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빌 클링턴의 미디어전략
▲ 여론조사를 중시
클링턴은 기본적으로 기존 미디어를 싫어했다. 그것은 예선전 당시 발각된 애인 스캔들에서 철저하게 미디어로부터 공격을 당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또는 대통령 취임당시 46세라는 젊음을 가졌던 그는 매스미디어 시대에서 자라나 매스미디어의 실태를 지금까지의 어느 대통령 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떻든 클링턴 정권의 특색은 좋게 말하자면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그들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한편 클링턴은 ‘모든 것을 여론의 동향을 보고 결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만큼 여론조사에의 집착이 강했다. 월스트리트 저널의 조사에 의하면 클링턴 정권이 발족한 최초 1년간에 여론조사에 투입한 비용은 198만6410달러로 이전의 부시정권이 정권발족후 2년간에 걸쳐 투입한 비용 21만6000달러에 비하면 단위가 다른 금액을 투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병행해서 미디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직접 접촉하는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클링턴은 정권발족으로부터 1년반동안 월 평균 10회의 외부행사에 참가, 카메라를 통해 보도되었는데 이는 TV에 노출시키는 전략으로 국민으로부터 인기를 얻었던 레이건의 2배이상의 회수에 달한다.
다만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 전략은 실패였으며 그후 노선을 변경해서 클링턴이 싫어하던 기존의 미디어와 화이트하우스가 접근을 도모하면서 양자의 관계가 원만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당선후에도 계속된 선거운동
실패는 클링턴정권이 출범한때 부터 시작되었다. 클링턴 진영은 92년의 선거전에서 대담프로 및 지방국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한편, 종래 대통령선거를 커버해 왔던 기존 미디어에 대한 노출은 최소한으로 자제했다. 기존 미디어들은 자신들을 제끼고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그러한 클링턴의 행위에 대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지만 40대중반의 클링턴에 대해 기자들은 연령도 비슷하고, 변혁을 호소하는 점에 대해 일종의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선거기간중 부시진영이 미디어는 클링턴 편이라고 비난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클링턴이 당선되면서 미디어는 일제히 클링턴 편이 된다. 지금까지 클링턴의 인간적인 면에서 신뢰성에 의구심을 보이는 보도를 해 왔던 잡지 타임도 년말 특집 ‘맨 업 더 이어’에 클링턴을 선정할 정도였다.
그러나 클링턴은 기자들과의 사이에 생겨나고 있던 그러한 양호한 관계를 무시하는 행위로 나왔다. 그것은 대통령에 당선한 92년 11월부터 93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식때 까지는 물론이고 취임식 이후에도 2개월이상 공식기자회견을 한번도 열지 않았다.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는 이에 대해 ‘클링턴은 지금도 대통령선거를 하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 만약 일이 생기면 클링턴은 기자들로부터 철저히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나아가 클링턴정권에서는 각료인사 발표도 대폭 늦추는 등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러한 점으로 부터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로부터는 클링턴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가 다수 나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기자회견이 겨우 이루어진 것은 대통령에 정식 취임하고부터 2개월이상 지난 3월 3일이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대통령과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와의 관계가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기자회견 개시시간이 예정보다 1―2시간 지연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등의 실수와 함께 수석보도관인 죠지 스테파노폴로스가 기자회견에서 요령없는 발언을 반복해 미디어로부터 좋은 표적이 되면서 양자간의 관계는 더욱 어려워졌다.
매스컴을 싫어했던 힐러리 부인이 화이트하우스 참모들에게 내린 지시도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기본적으로 미디어에는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졌던 그녀는 기자들이 대통령 집무실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금지했다. 보도담당인 스테파노폴로스및 마이야즈에게 화이트하우스내 기자들의 출입금지지역을 명시하도록 해 그들의 사무실을 방문할 때에는 사전에 허가를 받도록 조치했다. 이 조치는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화이트하우스 기자들로부터 맹렬한 반발을 샀다.
보도진에의 대응만이 아니라 실제 정권운영면에서도 경기자극책을 억제하는 한편, 대통령 전용기를 공항에 주기시키고 이발소로 가는 등 클링턴은 정권발족 불과 수개월만에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들도록 만들었다. 6월초에 갤럽이 조사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클링턴의 국정수행에 대한 지지율 37% 반대 49%로 나타나 취임 4개월의 대통령으로서는 역대 정권중 가장 낮은 지지율을 보였다. 정권운영면에서 처음부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로부터의 지지도 잃어버린 클링턴 정권은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를 무시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진 것이다.
