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그의 사상/도산 안창호

[스크랩] 도산 안창호와 `일류국가로 가는 길`

ddolappa 2016. 8. 23. 02:13


도산 안창호는 환경을 개선 창조하는 원동력으로서 인간의 가치를 중시 했다.

오늘날 한국사회는 도산 안창호가 꿈꾼 민족전도대업, 일류국가의 실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이미 해외에서는 한국을 높이 평가하는 여러 지표들이 제시되고 있다. 광복이후 단시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진전시켰고 사회 각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인재들이  등장하고, 초일류의 기술과 상품들이 세계 시장에서 각광받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 일각에는 아직도 스스로의 위상과 능력을 과소평가하려는 경향이 있다. 일류국가를 향한 비전과 발전 방략을 논하고 국민에게 희망과 행복을 주는 이야기보다는 소통을 가로막고 대립과 갈등을 부추기고 사소한 이해관계에 얽매여 끝장을 보려는 경우가 많이 있다.  

 

21세기는 사람과 지식이 핵심 가치를 이루는 사회다. 도산 안창호는 환경을 개선하고 창조하는 원동력으로서의 인간의 가치를 중시 했다. 안창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오늘 한국사회는 애기애타(愛己愛他)에 바탕을 두고 국가와 인류사회를 위하여 실천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성숙한 소통의 능력과 양극화 해소와 갈등 해결을 위해 실천하고 봉사하는 사람이 필요하며, 국제 이해관계와 동북아 정세 등 정치경제적 긴장을 풀어 갈 수 있는 통합적 사고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의 긍정적인 신호를 새로운 동력으로 만들어 앞으로 전진해나가는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이 필요하다. 위기의 징후는 미리 읽어내고 냉철하게 대응하는 글로벌 인재가 필요하다. 한반도에 생명과 평화가 충만한 가운데 지속 가능한 성장을 도모하고 이를 후대에 물려줄 사명을 갖는 지도자가 사회 곳곳에 필요하다.


약 100년 전, 도산 안창호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분투하면서 동시에 광복 이후 新民新國의 새로운 국가 건설 비전을 선견하여 펼쳐보였다. 광복이후 민족전도 번영의 실현을 목표로 한 선진 한국의 가시적 전략으로 ‘독립운동방략’을 내 보인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암울하던 시대에 ‘낙심하지 말라’면서 희망을 웅변하였다. 이제 희망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경쟁력 있고 신인도가 높은 일류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마침 올해는 안중근 선생이 만주 하얼빈역에서 이등박문을 처단한 의거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1909년 12월 26일에 의거가 일어났고 1910년 3월 26일 여순감옥에서 교수형이 집행되기까지 5개월에 걸쳐 안중근은 그 유명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였다. 이 동양평화론은 오늘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국제적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1936년 2월에는 신채호 선생이 여순 감옥에서 8년 옥살이 끝에 순국한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도 노령의 나이에 이 감옥에서 1932년 11월 17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독립운동가 3인이 중국 망명지에서 그렇게 죽어갔던 것이다.

도산 안창호는 ‘힘이 없으면 힘을 길러야 한다’ 고 강조 했다

앞서 세 분은 모두 도산 안창호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분들이다. 이회영 선생은 신민회를 같이 했고 신채호 선생은 신민회뿐만 아니라 망명의 길도 같이 했다. 안중근과 안창호는 1907년 일제에 의해 국군강제해산에 맞서 시가전이 벌어졌을 때 목숨을 걸고 함께 부상병을 돌봤던 인연이 있다.

