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미디어의 철학

마샬 맥루한 - 미디어는 맛사지다

ddolappa 2008. 5. 16. 19:27
LONG 글의 나머지 부분을 쓰시면 됩니다. ARTICLE

<미디어는 맛사지다>

 

 

- 마샬 맥루한ㆍ�땡 피오르 Marshall Mcluhan, Quentin Fiore 

 

 


1. “문명의 주요한 진보는 그러한 진보가 일어나는 사회를 파괴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다.” - A.N. 화이트헤드


2. 우리시대의 미디어나 우리시대의 미디어 과정-우리는 이를 전자테크놀로지로 일컫는다-은 사회적 상호의존성과 우리들의 일상생활의 갖가지 양상을 재형성하고 재구성한다. 미디어는 실제로 이전부터 당연시되어 왔던 모든 사고와 행동, 그리고 관습에 대해 재고하도록 강요하고 있으며, 또한 재평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모든 것은 변화하고 있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도, 당신의 이웃과 당신의 교육도, 당신의 직업과 당신의 정부도, 그리고 당신의 “타인”과의 관계까지도 변화하고 있다. 그것도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의 이 책과 유사한 저서로 “미디어는 메시지다”가 있는데, 여기에서 사용된 맛사지는 특히 TV 매체가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킴으로써 하이테크시대의 미디어는 인간의 촉각만을 편향적으로 발달시키고 있다는 문명비평적 관점에서 이 “맛사지”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역주)


사회는 커뮤니케이션의 내용보다는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이 되는 미디어의 특성에 의해 형성되어 왔다. 예컨대 문자는 어린이들에게 있어서 완전한 무의식상태에서 흡수되는, 말하자면 삼투작용에 의한 하나의 테크놀로지이다. 단어와 단어의 의미는 어린아이들에게 특정한 방향으로 자동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소지를 제공한다. 문자나 인쇄 테크놀로지는 특정한 분화과정과 전문화과정, 그리고 일탈과정을 촉진하고 조장해 왔다. 전자 테크놀로지는 통합과 몰입을 촉진하고 조장한다. 미디어의 역할에 관한 지식없이는 사회적 변화와 문화적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


종래의 관찰 훈련방식은 이 새로운 시대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것은 구시대의 테크놀로지-기계화-에 따른 심리적 반응과 개념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 문화적 과도기에 혼란과 좌절은 불가피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안의 시대”라는 것도 대부분의 경우 오늘의 일을 어제의 도구-어제의 개념-를 가지고 해결하려는 데서 빚어진 결과에 다름 아니다.
절은이들은 현재의 상황-전자드라마로 표현되는 오늘의 환경을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젊은이들은 신화적이면서도 깊이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 세대 간에 메우기 어려운 소외감이 생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자정보 미디어에 의해 창조된 새로운 환경으로 말미암아 전쟁과 혁명 및 민중의 봉기가 야기된다.


“사상을 연구하는 경우 사무적인 명쾌성을 고집하는 것은, 안개가 끼듯이 사물의 복잡성을 은폐시켜 버리려는 감상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임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쾌성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것은 인간의 지능이 형식에 따라 작용한다는 터무니없는 미신 때문이다. 우리들은 추리력을 통해 단서를 찾아 짚더미를 뒤지기도 하고, 추론의 근거를 찾다가 거미줄에 걸리는 수도 있는 것이다.”
- A.N. 화이트헤드, “사상의 모험” 중에서


우리의 시대는 장벽을 넘는 시대이며, 낡은 카테고리를 제거하는 시대이다. 즉 그것은 두루 탐색하는 시대인 것이다. 외견상 이질적인 두 가지의 사물이 유사한 형태로 존재할 경우에도 이를 새롭고 독특한 방법으로 어떻게 동일하게 배치시키느냐에 따라 놀라운 결과가 발견되는 수가 있다.


옛부터 배운다는 것, 즉 교육과정은 오로지 엄숙한 사람들과 관계되는 것으로만 이해되어 왔다. 따라서 배움을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진지한” 학생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우리시대는 유우머로 배우는 독특한 기회, 즉 지각있는 익살이나 날카로운 익살이 상투적인 말투보다 훨씬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미디어는 맛사지다”라는 말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둘러본다는 뜻이다. 즉 그것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는 상황을 보여주는 만화경(萬華鏡)이다.


미디어 연구자들은 미련하게도 미디어의 실체보다는 미디어 수단이나 미디어 과정에만 관심을 둠으로써 끊임없이 기피자라 공박당한다. 미디어 실체의 극적이면서도 급속한 변화는 이런 공격세력을 저지시킨다. 인간이 자기의 환경, 즉 확고부동한 관점을 통해 사회적 드라마에 접근하는 경우, 다시 말해서 지각하지 못하는 자들이 반복적으로 대응하는 경우 인간의 생존은 불가능하다.


3. 우리들


당신의 수입은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자살을 기도해 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당신은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가...? 당신은 이러저러한 사물을 아는가? 내 앞에서는 지금 어떠어떠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보편적이면서도 폭군적인 감시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전자정보는 프라이버시를 지킬 권리와 사회에 그것을 알려야 할 필요성 사이에서 심각한 딜레마를 야기시키고 있다. 종래의 개인의 전통적인 관념과 소외된 사고 및 행동, 즉 기계론적 테크놀로지의 여러 유형은 새롭고 즉각적인 전자정보의 수정방법과 전자화된 컴퓨터 자료은행의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다. 한번 세상 험구에 오르면 남들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고, 잊혀질 수도 없으며, 과거의 “과오”를 지워줄 방도도 없다. 우리는 미디어 자체와 미디어가 우리에게 미치는 효과에 대해 이해함으로써 치료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몰입되어 있고, 우리들 모두가 자기도 모르게 사회변혁의 동인이 되어 있는 마당에서 새로운 환경이 어떻게 계획될 수 있단 말인가. 저 소용돌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4. 우리들의 가족


가족의 범위는 확대되었다. 전자미디어, 즉 영화ㆍ통신위성ㆍ비행기 미디어로 인한 정보의 세계적 공급은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의 한계를 훨씬 앞지르고 있다. 가족 구성원의 성격은 이제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성실하지만 서툰 두 전문가의 손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 없게끔 되었다. 이제 전세계가 하나의 현자인 셈이다.


