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32> 스펙타클의 미학을 넘어서

ddolappa 2008. 8. 30. 16:23

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32> 스펙타클의 미학을 넘어서

 

 


무한도전 118회 080823 : 올림픽 중계 도전

 


쇼의 주인공은 우리다


무한도전의 도전은 대체 그 한계가 어디인가. 그들은 올림픽 스포츠 중계라는 '위험한' 미션에 도전을 했고, 새로운 유형의 '스포테인먼트쇼'를 제시했다는 의미있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번 도전이 얼마나 위험천만하고 무모한 도전이었는가 하는 사실은 출연자들의 긴장된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우여곡절 끝에 핸드볼 중계를 맡게 된 정형돈은 창백한 얼굴이 되어서 '위액이 솟구친다'며 부담감을 토로했고, 대통령도 '형님'이라 부르는 대범한 '돌+아이' 노홍철조차 부들부들 떨며 '죽을 것 같다'고 솔직한 심경을 고백했다. 스포츠 중계에서 사소한 말 실수 하나가 자신들과 프로그램에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지 불 보듯 자명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 역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올림픽과 같은 국제적 행사에 전문지식도 부족한 예능인들이 스포츠 중계를 한다고 했을 때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던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정형돈의 차분하고 지적인 해설과 노홍철의 '감정과 흥분 위주의 해설'을 시청하며, 또 풍부한 식견을 바탕으로 '국민MC'다운 유려한 해설을 선보인 유재석을 보며,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았던 우려와 불신은 어느새 그들에 대한 열렬한 찬사와 환호로 바뀌었다. 지난 연말 베이징 올림픽 프로젝트를 공개한 이후 장장 9개월여 동안 진행된 그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 '역시 무한도전!'이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왔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이 올림픽 중계 도전을 통해 이룩한 성과는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올림픽과 월드컵과 같은 국제적 행사를 어떻게 다루어왔는가를 살펴보면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 동안 스포츠와 오락의 가장 성공적인 결합물로 평가받았던 '이경규가 간다' 시리즈는 행사가 열리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서 스포츠 중계에서 맛볼 수 없었던 생생한 현지의 분위기를 전달하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스포츠와 오락 간의 엄격한 경계선은 철저하게 지켜졌고, 예능 프로그램은 스포츠 경기에 집중된 국민적 관심을 프로그램의 시청률 상승을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그 단적인 증거로 그들이 다루어왔던 스포츠가 축구나 야구처럼 인기 종목들에 집중되었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무한도전이 다루고 있는 종목들은 여자 핸드볼, 체조, 육상처럼 소위 '비인기 종목들'이었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 동안 무한도전은 기계체조, 레슬링, 핸드볼과 같은 종목들에 국민적 관심을 환기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여왔고, 스포츠 중계에 도전한 종목들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선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무한도전의 올림픽 중계 도전은 일부 언론이 지적하듯 올림픽의 인기에 야합해서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끌어올리려는 얄팍한 술수가 아니라 예능인들의 스포츠 중계라는 이색적인 도전을 통해 일부 종목에 국한된 국민적 관심을 합리적으로 재분배하려는 바람직한 시도로 볼 수 있다.


허연회 MBC 스포츠 팀장이 지적했듯 애초에 무한도전팀에게 기대했던 건 전문성이 아니라 시청자의 눈 높이에서 줄 수 있는 재미와 정보였다. 그래서 해당 종목 출신의 전문해설가 수준에서 그들을 평가하는 태도 역시 올바른 것이라 할 수 없다. 시청자들에게 전문적 식견을 차분히 전달하기보다는 고함과 막말로 일관하고, '펠프스 이겨라', '이겨서 이명박 대통령에 보답해야 한다'와 같은 망언을 서슴지 않았던 일부 전문 해설위원들보다 준전문가 수준의 정보를 전달하며 경기에 대한 적절한 흥미를 이끌어냈던 무한도전팀의 해설이 평가절하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한도전의 스포츠 중계 도전이 지닌 차별화된 가치를 어디에 있는 것일까?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은 스포츠의 인기를 마케팅 차원에서 이용하려고만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에서 예능인들의 가치는 하락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선수들의 뛰어남을 부각시키기 위해 자신들은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이려는 방법을 고수하다 보니 예능인들 뿐 아니라 오락 프로그램 역시 저급한 것으로 폄하되어 왔다. 무한도전이 스포츠 중계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생겼던 우려나 걱정 역시 이러한 편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무한도전은 스포츠 경기의 긴장감을 중계해설의 긴장감으로 전환시키며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오류에서 벗어나게 된다. '올림픽 중계 도전' 특집에서 시청자들이 경험하는 쇼의 재미는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경기에서가 아니라 출연자들이 해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스포츠 경기는 시청률 재고를 위한 수단으로 물화되지 않고, 진지한 중계에 도전한 예능인들의 위상은 오히려 격상된다. 이는 쇼 오락 프로그램의 주인공은 출연자들 자신이라는 김태호 PD의 신념이 반영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스포츠 중계 도전'은 스포테인먼트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했다는 의미를 넘어서 쇼 오락의 변화된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무한도전은 전직 금메달리스트를 초청해 배드민턴과 같은 게임을 펼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재담과 몸개그로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는 안일하고 상투적인 프로그램 제작방식 대신에 방송환경 전반을 고려한 위험하고 무모한 실험을 선택함으로써 재미와 의미라는 값진 성과를 달성했다. 바로 이와 같은 차별화된 도전과 노력이 무한도전을 다른 오락 프로그램들이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저력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치열한 문제의식과 도전정신이야말로 무한도전이 대한민국의 예능계를 선도하는 Nr.1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근거이자 무한도전의 빛나는 존재 가치 자체이다.