1907년 도산 안창호의 나이는 29세다. 16세 때 그의 고향 평양에서 청일전쟁을 체험하게 되었을 때 안창호는 나라에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힘이 없다는 사실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안창호는 힘이 없으면 ‘힘을 길러야 한다’ 는 적극적인 생각에 도달한다. 이러한 능력이 바로 지력이고 자각이다. 그리하여 안창호는 동네 서당에 다니던 것을 청산하고 신학문을 배우러 서울로 와서 구세학당에 입학한다. 서재필 선생을 따라서 독립협회 활동에 입문하여 사회개혁운동에 앞장선다. 19세 때 만민공동회 연설은 아주 유명하다. 배운 것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실천을 하다보면 역량을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안창호는 그래서 유학을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유학 생활은 가난한 안창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당시 조선에서 건너 간 이민자들의 생활은 갈등과 피폐한 생활로 얼룩져 있었다. 안창호는 공부의 길을 포기하고 한인사회의 변화와 개혁에 앞장서면서 함께 노동을 하며 그들을 이끌었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농장에서 오렌지를 따면서 안창호는 열변을 토했다. “오렌지 한 개를 따도 정성껏 따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요 힘을 기르는 일이다~!” 달라진 한인사회의 모습을 지켜보던 미국인들은 이들에게 회관을 빌려줬다. 거기서 ‘한인친목회’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 친목회는 곧바로 ‘공립협회(1905)’로 발전하고 1910년에 ‘대한인국민회의’로 업그레이드되어 미주지역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능을 수행한다. 공립협회 시절 안창호는 최초로 순국문판 ‘공립신문’을 발행하여 한인 사회를 변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미주 공립협회는 멀리 러시아와 중국까지 조직 확산 계획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안창호는 공립협회의 대한인신민회 통용장정과 취지서를 들고 귀국하여 1907년에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각 부문에서 활발한 구국운동을 펼친다. 그러나 안중근 의거로 더 이상 국내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안창호는 1910년 4월 7일 행주나루에서 중국인 소금 배를 타고 국외로 머나먼 망명길에 오른다. 안창호는 만주와 연해주와 중앙아시아와 유럽을 떠돌면서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만나서 ‘분산된 힘을 하나로 모을 것’을 염원하며 각종 회담을 선도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 안창호는 선진적인 국제인식과 너른 혜안으로 소통과 통합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소통과 통합은 안창호 독립운동의 핵심 전략이다.

망명길 끝에 안창호는 미주에 도착하여서도 하와이, 멕시코, 쿠바, 등지로 분산된 망명 지도자들을 하나로 모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으로서의 권한과 겸양의 리더십을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슈퍼리더로서의 임무를 감동적으로 이끌어 낸다. 그리고 1913년 5월 13일에는 전국 8도 대표와 25인의 동지를 규합하여 민족전도대업 준비를 위한 청년운동단체, 흥사단(Young Korean Academy)을 창립한다. 흥사단은 신민회 산하 조직으로 만들었던 청년학우회(1909)와 같은 성격이다. 안창호는 언제나 단체나 조직을 지속가능하게 이끌고 갈 청년조직을 하부에 설치했고 인재양성을 위한 각종 교육기관을 병행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나라의 독립을 위한 힘을 기르는데 있어 교육과 훈련 보다 더 중요한 대업이 또 있을까? 안창호가 ‘겨레의 스승’으로 불리게 된 까닭은 ‘민족의 일꾼 양성’에 지대한 공을 들였기 때문이다.  


협동과 단결, 소통과 통합을 위한 전략은 안창호 독립운동 방법에 있어 핵심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통합의 리더십은 안창호가 마침내 1919년 6월 한성과 노령과 상해임시정부를 하나로 통합하여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부임했을 때 유감없이 발휘된다. 미주에서 상해로 올 때 안창호는 ‘독립운동방략’이 담긴 청사진을 들고 왔다. 그리고 청사진에 담긴 실행계획에 따라서 국내 각지와 임시정부와 연락할 수 있는 비밀 지하 기구인 연통제를 임시정부 국무령으로 공포 실시하였고 임시교통국을 설치 운영했다. 독립신문을 발행하였고 대한적십자사를 설립하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전쟁준비를 위해 군적등록운동과 임시 헌법에 대한국민의 병역의무를 규정하고 1920년 5월에는 대한광복군 총영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사료편찬위원회를 설립하고 인성학교 교장에 취임하는 등, 역사의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발휘하며 정치, 경제, 교육, 문화, 군사 등에 걸쳐 슈퍼리더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모두를 아우른 통합력은 1920년대 국민대표회의 결성과 유일당인 한국대독립당 결성 운동 과정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된다. 이 과정에서 안창호는 사분오열의 독립운동 노선 통합의 대안으로 대공주의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대공주의의 본질은 조직의 통합을 통한 ‘민족단일국가건설론’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전반의 공익을 우선하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상대화, 민족과 경제, 정치, 교육 등의 4대 평등을 기초로 하는 사회민주주의 비전, 비타협적 항일투쟁의 노선 견지, 좌우 중도에서 민주주의적 민족국가 수립의 비전,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민족우선의 통일주의 등의 철학을 담고 있다. 아쉬운 것은 1932년 이후 안창호의 피체, 투옥, 순국으로 인해 이 같은 항일운동 노선의 대안이 구체화 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단결하지 않고 협동하지 않으면 국가의 힘은 길러지지 않는다. 단결과 협동의 전제는 소통이고 통합이다. 그 길이 일류 국가로 가는 길이다.