5. 우리들의 이웃


전자회로는 시간과 공간의 체계를 허물어뜨렸고,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의 관심사를 끊임없이 계속해서 쏟아붓는다. 전자회로는 대화를 하나의 지구 규모로 재구성했다. 전자회로가 전달하는 메시지는 심리적ㆍ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구획제도를 종식시키는 총체적인 변화를 뜻한다. 종래의 개념인 도시와 주, 그리고 국가의 구획은 이제 더 이상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만사부동(萬事不動)”이라는 말만큼 새로운 테크놀로지 정신과 거리가 먼 말도 없다. 이제 다시 옛 고향으로 갈 수는 없는 것이다.


6. 우리들의 교육


갖가지 전자정보의 설비가 갖추어져 있는 현대의 가정 환경과 학교 사이에는 하나의 별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텔레비젼을 통하여 일분이 멀다 하고 “어른들”의 정보, 이를테면 인플레이션, 폭동, 전쟁, 세금, 범죄, 목욕하는 여자 모습 따위를 접촉하게 되는 아이들은, 보수화되어 있는 교육기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19세기적 환경과 만나게 될 때 이내 당황하게 된다. 교육기관이라는 것이 원래 정보 대신 분화된 질서와 조직, 교과목과 교과과정으로 구성되어 있으니만큼 무리도 아닐 것이다. 이런 교육기관은 물품명세서와 일관작업대로 이루어지는 공장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아이(child)”는 17세기의 한 발명품이다. 그러니까 세익스피어시대에는 “아이”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아이”는 어른에 묻혀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아이”라는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날의 아이는 점차 불합리하게 자라고 있다. 아이는 두개의 세계를 살고 잇는데도 어느 한쪽도 아이들을 교육하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한다는 것-그것은 우리들에게 부과된 새로운 작업이며 절대적인 과제이다. 그저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7. 우리들의 직업


“이 전자회로가 당신이 하는 일을 배운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일”은 비교적 최근의 작업 유형을 뜻한다. 15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이같은 작업단계의 분화가 꾸준히 발전되어 오늘날과 같은 “기계화”와 “전문화”가 이룩된 것이다. 이같은 과정이 미래의 시대에서도 잔존하거나 정상적으로 기능할 수는 없다.


전자회로의 제반 조건 아래에서, 이들 분화된 일의 유형은 한결같이 다시금 복잡하고 까다로운 작업의 형식이나 역할을 교우하게 되고, 따라서 구시대의 희생적 봉사라는 의미의 가르침과 배움, “인간”의 도리 같은 것과 유사해지게 된다.


불행하게도, 실업으로 인한 고통을 경감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상당수의 의도적인 정치적 개혁 프로그램은 미디어 영향력의 진정한 특성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 방으로 오시지,” 컴퓨터가 전문가에게 한 말이다.


8. 우리들의 정부


18세기 분화과정에 있어 중요한 부분의 하나였던 인구조사는, 빠른 속도로 변천하는 전자시대의 상황 아래서는 불필요하고 비표화적인 사회 평가의 형식으로 전락했다. 개별적이고 분명한 의견의 합의란 의미에서 볼 대 공중(公衆)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공중이란 말 대신 대중수용자(“공중”이라는 말에 뒤이어 쓰이고 있다)란 말이 창조적인 힘으로, 또는 참여세력이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창조하고 참여하는 대신 대중수용자가 받아들이는 것은 한 무더기의 수동적인 오락물일 뿐이다. 정치는 오늘의 문제에다 어제의 해답을 던진다.


“하나의 새로운 정치” 형태는 우리가 눈치채지 못하는 방법으로 대두된다. 거실은 투표장이 된 지 오래다. 텔레비전을 통한 참여, 예컨대 자유의 진전과 전쟁, 혁명과 공해 그리고 그밖의 사건에 대해 텔레비전을 통해 참여함으로써 모든 것이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9. 타인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일인가! 전자시대의 정보 환경하에서는 소수집단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들 소수집단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실로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우리의 새로운 환경은 그 환경에 발을 들여놓도록, 또한 그에 참여하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서로 타인에게 몰입되어 있고, 또 타인에 대해 상호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10.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해 기꺼이 정관하는 한 그로부터 피할 수 없는 것은 없는 법이다.


모든 미디어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미디어는 그것이 개인적 결과이든, 정치적 또는 경제적 결과이든, 미학적ㆍ심리적ㆍ윤리적ㆍ도덕적ㆍ사회적 결과이든간에 매우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미디어에 접촉하지 않거나, 이 미디어로부터 아무런 간섭을 받지 않거나, 미디어에 의해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미디어는 맛사지이다. 사회적ㆍ문화적 변화에 대해 이해하려면, 환경으로서의 미디어가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하다.


모든 미디어는 인간이 지닌 재능의 심리적 또는 물리적 확장이다.


바퀴는...발의 확장이다.


책은 눈의 확장이다.


옷은 피부의 확장이다.


전자회로는, 중추신경계의 확장이다.


미디어는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우리 내부에 있는 특정 부위를 자극하여 지각하게 한다. 그야말로 감각의 확장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 유형-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을 변화시킨다.


이런 부분이 변화함에 따라, 인간도 변화한다.


11. 문자 이전의 사회에서 감각과 사회적 오리엔테이션을 감당했던 기관은 귀였다. 즉 “듣는 것은 믿음 그 자체”였던 것이다. 표음문자가 대두되면서 귀라는 마술적인 세계는 눈이라는 중립적인 세계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인간에게는 하나씩의 귀 대신 하나씩의 눈이 주어진 것이다.


서구의 역사는 전적으로 시각에 의지하는 매개체인 알렙베트(alephbet, 히브리어의 알파벳)가 전래된 이래 약 3천 년에 걸쳐 형성되었다. 알파벳은 그 자체로서는 어의학적 의미가 없는 단편적인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정해진 순서에 따라 구슬처럼 한줄로 꿰어야 한다. 문자를 사용하게 됨으로써, 모든 환경을 시각적ㆍ공간적인 관점에서 인식하는 습관이 형성되었으며, 또한 그러한 습관이 더욱 부추김을 받게 되었다. - 특히 공간적ㆍ시각적 관점에서는 획일적이며, 계, 속, 적이고 연-관-적이다.
열(列), 연속체인 음절 - 아래의 문장이 그 좋은 예의 하나가 되겠지만 -


“눈-그것은 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우리들은 귀더러 조용하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의 몸이 어디에 있건, 우리의 의지가 어떻든, 우리의 몸은 느끼나니.” - 워즈워드


이 생활의 조직원리가 된 것이다. “시작하면, 행하여야 한다(As we begin, so shall we go)." "합리성”과 논리는 상호 관련되고 연속되는 제반 사실과 개념들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의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경우 이 “합리성”은 일간성과 관련성으로 이해된다. “당신을 따를 수 없다”는 말은, “당신의 말은 합리적인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시각적 공간은 일관성있고 연속적이며 서로 관련되어 있다. 서구문화의 관점에서 보면, 합리적인 인간이란 시각적인 인간이다. 대부분의 의식적인 경험이 거의 “시각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은 합리적 인간의 관점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합리성과 시각성이란 말은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같은 이전의 시각적인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있지 않다.