▲ 데이빗 가겐 기용의 도박
이런 상황에서 클링턴은 드디어 지금까지의 미디어전략의 수정에 들어간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정권 발족후 반년도 지나지 않은 93년 6월에 데이빗 가겐을 화이트하우스 고문으로 위촉키로 결정한 것이다.
이 인사는 놀랄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가겐의 경력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가겐은 닉슨 정권, 포드정권, 레이건 정권에서 보좌관으로서 공화당정권의 핵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레이건 정권의 미디어전략을 담당한 인물의 한 사람이었다. 민주당 정권에 공화당 사이드의 인물을 기용한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생태적으로 워싱턴 인사이더인 인물을 발탁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워싱턴정치로부터의 ‘변혁’를 기치로 내걸고 당선을 거둔 클링턴정권과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나아가 가겐은 레이건 정권이 물러난 뒤 뉴스위크 및 타임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류잡지인 ‘US 뉴스 & 월드리포트’에 컬럼을 집필하고 전통적인 정치프로그램인 ‘마크닐=네라 뉴스아워’의 코멘테이터로서 활약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워싱턴 인사이더이면서도 클링턴이 싫어하는 기존의 매스미디어의 중진인물이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민주당 관계자가 공화당 정권으로 그 반대로 공화당 관계자가 민주당 정권으로 들어간 일은 있었다. 예를 들면 공화당의 닉슨은 민주당의 프트릭 모이니한을 대통령 고문으로 화이트하우스로 불렀다. 그러나 클링턴의 이런 케이스는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경기자극책을 펼치지 않고 종래의 워싱턴 정치세력의 앞에서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던 클링턴이 워싱턴의 기존 세력과 정면 대항한 것에 대해 패배를 인정하고 그것과 타협하면서 컨트롤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워싱턴정치와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에 정통한 가겐의 기용이었다. 이로서 가겐은 4번째로 화이트하우스로 들어가게 된다.
가겐의 태도는 미디어를 무시하고 공격적 자세를 취해온 클링턴정권의 보도체제와는 전혀 달랐다. 상대가 말하는 것을 들어가며 상대의 체면을 구기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해 나간다고 하는 지극히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그 때문에 매스미디어 세계에 적을 만든 일도 거의 없었다.
클링턴이 기존 미디어를 피하는 요인중에는 힐러리 부인이 미디어를 혐오하고 있던 점도 들 수 있다. 가겐의 최신의 저서(Eyewitness to Power)에 의하면 가겐은 클링턴정권에 들어갈 때 힐러리부인에 대해 ‘당신은 왜 그렇게 미디어를 싫어합니까’, ‘(전 워싱턴포스트 편집주간이었던)벤 블래트리 부부등 워싱턴 저널리스트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들과 접촉해 보면 어떨까요’ 등의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해 힐러리부인은 저널리즘쪽이 처음부터 자신들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으로 대해 왔다는 불만을 토로하는 한편 저널리스트와의 관계를 복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내비쳤다. 그래서 그녀는 여름에 화이트하우스에서 저널리스트들과 저녁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하고 미디어와의 관계복구를 위해 공화당정권에서 수완을 발휘한 가겐의 힘을 빌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언질을 얻은 위에서 가겐은 정권에 참여한 것이다.
▲ 미디어 전략의 재시동
가겐의 기용에 대해 수석보도관이었던 스태파노폴로스 등은 당연히 불쾌감을 보였다. 지금까지 가겐의 동료였던 공화당 밥 돌 상원원내총무는 그 이후 악수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가겐이 민주당정권에 들어온 이유는 확실치는 않다. 권력에의 유혹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또는 공화당 정권에 장기간 있었기 때문에 92년 대통령선거에서는 부시가 아닌 클링턴에 표를 던진 가겐은 클링턴 정권에 미국의 미래를 맡겼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정권발족 반년으로 스태파노 폴로스는 정책담당 보좌관이 되고 마이야즈는 보도관이 되어 새로운 미디어팀이 발족된다.