 


오락적 가치의 경계 탐사


오늘날 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은 점차 '오락'과의 퓨전을 시도하고 있다. 미디어학자 닐 포스트만이 만들어낸 조어인 '인포테인먼트'(Infotainment)는 '정보'(Information)와 '오락'(Entertainment)의 합성어이다. TV라는 매체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견지했던 그는 이 개념을 통해 TV 미디어는 시청자들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순수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신 단순한 오락만 제공함으로써 '죽도록 즐기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정치'(Politic)와 '오락'의 합성어인 '폴리테인먼트'(Politainment)는 정치와 오락 문화의 결합을 보여준다. 독일의 미디어학자 안드레아스 되르너는 폴리테인먼트의 두 가지 활용방식을 구분한다.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이미지를 대중 친화적으로 개선하고 정치적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오락을 도구로 이용하는 방법이 그 한 가지 예이다. 이와는 달리 미디어들이 방송을 보다 흥미롭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정치인들이나 정치적 사건들과 주제들을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무한도전이 선보인 '스포츠'(Sport)와 '오락'의 합성인 '스포테인먼트'(Sportainment) 역시 오락적 가치가 문화 영역 전반에 스며들고 있는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웃고 떠들며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과 달리 스포츠는 다소의 긴장감과 진지한 태도가 요구되는 여가문화의 한 분야이다. 그럼에도 스포츠는 오락적 요소를 흡수해서 점차 이 양자 간의 경향이 모호해지고 있다.  미국의 '세계 레슬링 엔터테인먼트'(WWE)는 스포츠도 일종의 쇼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저널리즘 영역조차 '오락'화되고, 허구적인 오락 프로그램이 '리얼'한 형식을 취하는 경향 역시 전세계적 추세이다. 최근의 시사 보도들은 '정보'라는 차가운 매체를 '감정', '오락', '허구'와 같은 극적 요소들로 장식할 때 시청자들의 시선을 보다 강하게 집중시킬 수 있고, 그들의 감정적 동의에 기반해서 사회적 의제를 보다 효과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마를린 맨슨의 락 음악을 BGM으로 선택한 'PD수첩', 리얼리티 TV적인 극적 구성방식을 통해 '사실'을 자극적으로 재연하는 '긴급출동 SOS24' 등이 대표적이다. 날카로운 질문으로 정치인들의 위선적 모습을 폭로해 오락 프로그램 못지 않은 짜릿한 쾌감을 선사하는 손석희가 대중들 사이에서 유재석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역시 '시사' 역시 '오락'으로 수용하는 대중들의 변화된 수용태도를 보여준다.