행동의 분화, 즉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사고습관의 분화, 즉 다시 말해서 “전문화”는 문자의 테크놀로지에 따라서 점차 수직적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을 반영했다.


쓰기가 발명될 때까지 인간은 음향적 공간 안에서 살았다. 방향도 지평선도 없는 무한한 상태에서, 원시적 본능에 의지하고 공포에 압도당하며, 이성이 부재하는 감정의 세계에서 살았다. 말은 이 늪에서 헤쳐가는 길을 제시해 주는 지도이다.


깃털펜이 말에 종지부를 찍었다. 깃털펜이 신비의 껍질을 벗긴 것이다. 깃털펜은 건축물을 만들고 마을을 세웠으며, 길을 닦고 군대를 모으고 관료주의를 낳았다. 깃털펜은 문명의 주기가 시작되고, 어둠에서 이성의 빛 속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함에 있어서의 기본 상징어였다. 양피지를 넘기던 손은 마침내 도시를 건설했다.


그림이 “말을 하고” 두 눈을 향해 말을 거는 경이로운 신비의 예술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신비의 선을 좇음으로써, 우리의 “생각”을 형상화하고 우리의 사고를 채색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인가.


인쇄술과, 도안 복제술의 발명은, 새로운 시각적 노력을 확인했고 확대시켰다. 인쇄술은 “상품”의 획일적인 반복 생산과, 최초의 일관작업 즉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였었다.


인쇄술은, 개개인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사생활을 영위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간편하고 손쉽게 들고 다닐 수 있는 책을 만들었다. 인간은 이제 (독서를 통해) 영감을 얻고 부추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을 보고 개개인이 느낌을 달리하듯, 인쇄된 책은 새로운 개인주의의 숭배자들을 창출했다. 그럼으로써 사적이며 확고한 관점이 나타나게 되었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계층의 사람들은 (기존질서에서의) 이탈세력이 되거나 휩쓸려들지 않는 세력이 되었다.


12. 르네상스의 유산


상실돼 가는 관점=나서지 않음,


관망자.


휩쓸려들지 말 것!


르네상스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한결같이 감상자들의 경험의 틀과는 무관했다. 하나의 광장은 모든 것을 위해 존재하며, 모든 것은 그 광장 속에서 행해진다.


전자정보미디어의 동시적 세계는 우리 모두를, 그것도 동시에 몰입시킨다. 그로부터 이탈할 수도 없으며 자기 나름의 경험의 틀을 가질 수도 없다.


예술 또는 한 문화를 사실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공간이 지각되는 방식에 따라 형상화된다. 르네상스시대 이후 서구의 화가들은 환경을 주로 시각적 관점에서 지각했다. 모든 것은 보는 사람의 눈에 의해 지배되었다. 관찰자의 공간개념은 공간적 측정의 공식단위로 이루어진 평면의 원근법적 투사에 의한 것이었다. 수직과 수평 - 기하학의 -을 질서의 절대적인 조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서구예술의 의식 밑에 깊이 깔려 있다.
원시인이나 문자 이전 시대의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시각적인 공간에서보다는 청각적이며, 영역의 구분이나 경계가 없고, 후관적(嗅官的)인 공간에서 생활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 문자의 출현은 바로 X-레이가 출현한 것과 같다. 그들은 그들이 본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형상화한다. 빙원 위에서 물개 사냥하는 하나의 그림은, 빙원 위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 밑에 있는 것까지 보여준다. 원시시대의 예술가는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가능한 갖가지의 시각적 형태를 비틀고 변형시킨다.


독일의 저명한 작곡가 칼 오르프(Carl Orff)는, 자연스러운 감각의 지각이 아직 형식적, 문학적, 시각적 편견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 미취학 아동 이외에는 그의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자회로체계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원시인들의 다원적 공간개념을 재창조한다.


13. "앉는 사람이 들어앉기 위한 감방(A cell for citters to cit in)."
인간에게 벌을 주어 교정하는 형식의 하나로 나타난, 폐쇄된 공간에다 인간을 가두어 두어 보자는 발상은 13,14세기 훨씬 이전부터 비롯되었던 듯하다. 그 무렵이라면 서구세계에 원근법과 회화적 공간이 발달하고 있던 즈음이다. 억압하거나 분리하는 방법으로서의 이같은 격리수단이라는 발상은 오늘과 같은 전자세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범죄에 대한 사람들의 새로운 감정은, 그같은 범죄가 사적으로 특정 개인에게 전가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이상스럽게도 모든 사람들이 다 함께 그 범죄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감정은 우리들한테로 돌아오고 있는 듯하다. 부족사회에서 무서운 일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그 일을 일으킨 당사자를 비난하는 대신, 가령 “저 사람인들 오죽했으면!”하는 정도의 친밀한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같은 감정은 우리들이 접어들고 있는 새로운 대중문화시대의 한 양상으로, 즉 그것은 개개인 깊이 몰입되어 있어 사적인 범죄가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할 만큼 전체가 몰입되어 있는 것이 세계의 양상이다.