동시에 클링턴 자신도 미디어에 대해 지금까지보다는 오픈된 자세를 보이게 되었다. 우선 기자단에 대해 연속해서 기자회견을 가지는 한편, 보스턴 글로버 및 로스앤젤레스 타임즈 등의 유력지와의 인터뷰에도 응했다. 또한 각 미디어의 유력 간부를 화이트하우스로 초청해 점심 및 저녁을 함께 하기도 하고 여타 기자와는 힐러리 부인이 가겐에게 약속한 바와 같이 화이트하우스 정원에서 바베큐 파티를 열기도 했다. 역대 대통령이 행한 미디어 대책과 동일한 것을 클링턴도 하게 된다.
정권 발족 당초 기자의 보도관실로의 출입을 제한한 것도 가겐의 진언으로 해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로 대통령과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간에는 이전만큼 가시돋친 관계는 해소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디어와의 관계가 돌연 좋아진다거나 클링턴 지지율이 일거에 크게 올라간 것은 아니었지만 기존 미디어와 대화해 나간다는 전략은 93년 가을경이 되면서 결실을 맺게 된다. 의료제도개혁의 플랜을 TV를 통해 발표하기 이틀전에 화이트하우스 CNN 등에서 활약하고 있던 마이클 킨즈리 등 저명 저널리스트를 점심에 초대해 제도개혁의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각 미디어가 클링턴의 플랜에 이해를 보이는 보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 이즈음부터이다. 동시에 클링턴의 지지율이 점차 상승해 5월말에는 38%였던 지지율이 연말에는 58%까지 상승한다.
▲ 클링턴을 구제한 보도관 마이크 마카리
그러나 클링턴의 매스미디어에 대한 혐오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정권에의 지지율이 상승하면서 가겐은 용도폐기되고 정권내에서의 따돌림으로 인해 약 1년후에는 화이트하우스를 떠난다. (그후 반년은 워렌 크리스토퍼 국무장관쪽으로 옮김)
그후 클링턴을 구제한 것은 마이크 마카리였다. 지금까지 국무성 보도관으로 일해왔던 마카리는 95년 화이트하우스로 옮겼다. 중반부터 후반의 클링턴 정권은 마카리의 교묘한 미디어 대응에 의해 지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클링턴으로부터 신뢰가 두터웠던 마카리는 화이트하우스의 주요 회의에 참가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보도관이라는 입장에서 클링턴 대통령에 대해 의견을 개진할 수도 있었다. 보도관으로서는 아이젠하워 정권의 제임스 하가디(전 뉴욕타임즈 기자)가 외교정책까지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마카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정권내에서 중요한 입장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96년이 되면서 마카리는 클링턴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태도를 보이는 저널리스트를 선정해 화이트하우스로 초청했다. 뉴스위크 정치 컬럼니스트 죠나단 올더, 월스트리트저널의 제랄드 세이브, 스레트(마이크로소프트 인터넷 뉴스매거진)의 제코프 와이즈박이 대상인물이었는데 그들과의 옵더 레코드 베이스로 회담을 셋팅한 것이다. 그곳에서 다과로 부드러운 분위기속에서 대화를 통해 그들은 클링턴의 생각을 이해하고 일정한 평가를 하게 된다. 마카리 자신도 화이트하우스 기자회견 이외의 때에는 기자들과 점심 및 오락을 함께 하면서 그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가졌다.
또한 96년 11월에 클링턴이 재선되고 부터는 새로운 화이트하우스 담당이 된 기자들을 초청, 역시 옵더 레코드 베이스에서 자유로이 클링턴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클링턴은 서서히 기자들과 호흡을 맞추어 나가게 된다. 이 싯점에서 클링턴 정권은 처음으로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에 대해 본격적인 흥정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스핀 마이스타들은 겁을 주거나 스쿠프를 봉쇄하면서 정권으로서 플러스가 되는 정보를 기자들에게 교묘하게 누설하는 테크닉을 구사해 화이트하우스의 미디어 전략을 펼치게 된다.
