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세계/미디어의 철학

[스크랩] <서평> - John B. Thompson, The Media and Modernity

ddolappa 2008. 6. 21. 14:43

John B. Thompson, The Media and Modernity

 

John B. Thompson, The Media and Modernity : A Social Theory of the Media.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5)

 

 

Diana Ambrozas (Simon Fraser University)

 

John Thompson의 최근 책은 커뮤니케이션 연구자들에게는 적합치 않은 것 같다. 그의 책이 사회학자와 커뮤니케이션 이론가들을 동시에 겨냥한 것이기는 하지만, 미디어보다는 모더니티 연구자들에게 더 적합하다. 톰슨은 커뮤니케이션의 역사에 대해서는 피상적인 연구만을 제시하고, 출판, 영화, 라디오, 컴퓨터 등은 제외한 채 텔레비전과 같은 현대적 미디어들에만 주목하였다.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이 톰슨의 주된 논지를 잠식하는 상호 작용적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한다는 면에서 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특별히 문제가 된다.

 

이 논의는 15세기 이래로 서구 공공영역의 변화에서 매스 미디어가 행한 역할을 다루고 있다. 톰슨은 하버마스의 이론적 틀을 따르지만 그와는 상이한 결론에 도달한다. 톰슨은 20세기 공중의 스펙타클화에 대한 하버마스의 비관적 결론은 18세기 커피하우스에 존재하였던 면대면 및 공존적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낡은 모델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며, 우리 세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상호 연결되어 있어서 이러한 과거 모델에 의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매스 미디어(이는 텔레비전을 의미한다)가 면대면 대화보다는 가시성으로 특징지워지는 새로운 형태의 공공성(publicness)을 창조해 내었다고 믿으며, 이 새로운 형태가 근본적으로 열등하지는 않다고 주장한다.

 

"매개된 의사상호작용"이 발생하는 장인 새로운 공공성은 면대면 상호작용을 대체하였으며, 생산자와 수용자 모두에게 새로운 압력과 혜택을 동시에 제공한다. 정치가, 저널리스트, 스타와 같은 생산자들은 광범위한 영향력과 가시성 뿐 아니라 미디어의 상징적 내용을 결정할 더 큰 힘을 얻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이들의 수용에 대해서는 거의 통제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스캔들이나 비난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아졌고, 사생활 침해를 당할 수 있게 되었다. 유사하게, 수용자들은 더 이상 (이론적으로는) 미디어의 내용에 대하여 대응하기가 불가능하여 졌으며, 반면 공공 사안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와, 매개된 상징적 내용에 대해 가할 수 있는 주목과 해석의 자율성은 보다 커졌다. 후자는 광범위하게 산재되고 다양화된 텍스트, 또는 톰슨의 해석학적 언어로는 사회역사적 지평 확대의 결과이다. 두 집단 사이에는 상호작용적이지만 불평등한 의존관계가 존재한다. "수용자들은 내용의 수용자들에게 보다 더 의존하는 반면, 생산자들은 관객들에 의해 주어지는 시청과 지지의 자발성에 의존한다(p.99)". 그러나 톰슨은 이 불평등성에 대하여 말하지는 않는다.

 

이는 톰슨이 "프랑크푸르트 학파 (p.7)"의 비판이론에 기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매우 놀랍다. 하지만 그가 프랑크푸르트라고 말하는 것은 하버마스 혼자만을 의미하며, 학파 자체를 지칭하지는 않는다. 이는 또한 발터 벤야민의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이 톰슨의 저작에 끼친 영향을 고려한다면 매우 놀라운 일이다. 1936년 저작에서 벤야민은 현대의 테크놀러지, 사진술, 인쇄술이 예술을 광범위한 독자에게 접근 가능하도록 민주적으로 변형하였다고 말하며, 이러한 발전을 시간과 공간(이를 "아우라(aura)"라 한다) 내에서 원전의 특이성 상실로 이끄는 것이라 한다. 톰슨은 벤야민의 논의를 상징적 형태들의 상품화에 대한 논의에서 주석으로만 다루고 있으며, 공존성의 상실에 기반한 민주주의적 낙관론은 저자에게도 동일한 것이라 말한다. 톰슨은 문화로부터 정치적 영역으로 주의를 돌렸으며, 이 과정에서 벤야민의 비판론이 가지는 의의를 잃어버렸다.

 

창조적이고 다양한 수용적 실천에 대한 중요성을 다루는 책에서 수용자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접근이 부재하다는 사실은 책의 가장 심각한 오류라 생각된다. 다양한 시청자, 혹은 그들의 시장상품화에 개재하는 다양한 권력에 대한 논의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사실이 공론장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도 없다. 정치경제학 대신 우리는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하여 고프만적인 테크놀러지에 경도된 설명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톰슨이 형식적으로 언급하고 있을 뿐인 페미니즘 비평에 대해서는 "수용의 상호작용적 틀(p.89)", 내 즉 가정내 시청 행위에서의 권력관계에 대한 상세화가 없다. 톰슨이 "가정 내 구성원들의 권력관계"와 "다양한 종류의 축적된 자원들에 대한 상이한 접근법(p. 39)", 혹은 "정치참여에 대한 압력의 증대(p.50)"에 대해 말하는 바는 일상적인 삶과 이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으로부터 괴리되어 있다.

 

문제를 낳는 또 하나의 요소는 고도로 추상화된 분석 수준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공존적, 면대면적 형태와 대중매체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은 "준 이분법적"대립으로 설정된다. 톰슨이 이를 의도하지 않았고, 이 대립을 부인하고 있기도 하지만,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공공성에 대한 논의는 커뮤니케이션의 근대적 형태와 전근대적 형태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또한 그는 텔레비전의 매개된 의사상호작용을 넘어서는 컴퓨터 매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케 하는 현대의 대화적 커뮤니케이션의 형태를 무시하였다.

 

결론적으로, 톰슨의 책은 역사적 맥락에서 고찰되어야 할 것이다. 그의 1984년 저작인 {이데올로기 이론 연구(Studies in the Theory of Ideology)}에서 그는 하버마스의 해석학이 사회적 갈등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비판적-유토피아적 커뮤니케이션 틀을 채택하였다. 그는 1990년 저작인 {이데올로기와 현대 문화: 매스 미디어 시대의 비판적 사회이론(Ideology and Modern Culture; Critical Social Theory in the Era of Mass Communication)}도 유사하게 이데올로기 개념을 "지배에 봉사하는 체계적 관계들의 의미"라 정의하며, 비판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을 방어한다. 하지만 새 책에서는 "비판사회이론"뿐 아니라 "이데올로기"와 "지배"개념을 언급하지 않는다. 톰슨은 미디어를 사회 비판의 한 평태로 개념화하는 대안적 시각에 기반함으로써 비판적-유토피아적 요소들을 포함할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과거 두 저작의 유사성-공중의 대화적 모델을 비판하고, 독점 대신 독립적 미디어 기업들의 존재를 지지하는 규제된 다원주의에 대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톰슨은 정치적 스펙트럼 상에서 다른 위치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의 학문적 궤적은 비판이론으로부터의 후퇴라 볼 수 있다.

 

출처 : ━ 청춘예찬
글쓴이 : 원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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