우리의 세계는 넓고 연계되어 있는 전혀 새로운 동시성의 세계이다. 시간은 멈추었고, 공간은 사라졌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지구에...하나의 사건을 동시에 경험하는 지구촌에 살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거슬러 음향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문자를 사용하던 몇 세기 동안 우리에게서 떠나 있던 원시감정과 부족감정을 다시금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들은 행위에 돌렸던 우리의 관심의 강도를 반응에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우리들은 어떤 정책이나 행위의 결과가 지체되지 않고 곧바로 경험되기 때문에 그 귀결을 이미 앞질러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전자정보의 속도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기다리거나 정관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조지 워싱턴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벤자민에게서 소식이 없구나. 올해 플랭클린은 파리에 있을 테지. 우리가 그에게 편지를 내야겠다.”(조지 워싱턴과 벤자민 플랭클린은 친우이면서 정적 관계에 있었다-역주)


전자 커뮤니케이션의 고속화시대에 들어서면서, 순수한 시각적 방법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즉, 시각적 방법은 너무 속도가 느려 적절하지도 않고 효과적이지도 못하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정신적, 심리학적 반응의 엄청난 쓰레기 보따리를 들고 이 새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허공에 매달린 채 방기되어 있다. 우리의 빛나던 언어와 사상은 우리를 배반했다. 언어와 사상은 과거를 이야기할 뿐, 현재를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전자회로체계는 인간들을 서로 깊이 연계시킨다. 정보는 동시에, 그리고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쏟아져 들어온다. 한 정보가 손에 들어와도 이 정보는 눈깜박할 사이에 이것보다 새로운 정보를 대치된다. 전자체계에 의해 형성된 세계는 우리의 자료를 분류하던 습관을, 패턴의 해독양식을 이해하도록 하는 것으로 변화시켰다. 순간 커뮤니케이션의 환경과 경험의 모든 요인이야말로 능동적인 상호작용 상태에서 존재한다고 단언한 이상, 이제 우리들은 벽돌을 한장한장씩 쌓거나 계단을 한계단씩 쌓아올리는 것처럼 차근차근 건설할 수는 없다.


14. 고체 집적회로는, 수백 배로 확대되었다.


새로운 전자 상호의존체계는 지구촌이란 형태로 세계를 재창조한다.


15. 우리는 이제 예술작품으로, 그리고 지각을 극대화시켜 매일매일 하나의 발견과정을 배울 수 있도록 설계된 학습계기로 인간의 전체 환경을 정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 지식을 응용한 것이 방안의 온도를 통제하는 온도 자동조절장치인 것이다. 따라서 같은 통제장치를 인간의 모든 감각역에까지 확대시킨다는 말은 언뜻 듣기에 설득력있게 들린다. 하지만 우연히 이루어진 과학적 발전(innovation)이란 이름으로 인간의 감각역을 부인하는 사람들에게 감사해야 할 까닭은 없다고 하겠다.


200인치 망원경으로 관찰하던 천문학자가 “비가 오겠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조수가 물었다.


“어떻게 아십니까?”


“내 발가락의 티눈이 욱신거리거든.”


환경이란 그저 주어지는 수동적인 포장품이 아니라,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환경의 법칙, 설득력있는 구조, 그리고 환경의 모든 유형은 그리 쉽게 지각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예술가들의 반환경, 혹은 역상황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관심의 수단을 제공하며, 보다 명백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낡은 환경과 새로운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에 수많은 문제가 야기되고 혼란이 일어난다. 새로운 미디어의 효과를 명쾌하게 이해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고정관념으로 모든 현상을 보려 하는 우리의 뿌리깊은 습관이다. 가령 우리가 쓰는 지각작용이라는 말은 이같은 사정을 잘 말해 준다. 이같은 심리학적 과정은 무의식중에 인쇄 테크놀로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인쇄 테크놀로지의 공중을 창조했으나, 전자 테크놀로지는 대중을 창조했다. 공중은 서로 다른 관점과 고정관념을 지닌 개별적인 개인들로 구성된다. 그렇지만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이 사치스러운 태도, 즉 이같은 단편적인 견해를 버리도록 요구한다.


우리시대의 방법론은 어떤 사실을 조사하기 위해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다양한 모델을 사용한다. 즉 발명이라는 테크닉이 19세기의 발견이었듯이, 판단의 유보라는 테크닉은 20세기의 발견인 것이다.


16. 선의 끝.


철도는 개인의 시야와 사회적 상호의존성의 제반 유형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철도는 “미국의 꿈”을 낳았으며, 그 꿈을 키웠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도시, 사회, 가독세계들을 창조했다. 철도는 또 새로운 노동방식과 경영방식을 창조했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게 했다.


철도의 테크놀로지는 때묻지 않은 푸른 목장세계의 신화를 창조했고, 철도는 도시로 상징되는 사회로부터, 동물적이며 자연적인 자아를 회복할 수 있는 농촌무대로 은둔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것이야말로 전원의 이상향이며, 제퍼슨이 주장했던 세계로서, 그는 이를 농민민주주의를 이룩하는 사회정책상의 지표로 삼겠다는 의도로 제시하였던 것이다. 철도는 우리에게 음울한 교외주민과 그들의 영원한 상징인 잔디 깎는 기계를 보여주었다.


미래의 회로화된 도시(circuited city)는 철도에 의해 창조된 부동산이 몰려 있는 거대도시는 아닐 것이다. 미래의 도시는 고속화란 조건 아래서 전혀 새로운 의미의 도시로 역할을 수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미래의 도시는 정보의 메갈로폴리스가 될 것이다. 이들 유적지는 박물관의 경우처럼 철도시대의 살아 있는 기념비로 보존될 것이다. 우리가 지금 도시를 파괴해 버린다고 해도 미래사회는 윌리엄스버그같은 도시를 수없이 재건하게 될 것이다.


17. 과거는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들이 전혀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때, 우리들은 항상 자신을 사물에 접촉하게 하거나, 아주 최근, 과거의 향기에 접촉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백미러를 통해 현재를 본다. 우리는 미래 속으로 거슬러 행진한다. 교외주민들은 보난자랜드(Bonanza-land)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상상한다.


18. 정보가 정보와 부딪치게 될 때 놀랍고도 효과적인 결과들이 나타난다. 그럼으로써 몰입과 충족을 추구하려는 부단한 노력은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별들은 저렇게 크고, 지구는 이렇게 작은데, 너는 그대로 머물러라.