마카리는 화이트하우스 보도관으로서 가장 적임 인물이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지방지 계약기자로서 기자클럽 회장을 거치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뉴저지주 선출 민주당 상원의원 해리슨 핏 윌리암의 보도담당직을 거쳐 보도관으로서 제 1보를 내디딘다. 그후 민주당 상원의원 패드릭 모이니한의 스탭, 민주당전국위원회 홍보담당 최고책임자가 되고 90년에는 워싱턴에서 PR과 로비활동을 하는 회사 부사장으로 전신한다. 그 사이에도 민주당 대통령후보자 진영에 참가해서 지원활동을 해 온 마카리는 그때까지의 경험을 살려 국무장관 월렌 크리스토프로부터 보도관으로 제의를 받고 영입된다. 그리고 클링턴 정권의 수석보도관으로서 날개를 펼친다. 마카리의 이런 경력은 화이트하우스 보도관으로서 이상적인 것이었다.
그후 순조로운 경제가 클링턴정권의 지지율을 높이고 정권운영도 순조롭게 나아가게 된 시점에서 클링턴과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이 생겨 정권은 다시 궁지에 빠지게 된다. 그곳에서 방어적 입장에 처한 마카리이지만 워싱턴 저널리스트들중에는 그에 대해 나쁘게 평가하는 사람은 없다. 뉴스위크에 모니카 스캔들로 클링턴이 최초로 증언을 행한 98년 8월부터 화이트하우스를 담당하게 된 베블라 로젠스타인이라고 하는 기자가 있었는 데 동지는 모니카 스캔들의 방아쇠를 당긴 주도적 역할을 해 마카리와의 관계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마카리의 보도관으로서의 일처리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
▲ 만년 선거캠페인을 행한 실패
가겐은 클링턴정권의 기본적 문제점으로서 클링턴의 미디어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감과 선거운동 발상으로 정치를 한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클링턴 정권의 어느 인사의 발언에 의하면 그들은 클링턴 정권이 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의회에 압박을 가해 기존 정치를 변화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한 발상이 기존 미디어를 부시하고 대통령선거와 동일한 행동을 그후에도 계속하게 된 배경이었다.
그러나 가겐은 선거운동과 정권운영의 상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통령선거는 어느쪽이든 승리자와 패배자가 있는 소위 제로섬 게임이지만 워싱턴정치는 그렇지 않다. 화이트하우스와 의회가 이해와 타협을 통해 상호 신뢰를 쌓음으로써 다같이 승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 클링턴정권이 지지율 상승의 계기가 된 것도 93년 8월의 최고소득자에의 증세를 포함한 예산안을 마지막순간에 의회를 통과시킨 것이다. 그때 클링턴이 한 것은 개별 의원에 대해 인사 및 공공사업, 규제의 변경등 가능한 한 사탕을 물리는 전통적인 설득공작이었다.’ 이것만 보면 이미지와 높은 지지율에 의한 분위기로만 정치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론을 우군으로 만들어 정책 수행을 도모한다고 하는 소위 ‘여론동원형의 정치’는 과거부터 이루어져 왔다. 멀리는 미국의 국제연맹에의 가맹을 인정시키기 위한 행동을 한 우드로 윌슨(민주당 1913-1921)부터 레이건까지 몇번이나 시도되어 왔고 그 효용과 한계도 각 방면에서 연구되고 있다. 그러나 당초 클링턴이 여론동원형 정치만을 중시하고 그를 통해 미디어를 컨트롤함으로써 정책 수행이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었다.
만년선거 캠페인을 해온 클링턴의 미디어와 관계도 지금까지와는 상당히 달랐다. 마이클 그로스맨과 마드 구마 등의 정의에 의하면 대통령과 미디어와의 관계는 협력(Alliance), 경쟁(Competition), 무관심(Detachment)의 3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정권탄생 초기는 화이트하우스와 미디어에 호의적 관계가 성립한다. 그것이 뒤이어 양자가 대립하게 된다. 그런데 정권말기에는 상호 관심이 희박해져 차기 정권에의 흥미로 옮겨져 간다.
클링턴정권의 경우 처음부터 화이트하우스 저널리스트를 무시하는 전략을 취했기 때문에 협력의 기간은 지극히 짧았고 곧바로 경쟁의 기간으로 들어갔다. 그 시기를 홍보팀의 교체등으로 극복했지만, 2기째 들어 곧바로 커다란 스캔들에 부딪치면서 지금까지의 정권에 없을 정도로 미디어와의 대립이 격렬했다. 다만 탄핵위기를 넘기면서부터는 미디어는 공격할 대상을 잃어버리고 무관심의 단계로 들어갔다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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