎과 가치를 추종하는 마음의 보수성 역시 완고한 마음이다.

 

      제자들이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까닭은 빵의 기적을 일으킨 출발점이자 근원이 되는 예수의 가엾은 마음을 그들이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해서 훈련을 시켰던 목적은 단순히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가엾은 마음을 제자들에게 체득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의 가르침과 훈련이 거듭될수록 제자들은 더욱 더 완고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 연출은 훗날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를 배반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by ddolapp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