진보란 이름으로, 우리의 관료문화(official culture)는 새로운 미디어로 하여금 낡은 미디어가 하던 일을 떠맡아 하도록 강요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환경은 불가시적이다. 환경의 규범과, 설득적 구조 및 환경의 여러 유형은 쉽게 지각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 시인, 화가, 탐정 -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해 주는 사람은 누구든 반사회적인 경향을 보인다. 즉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은 시류와 경향을 따르지 못한다. 반사회적 유형 가운데에는 종종 괴상한 집단이, 환경을 있는 그대로 보는 세력으로 존재한다. 서로간의 접합점을 찾기 위한 하나의 확고한 반사회적 세력으로 환경에 대처하기 위한 이같은 필요성은 유명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 잘 나타나고 있다. 기득권을 가진 “잘 적응할 줄 아는” 신하들은 임금님이 훌륭한 옷을 입은 것으로 여긴다. 낡은 환경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 “반사회적” 골치거리는 임금이 “아무것도 걸치고 있지 않은 꼴”을 분명히 보았다. 이 골치거리에겐 새로운 환경이 분명히 보였던 것이다.


스니드 마틴, 라슨 E.휩스네이드, 체스터 스네이블리, A.피스모 클램, J.P.핀커튼 스누핑튼, 마하트마 케인 지브스 - 그는 늘 그네를 타고 있는 곡예사였다. 무대에서, 은막에서, 그는 일생동안 유우머를 탐색체(probe)처럼 사용하며 어리석은 무리와 고상한 인사들 사이를 넘나들었다.


하나의 커뮤니케이션 체계로서, 그리고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우리 환경의 탐색체로서 유우머는 우리의 가장 설득력있는 반환경적 도구의 역할을 감당한다. 유우머는 이론이 아닌 즉각적인 경험으로 다루어지며 종종 지각력의 변화를 유도하는 최상의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구시대의 사회에는 점잖은 이야기가 번창했다. 그들은 줄거리를 요구했다. 오늘날의 유우머에는 줄거리, 즉 연속성이 없다. 유우머란 여러 이야기를 압축시킨 하나의 오버레이(overlay)다. (오버레이는 울퉁불퉁 패었거나 갈라진 고속도로 위에 아스팔트를 덮어 포장하는 것과 같은 작업을 말한다. - 역주)


20. 아마튜어


“내가 받은 교육은 그야말로 평범한 것이었다. 학교에서 엉성하게 익힌, 쓰고 읽고 셈하는 게 고작이었으니까. 학교가 파하면 집이나 거리에서 시간을 보냈다.” 수학은 거의 배운 적이 없고, 국민학교 교육 이외엔 정규 교육도 받은 바 없는 마이클 패러데이는 전기유도 장치를 발견한 역구가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또 현대물리학의 기초를 확립한 대가이기도 하다. 수학에 대한 무지가 그의 영감에 불을 질러, 전기현상과 자기현상을 규명하려다 간단한 비수학적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패러데이에게는 불충분했던 교육을 벌충하고도 남음이 있는 두 가지의 소질이 있었다. 즉 훌륭한 직관력과 독립심, 정신의 독창성이 그것이었다.


프로페셔널리즘은 환경의 소산이다. 그러나 아마튜어리즘은 반환경적이다. 프로페셔널리즘은 개인을 총체적인 환경의 유형으로 흡수한다. 이에 반해 아마튜어리즘은 개인의 총체적 자각과 사회법칙에 대한 비판적 자각의 발전을 도모한다. 아마튜어는 상실을 용납할 수 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리즘에는 분류하고, 전문화시키고, 환경의 규범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동료들의 집단적인 반응이 확립한 규범이 만족스럽고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설득력 있는 환경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전문가”란 제자리에서 계속하는 사람을 말한다.
“나로서는 풀기 어려운 물리학의 가장 난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어린이들을 거리에서 만난다. 왜냐하면 그 어린이들은 내가 이미 오래전에 잃어버린 감각적 지각의 양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 J. 로버트 오펜하이머


21. 우리의 공공의 문화는 새로운 미디어로 하여금 구시대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애쓰고 있다.


우리는 두 거대한 테크놀로지 사이에서 격변하는 부분들의 충돌을 목도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어려운 시대이다. 우리는 낡은 테크놀로지의 심리학적 조건화와 그것에 대한 감각적 반응으로 새로운 테크놀로지에 접근하고 있다. 이들 미디어의 충돌은 이행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예컨대, 중세미술에서 “죽음의 무도”라는 테마로 표현된 새로운 인쇄 테크놀로지에 대한 공포가 그것이다. 오늘날에는 비슷한 공포가 “바보들의 연극”으로 표현된다. 이들 두 가지 형태의 미디어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에서 실패하고 있다. 즉 구시대 방법으로 새로운 환경이 요구하는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는 점에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삶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 몽떼뉴


22.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기술적인 자각의 문을 통해 인류의 전통유산에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고 있지 않다. 젊은이들에게 열려 있는 유일한 문은 백미러 같은 사회에 의해 그들 면전에서 차단되고 말았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신화적으로, 그리고 진지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절은이들은 분류된 정보, 예컨대 주제가 서로 연관되어 있지 않은 정보를 수단으로 하여 조직된 상황하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청사진을 통해 시각적으로 이해될 뿐, 대부분의 사회제도는 절은이들의 자연스러운 직접체험을 억압한다. 젊은이들은 어떤 가르침을 받지 않고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나오는 환경, 즉 대중문화 환경의 시와 아름다움에 즐겁게 반응한다. 그것이 능동적이고(꼭 좋은 것만은 아닌) 힘으로 이해되었더라면 과거의 모든 업적으로 통하는 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학생은 스스로 몰입할 수 있는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고, 교육체계가 각종 데이타가 전자화과정에 의해 처리되는 신비로운 세계와 자기의 솔직하고 직접적인 반응을 보고하는 경험과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교육기관들이, 우리가 인쇄된 언어보다는 다른 미디어에 의해 만들어지는 환경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매우 절박한 문제이다. 교실은 이제 새로운 정보미디어에 의해 창출된 설득력있는 “외부”에서 살아남기 위한 격전장이 되고 있다. 교육은 가르치고 받아쓰게 하는 방법에서 발견하는 인식, 즉 조사하고 탐색하고 여러가지 형태의 언어를 인식하는 방향으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목표를 거부한다. 그들은 역할을-그것도 진-정-한-역-할을 바란다. 즉 그들은 완전한 참여를 원한다. 그들은 분화되고 전문화된 목적이나 일은 바라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들은 낙제생과 토론하는 학생들을 끊임없이 대하는데 이들 학생들의 두 가지 유형은 설 관계가 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 토론하는 학생들은 가르치는 데서 발견하는 방향으로, 세뇌적인 학생에서 세뇌적인 교사로 교육을 변용시키려고 시도하는 계층이다.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극적인 반전이다. 그들의 주요 토론내용이 되어왔던 베트남은 너무 작은 문제라서 남의 주의를 돌리게 하는데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 문제는 낙제생들로부터도 그렇지만 토론하는 학생들로부터도 별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에 반해 낙제생들은 우리의 교육받은 기성세대들의 눈으로 보면 19세기 테크놀로지의 배설물을 상징한다. 토론하는 학생들은 교육과정을 포장품의 형태에서 발견의 양식으로 전환시키는 창조적인 노력을 뜻한다. 관객이 토탈 일렉트릭 드라마에서 한 참여자가 되는 것과 같이, 교실은 관객(피교육자)이 엄청난 작업을 해낼 수 있는 무대가 될 수 있다.