 

 원칙과 가치가 바로 설 때 인류국가로 가는 청사진이 나온다

안창호는 “우리를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각자의 양심과 이성뿐이다. 결코 어떤 개인이나 어떤 단체에 맹종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라가 흥성하게 잘 되고 잘 살려면 역사의 주체인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창호가 말하는 의식수준이란 역사인식에서 근간이나 뿌리를 자각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현실직시를 통해서 원칙과 시대의 가치를 알고 자신의 비전과 사명을 갖는 것을 말하며 미래예견을 통찰하여 방향과 목표를 정하고 실천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가 선각자 안창호의 리더십에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점이 있다면, 성찰과 자각, 꿈과 목표의 설정, 원칙과 가치 제시 그리고 애기애타의 생애와 업적을 이해하는 것이다. 안창호는 평생을 애기애타 리더십의 삶으로 일관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안창호를 따르고 있는 까닭은 그가 꾸었던 간절한 꿈, ‘온 인류의 완전한 행복’에 대한 메시지가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꿈이란 그런 것이다. 당대에 그 꿈이 실현불가능하게 보일지라도 언젠가 세대를 뛰어 넘어 반드시 실현되는 꿈, 그런 것이 꿈의 진정성이고 가치가 있는 꿈이다. 마틴루터 킹 목사의 꿈이 그런 것이었고 마하트마 간디의 꿈이나 백범 김구의 꿈이 그런 맥락이다. 우리는 위대한 꿈을 꾼 리더들을 슈퍼리더라고 칭한다.


안창호 리더십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시대 흐름에 대한 통찰력과 時宜에 맞는 결단력을 으뜸으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계획과 방침 등을 중시한 기획력, 단단한 조직력, 자금동원력, 모두를 아우르는 통합력,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높은 인격 그리고 공론을 중시한 대의민주적 사상 등이다. 이러한 리더십은 모두 정직하고 성실한 삶과 솔선수범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신뢰성과 동지애 그리고 지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비전 제시로 바꾸어 말 할 수 있다. 안창호는 동지들에게 ‘애기애타’라는 글귀를 즐겨 휘호로 남겼다. 愛己愛他는 동양사상인 修己治人의 안창호식 표현이다. 애기는 부단한 자아혁신이고 애타는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인간관계 즉 봉사와 겸양의 정치철학이다.  

 

안창호는 어릴 적 경험을 토대로 “거짓이여 너는 내 나라를 죽인 원수다. 내 죽더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이 독립운동의 일생을 관통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안창호의 성품이고 인격이다. 안창호에 있어서 “힘”은 경제, 지식, 신용의 자본을 의미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의 자본’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에도 이 세 가지 힘의 원칙은 나와 우리와 국가에 꼭 필요한 가치이다. 이렇듯 안창호의 힘의 원칙은 여러 가치 핵심 가치들로 구성된다. 정직, 주인정신, 책임감, 협동, 애기애타, 무실역행, 균형과 개조, 희망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보편적 가치들이다. 원칙과 가치가 바로 서 있을 때 비전이 수립되고 일류국가로 가는 청사진이 나오는 것이다.(끝)

 

2010. 모 단체 기관지에 기고 한 글

흥사단 이은숙

출처 : 무실역행
글쓴이 : 애기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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