사회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이러한 오락화 현상에 대한 다양한 원인 분석과 평가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이 자리에서는 무한도전과 연관된 주제만 다루기로 하겠다. 그럴 경우 '이종교배'라는 무한도전의 탐구 주제는 오락적 가치의 경계를 탐사하고 그것의 외연을 넓히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유재석, 정형돈, 노홍철이 해설자로 출연한 스포츠 중계 방송에서 시청자들은 뜻밖의 장소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의 반가움과 낯섦을 동시에 경험하게 되고, 그러한 경험을 재미로 받아들이게 된다. 반면, 무한도전을 시청하며 느끼게 되는 오락적 즐거움은 스포츠 중계를 앞두고 그들이 표현하는 극도의 긴장감, 떨림, 흥분 등의 감정에 기반한다. 긴장감을 주체 못해 바들바들 떨리는 정형돈의 입술을 부각시켜 보여주는 등의 클로즈업 샷이 많이 등장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기존의 예능 프로그램이 스포츠를 단순한 소재 차원에서 접근하는데 머물렀다면, 무한도전은 스포츠 경기의 긴장감을 중계방송의 긴장감으로 치환시켜 보다 밀도있는 오락적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형돈이 여자 핸드볼 예선 전적을 찾지 못하고 당황하거나, 노홍철이 '우리 헝가리 선수들'과 같은 말실수를 할 때, 현실의 예측 불가능성은 쇼에 스며들어 스포츠 경기 못지 않은 긴장감을 자아낸다. 이러한 활용방식은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이라는 점에서 무한도전이 개척한 스포테인먼트의 새로운 유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접근할 경우 무한도전의 올림픽 스포츠 중계 도전은 일부 언론이 주장하듯 마케팅 차원에서 오락 프로그램이 스포츠를 이용한 사례로 볼 수 없게 된다. 베이징 올림픽 배드민턴 혼합복식조 금메달리스트 이용대, 이효정 선수가 무한도전에 출연하기로 결정했을 때 김태호 PD는 "올림픽 영웅으로 충분한 예우를 해줘야 마땅하지만 몇몇 언론의 지적처럼 금메달리스트를 이용한 마케팅으로 프로그램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 제작진의 고민이다"라고 밝힌 바 있는데, 올림픽 중계 도전 역시 이런 고민의 연장선상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올림픽이라는 국제적 행사를 다루고 있는 무한도전의 접근방식에서 무엇보다 칭찬할 점은 국가 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애국심에 호소하지 않고 전세계인이 함께 하는 축제의 장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재석이 패배한 헝가리 여자 핸드볼 선수들에게도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냈던 장면이나, 어이없는 오심으로 우리나라 여자 핸드볼팀이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을 때 그들의 슬픔을 인간 승리의 드라마로 재구성했던 장면은 상업주의에 매몰되어 점차 상실되어가고 있는 올림픽 정신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주고 있다.

 

 

 

 

시청률이 곧 광고수익률로 직결되는 방송 메카니즘의 속성상 각 방송국들은 경기의 중요성보다 관심의 중요도에 따라 중계방송을 편성하거나 시청자들의 민족적 감정에 호소하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일부 해설위원들이 고함과 막말로 일관하는 선정적 중계태도를 보이는 것도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폐해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방송 3사가 베이징 올림픽에서 거두어들인 광고수익은 아테네 올림픽 때보다 30억에서 40억원 가량이 늘어난 230억원 정도라고 한다.


올림픽을 국가와 민족 간의 대결의 장이 아닌 뛰어난 실력을 지닌 전 세계 선수들이 모여 펼치는 축제의 무대로 보았다면,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과연 지금처럼 그렇게 뜨거웠을까? 그리고 개인적 활동인 스포츠를 국력과 연관지으며 이상 열기를 조장하며 실제적인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 마르크스는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우리 시대에는 스포츠가 '민중의 아편'이 된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빼어난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한 여성이 있었다. 젊은 시절에는 뛰어난 무용수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무릎 부상으로 부득이하게 영화배우로 변신했을 때도 그녀의 성공 스토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녀의 변신은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영화감독으로 직업을 바꾼 그녀는 조지 루카스의 '스타워즈',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 등 세계적 영화감독들이 앞다투어 촬영기법과 연출장면을 모방할 정도의 영화적 전범을 남겼다. 나이가 들어 영화감독에서 은퇴했을 때, 그녀는 탐험가이자 사진작가로 변신해 아프리카 오지를 누비며 아름다운 다큐멘타리 사진을 남겼다. 그녀는 바로 '히틀러의 카메라 눈'이자 '나치즘의 여신'이라 불렸던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이다.

 

 

(촬영에 몰두하고 있는 레니 리펜슈탈 감독) 

 

(히틀러와 함께 행사에 참석한 레니 리펜슈탈 감독)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된 나치 전당대회의 모습을 담은 '의지의 승리'(1935)는 지금까지도 히틀러의 모습을 인용할 때 사용되는 탁월한 기록영화이자 이 영화 이후 더 이상의 제작이 무의미하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뛰어난 나치 선전영화였다. 그녀의 카메라 앵글 속에서 모사된 히틀러의 모습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 신의 모습 그 자체다. 질서정연하게 도열한 나치 군대의 역동적이고 웅장한 모습은 현대의 액션 영화들이 스펙타클한 장면을 연출할 때 흔히 참고할 정도로 장엄함의 미학의 극치를 보여준다.