23. 귀는 특정 견해를 편애하지 않는다. 우리는 소리에 둘러싸여 있다. 소리는 우리들 주위에 빈틈없는 거미줄을 친다. 우리는, “음악이 허공을 채울 것”이라고 말한다. “음악이 허공의 특정한 부분을 채운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는 굳이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어디에서 들려오는 소리든지 다 듣는다. 소리는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앞”에서도, “뒤”에서도, “오른쪽”에서도, “왼쪽”에서도 들려온다. 우리는 소리를 자동적으로 차단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귀꺼풀이라는 게 없다. 시각적 공간이 획일적이고 서로 관련된 종류의 조직화된 연속체라면 청각의 세계는 동시적인 관계의 세계이다.


24. “알파벳의 발견은 배우는 사람의 영혼에 망각하는 습관을 가져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기억력을 이용하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써놓은 것을 믿으려 하지 기억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진리를 가르치지 말고 진리와 유사한 것만 가르쳐라. 그들은 저마다 각 방면의 영웅이 될 테지만 배운 것은 없을 것이다. 모르는 게 없는 체할 테지만 아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소크라테스의 “페드르”에서


호머의 “일리아드”는 그리스의 문헌 이전의 문화적 백과사전이었으며 인간의 정신적, 윤리적, 사회적 삶의 경영을 위한 지침서가 되어 왔다. 시적 용어와 극적 용어의 설득력있는 기술은 전통을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결같이 충실하게 전달할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음영시가(吟詠詩歌)들은 완벽한 형식미를 운문 패턴으로 리드미컬하게 구성한 것이어서 누구나 심리적으로 쉽게 외워 부를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문헌 이전의 그리스에도 까막귀(ear-illiteracy)는 없었던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공화국”에서, 지식을 전하는 매개체로서의 운문화한 구전 형식에 대해 맹렬히 공격했다. 플라톤은 보다 정확한 전달과 분류방법, 사실과 현실의 원리, 인간성, 그리고 행위를 규명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시”는 오늘날 우리들이 쓰는 “시”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시적” 표현은 집단 정신과 마음의 산물이었다. 리듬과 운율과 음악성을 창출한 테크닉인 “모방형식”은 듣는 사람에게 바람직한 심리적 감흥을 불러 일으켰다. 듣는 사람들은 말로 들은 것보다 노래로 들은 것을 훨씬 쉽게 기억할 수 있었다.


플라톤은 논쟁과 토론의 기를 꺾는다는 점에서 이 방법을 공격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방법은 추상적인 추론과 명상적인 추론을 방해하는 최대의 장애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방법을 “독소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은 인민의 최대의 적”이라고 불렀다.


“장님”이면서도 들을 수는 있었던 호머는 이 은유적인 스피치, 프리즘과 같은 많은 의미를 한 점으로 수렴하는 스피치의 양식을 이어받았다.


“정확성”은 고도의 암시 때문에 희생되고 있다. 신화는 원인과 결과라는 복합집단에 대한 동시적 자각 형태이다.


전자회로체계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개인행동과 집단행동에 신화적인 차원을 부여해 주고 있다. 우리 시대의 테크놀로지는 우리에게 신화적인 삶을 강요하지만, 우리의 사고는 늘 단편적인 것, 단일적이고 분리된 국면에 머물고 있다.


신화란 청중을 무대에다 올린다는 것을 뜻하며, 환경을 무대에다 올린다는 것을 뜻한다. 비틀즈가 바로 이런 일을 했다. 비틀즈는 갑자기 음악적인 효과를 수단으로 하여 그들의 청중과 영어를 무대에 올릴 수 있는, 즉 청중에게 같은 의상을 입혀 전시간 내내 그들을 같은 시간대의 무대에 끌어올릴 수 있는 그룹의 사람들이다.


젊은이들은 우주를 무대에다 올리는, 신비적 참여와 같은 하나의 공식을 찾고 있다. 그들은 분리된 패턴, 자기네들을 19세기식으로 관련시키는 방법과 같은 유형은 찾지 않는다.


25. 대분분의 사람들은 순수한 언어개념을 이해하는 데 곤란을 겪는다. 그들은 귀를 의심한다. 즉 그들은 귀를 믿지 않는다. 대체로 우리들은 사물이 보일 때, “우리 스스로 볼” 수 있을 때 안도감을 갖는다. 가령, 우리는 아이들에게 “보는 것은 반만 믿고 듣는 것은 아무것도 믿지 말아라”하고 가르친다. 기호법의 모든 “속기술”은 듣는 것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한다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상적 표현을 위해 시각적, 공간적 은유법을 쓴다. 우리는 경향이나 기간 같은 순수하게 심리학적인 상태를 말할 때도 시각적 은유법을 차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우리가 정말로 “그때이후(thenafter)"란 의미로 말할 때 ”그후(thereafter)"란 말을 쓰고 있으며, 언제나(at all times)란 의미를 말할 때 항상(always)이란 말을 쓴다. 우리는 시각적인 데 너무 치우친 나머지, 현명한 사람을 환영을 보는 사람(visionaries) 혹은 선견자(seers)라고 부른다!


인쇄된 문자세계의 암시부호-(과거의 유물)-는 페이지의 시각적 체제에 청각적 차원을 환기시키려고 한다. 즉 정보와 리듬, 억양과 휴지부(休止符)의 효과가 그렇다.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효과는 상당히 높았었다. - 활자면이 여러 가지로 변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신문의 레이아우트는 일반 도서에 비해 인쇄술로부터 훨씬 다양한 청각적 효과를 제공하고 있다.


26. 존 케이지 :


“사심을 버리고, 소리는 소리이며 사람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시인하고, 질서의 관념에 대한 환상, 감정의 표현, 그리고 그 밖에 우리가 물려받은 미학적인 술책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고의 목적은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자연의 운행에 합류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적재적소에 있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모두가 음악이다.”


“극장은 늘 있는 장소에 그대로 있다. 예술은 단지 사람들에게 이것이 바로 그 극장이라고 설득하는 것을 촉진할 뿐이다.”


“혹자(周易)는 내게 이르기를 내가 하던 일을 계속하되, 전파하라고 했다,
기쁨 그리고 혁명을.“


27. 더블린의 동시적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면서 제임스 조이스는 흔히 예술가로서 조작된 청각언어적 음악의 대홍수를 쏟아놓았다.


“장차 (벽에다) 종말의 (예언하는) 글씨를 쓸 자는 시인이다. 원래 (벽에서) 종말의 예언을 읽어낸 유식한 자가 시인(다니엘)이었으므로, 바로 수많은 대위법적인 언어로 이루어진 우리의 공격적인 책이 나아가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러한 종말이다. (벨사살의) 눈이 해독하고 슬퍼할 수 없던 것을 (다니엘의) 귀가 감청한 바에는 성문화할 수 없는 것도 해독될 수는 있다. 이제 이런 가르침이 널리 통용되나니, 즉 우리에겐 결과를 야기시키는 동기가 있고, 그 결과를 이따금 더욱 악화시키는 감정이 있다.”

조이스는 “피네간의 경야”에서 인류문화의 테크놀로지의 전방면에 걸친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에 관하여 인류 마음의 역사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그리고 있다. 제목이 암시하듯이, 그는 인류 발전의 각성은, 선골적 인간 혹은 청각적 인간의 밤 속으로 다시 사라질 수 있다고 보았다. 종족적 관습의 피네간 주기는 전기시대에도 재현될 수 있다. 그러나 재현된다면 우리는 이를 자각하거나 일깨우거나, 둘다 하거나 해야 한다. 조이스는, 우리가 최면상태나 몽환상태로 스스로를 나름의 문화주기에 고립시키는 걸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의식적인 상태로 모든 문화양식 안에서 동시에 사는 방법을 발견했다.


28. “저작권”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 경제적인 상품으로서의 책에 관련된 개인의 지적 성취라는 의미에서-은 인쇄 테크놀로지가 대두되기 전에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중세의 학자들은 그들이 공부하던 “책”의 정확한 정체에 관해 무관심했다. 심지어는 자기 것인데도 서명하는 일조차 드물었다. 책이란 그저 도움을 주는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책을 손에 넣는다는 것은 까다롭고 꽤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다. 많은 소책자는 흡사 스크랩북 속의 비망록처럼 잡다한 내용으로 전해졌는데, 전해지는 과정에서 저작권 같은 것은 사라지기가 일쑤였다.


인쇄술의 발달은 익명성과 문명이란 개념과, 지적 노력을, 개인의 재산으로 여기는 습관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같은 책을 기계에 의해 대량생산하게 됨으로써 공중-독서공중이 생겨나게 되었다. 소비자 지향적인 문화가 활기를 띠면서 진위의 여부, 해적판으로부터 저작물의 보호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리하여 저작권이란 개념-저작형식이나 저작물 혹은 예술작품의 전개와 출판, 판매에 따르는 포괄적인 권리“-이 생겨났다.


전자복제술(Xerography)-모든 사람의 두뇌도둑이라고 일컬어지는-은 즉석출판시대를 예고한다. 이제는 누구나 저자와 발행자가 될 수 있다. 어떤 내용의 어떤 책이든 집어들고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씩 복사하여 자기 책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대두되면서 사람들은 자기 표현의 중요성에 대한 신뢰를 점점 더 상실해 가고 있다. 팀워크가 개인적 노력을 앞지르고 있는 것이다.


29. 쥘 베른 같이 상상력이 풍부한 작가도 전자 테크놀로지가 정보미디어를 생산하는 속도를 어림잡는 데 실패했다. 그는 텔레비전이 29세기쯤 발명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예언을 했었다.


오늘날의 공상과학소설은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잠재력을 짐작하게 해준다. 옛날의 문제는 노동력을 절약하게 해주는 형태를 발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제는 그 반대이다. 이제 우리는 발명하기보다 조정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우리는 새로운 발명품과 더불어 살 수 있는 환경을 개발해야 한다. 거대기업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공상과학소설가는 잠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인간의 두뇌 사이클을 완성시킨다. 편재하는 귀와 움직이는 눈으로 우리는 쓰는 작업을 파기하고, 서구문명의 다이나믹스를 이룩한 전문화된 음향적-시각적 메타포를 제거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시각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동시에 끌어들이는 능동적, 탐색적 접촉감각의 확장이 일어난다. 당신은 텔레비전과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전자현상에서, 시각은 복합적인 상호작용과정에서 요구되는 유일한 구성요소이다. 정보시대에는 모든 형태가 전자체계에 의해 처리되기 때문에 서구인들에게 있어 전자 테크놀로지는 시각적 구성요소이거나 자기 경험 속의 상당부분이며, 그들의 다른 감각활동의 증가를 뜻하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전존재란 차원에서 참가하고 몰입할 것을 요구한다. 텔레비전은 배경의 역할은 맡지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은 당신을 몰입시킬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아이덴티티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이 경기병의 공격은 생명의 형태와 의미, 그리고 사건에 대한 우리의 자각을 극단적인 감수성의 삶에까지 고양시켜 놓았다.


텔레비전의 위력이 가장 분명하게 증명된 것은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 때였다. 텔레비전은 조문객들과 더불어 (시청자들로 하여금) 하나의 의식에 참여하게 했다. 텔레비전은 의식의 과정에 전세계인을 끌어들였다. (거기에 비하면 신문, 영화, 라디오는 소비자들을 위한 들러리장치에 지나지 않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미지가 시청자 쪽으로 투사된다. 당신은 스크린이다. 이미지는 당신을 둘러싼다. 당신은 소멸점이다. 이것은 일종의 본질, 동양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종의 역(逆) 원근법을 창조한다.