1936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올림픽의 총책임 감독이었던 레니 리펜슈탈은 18개월의 후반작업을 거쳐 4시간 분량의 올림픽 기록영화인 '올림피아'를 1938년에 세상에 내놓게 된다. 1부 '민족의 제전'과 2부 '미의 제전'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는 이후 거의 모든 스포츠 중계방송에서 사용된 테크닉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대규모 행사, 광고, MTV, 콘서트에서도 '올림피아'에서 사용된 장면이나 촬영테크닉이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파시즘 문화와 현대 대중문화 간의 아이러니칼한 유사성마저 암시하고 있다.

 

 

(영화 '올림피아'의 한 장면) 

 

(영화 '올림피아'의 한 장면) 

 

(영화 '의지의 승리'의 한 장면) 

 

 

베이징 올림픽을 보며 베를린 올림픽을 떠올렸던 건 단순한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적 거장 장예모 감독이 연출한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장면이나 폐막식 장면은 리펜슈탈의 그것 못지 않게 스펙타클했고 아름다왔다. 심지어 화려한 영상 뒤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철저한 탄압과 언론 통제가 은폐되어 있었다는 사실마저 유사했다. 나치는 올림픽을 정치적 선전도구로 철저하게 이용하는 한편, 유태인과 집시들을 추방하거나 투옥시켰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의 독립 요구를 군사적 무력를 동원해 무참히 진압했고, 공안을 동원해 올림픽 기간 중 어떤 시위도 티베트에 대한 언급도 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처음에는 중국의 인권 탄압을 지적하며 올림픽의 보이콧을 주장했던 세계 각국의 정상들도 베이징 올림픽이 개최되자 백 여명이 넘게 중국을 방문했다. 그들 중에는 꺼꾸로 된 국기를 흔들며 자신의 나라가 위기상황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는 센스를 발휘한 사람도 있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하찮은 정치적 명분 때문에 포기해야 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 베이징 올림픽 공안에게 붙잡힌 영국 ITN 방송의 존 레이 기자)

 

 

장예모가 연출한 화려한 영상들도 그 안을 살펴보면 공갈빵처럼 공허해보인다. 개막식에 선보였던 화려한 폭죽쇼도 CG로 연출된 가짜이고, 피아노 연주 장면도, 소수민족 어린이들의 입장 장면도, 청아한 목소리로 시선을 집중시켰던 소녀의 노래도 모든 게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소수민족 출신의 아이들이 모두 한족 출신의 아이들이었고,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이 못생겼기 때문에 예쁜 중국 소녀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에는 나치즘과 마찬가지의 인종차별적 가치관이 숨겨져 있다. 개막식 퍼포먼스의 일부로 기획된 오성홍기의 게양장면은 중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잘 보여준다.


올림픽이 '비정치적인 순수한 스포츠'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올림픽이 너무나 정치적인 행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천문학적 규모의 중계권이 오고가고, 광고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민족감정을 자극해야만 하는 올림픽 중계 방송이 과연 그렇게 순수한 것인가? 한 국가의 자신감과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전 세계로부터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는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올림픽은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행사이다. 게다가 국민들의 관심이 올림픽에 쏠려 있을 때 눈엣가시 같았던 방송국 사장을 내쫓고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인사를 낙하산 태우고, 최루가스 섞인 물대포로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진압하고, 그 동안 여론에 가로막혔던 공기업 선진화란 그럴 듯한 이름의 민영화 작업을 거침없이 추진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올림픽 기간 중 생긴 일들) 

 

 

그에 비해 베이징 올림픽을 바라보는 무한도전의 시선은 너무나 이상적이다. 올림픽을 상업적 마케팅의 수단으로 만들지 않겠다고 고백할 정도로 순진하다. 총성없는 국가 간 대결의 장인 올림픽을 세계인의 축제로 연출해낼 만큼 그 시선은 올림픽 본래의 이상에 더 가깝다. 그러나 굳건한 현실의 벽 앞에 그러한 이상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상업주의와 국가주의가 결탁한 음험한 클러스터가 훨씬 견고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그런 이상을 포기할 수 없는 건 그것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이 아닐까. 실패와 실수를 인위적 연출로 감추지 않는 솔직함과 당당함이야말로 베이징 올림픽에서 우리가 진심으로 아쉬워 했던 것들이 아니었을까.


축제는 끝났다. 그러나 무미건조하고 추악하기까지 한 현실을 아름답고 즐거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려는 우리의 노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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