텔레비전 세대는 냉혹한 집단이다. 이 세대는 다른 어떤 시대의 어린이들-그들은 경솔하고, 더 변덕스러웠다-보다 더 심각하다. 텔레비전 세대의 어린이는 보다 열성적이고 헌신적이다.


방영시간 중에 몇 초간 끼어드는 이른바 “상업광고”는 미디어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상업광고에는 인쇄 테크놀로지에서 빌어온 대화형식이 들어갈 시간이 없다. 줄거리는 포기해야 한다.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텔레비전의 광고는 그저 사생아 같은 존재, 아니면 조잡한 포크아트(민속예술) 정도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텔레비전 광고는 동시대의 문학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예컨대 문학작품인 “냉혈(In Cold Blood)"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영향을 미친다.
텔레비전을 비평하는 데 있어서 우리를 가장 실망시키는 것은, 일부 비평에서 그것이 전혀 다른 지각반응의 동원을 요구하는 전혀 다른 테크놀로지임을 지적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이런 비평은 텔레비전을 인쇄 테크놀로지의 타락한 형태로 보아넘기려고 우긴다. 텔레비전의 비평가들은, 만일 관람자가 텔레비전 광고에 의해 갑작스런 줌(Zoom)과 타원형 편집방식(Elliptical editing, 화면을 꽉 채우지 않는 방식-역주), 화면 중심의 구성(no story lines), 컷에 의한 갑작스런 화면의 전환(flash cuts)과 같은 TV 조작에 이미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그렇게 추켜 세우는 영화-<도사> <피곤한 날 밤> <새 고양이> 등의- 가 실은 대량 관객을 동원하는 영화로 받아들여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30. 영화는 어느 때보다 전성기 들어섰다!


헐리우드는 종종 반식민주의 혁명의 선동가 노릇을 한다.


쇼 비즈니스  신문 “Variety"의 한 토막 :
“아이스 박스는 식민주의를 사보타지한다.”


수카르노 : “영화산업은 세계에 하나의 창구를 만들었다. 식민지국가는 그 창을 통해 자기네들이 빼앗긴 것들을 구경해 왔다. 냉장고가 혁명의 상징-냉장고가 없는 사람에게-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 나라의 노동자가 소유하고 있는 모터카가 생활의 필수품까지 박탈당한 사람에게는 폭동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헐리우드는 사람의 천부적 권리의 박탈이라는 관념을 확립하는 데 일익을 감당했고, 그같은 박탈관념은 전후 아시아의 국가 혁명에 큰 몫을 감당했다.”


31. 예술이란...누구든...훌륭히 해낼 수 있는 것


발리섬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 “우리에겐 예술이 없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실제로 또 한다.”


박물관장 : “살아숨쉬는 예술작품을 대하다 보면 죽음을 느끼지 못하는 듯 싶다.”


A.K.쿠마라스와미 : “우리는, 이미 곁에서 사라져 버린 삶의 양식을 전시하는 박물관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기성세대는 반환경적인 네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영국의 월슨 수상이 비틀즈가 창단된 리버플의 캐번클럽을 방문하고 있다. 박물관은 인류가치의 척도, 문화적 혈액은행의 창고가 되었다.


32. 진짜 전면전쟁은 이제 정보전쟁이다. 이 전쟁을 치르는 것은-냉전상태에서, 끊임없이-미묘한 전자정보 미디어이다. 냉전은 진짜 전선-포위전이며,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이다. 오늘날 열전이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세계의 뒷마당에서 구시대의 테크놀로지로 이를 수행한다. 이런 전쟁은 해프닝이며 비극적인 유희다. 전쟁에 최신의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것은 편리하지도 적당하지도 않다. 최신의 테크놀로지가 전쟁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소폭탄은 역사의 느낌표이다. 수소폭탄은 해묵은 폭력선언문에다 종지부를 찍었다!


정보처리자로서의 환경은 프로퍼갠더이다. 대화가 시작되는 곳에서 프로퍼갠더는 끝난다. 미디어를 상대로 말을 해야지 프로그래머를 상대로 해서는 안 된다. 프로그래머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야구장에서 핫도그 장수에게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내용이 형편없다고 불평하는 거나 다름없다.


“서양은 동양을 흔들어 깨울 것이지만...아침이 오기까지 아직은 밤...”
- 제임스 조이스


노자가 이르기를 :


30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통제 집중해 있지만,
바퀴에는 빈 데가 있기 때문에 바퀴는 회전할 수 있다.
진흙을 이겨 질그릇을 만든다. 질그릇 안에는 빈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 때문에 그릇은 그릇 구실을 한다.
지게문과 창을 뚫어 방을 만든다. 그러나 그 안에는 빈 공간에 있는데, 그 공간 때문에 방은 방 구실을 한다.
이처럼 우리는 무로써 유의 이(利)를 누리는 것이다.


전자회로체계는 서양을 동양화시킨다. 억제된 것, 분리된 것-서양의 유산-은 흐르는 것, 통일된 것, 용해된 것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33. 뉴튼적 신-정밀한 우주를 만들고 태엽을 감고는 물러서버린 신-은 오래전에 죽었다. 니체가 한 이 말은 바로 이를 뜻하는 것이고, 주목받는 것은 바로 이 신이다.


뉴튼식 의상으로 차려 입은 신의 모습을 찾는 사람은 실망할 것이다. “신은 죽었다.”는 말은 뉴튼적 우주에 적절하게, 정확하게, 확실하게 적용된다. 서구세계가 토대로 했던 우주의 규범은 붕괴된 것이다.


“지우는 손만이 진실한 것을 쓸 수 있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환경을 변화시킴으로써 미디어는 우리에게 유니크한 감각지각의 여러 부분을 일깨워 준다. 어느 한 감각의 확장은 우리의 생각과 행동양식-세계를 인식하는 양식-을 변화시킨다. 1965년의 대 정전(停電) 소동이 반년간만 계속되었더라면 전자 테크놀로지가 우리 일상생활의 순간순간을 유형화하고,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켰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아래쪽 포말(泡沫)을 향하는 몇몇 소용돌이의 하강속도를 비교하면서 위안을 느꼈던 것으로 보아 나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자기 상황의 합리적인 분리로 얻은 위한 속에서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용돌이를 향한 하강”에 나오는 선원은 소용돌이의 움직임을 이해함으로써 공포를 극복했다. 그의 통찰은 우리가 처한 곤경, 우리의 전자체계에 의해 형성된 소용돌이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전략을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