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선생은 우리 民族의 先覺이요 獨立運動의 偉大한 指導者였으니 萬一 오늘까지 生存해 계시었더면 그 나이 今年에 일흔 살이다. 解放이래 建國의 큰 事業이 遲遲不進하는 이 時機에 있어서 그가 살아 계셨더라면 어지러운 局面을 收拾하고 헤매는 民衆을 바로 引導하는데 횃불 같은 밝음으로 大路를 開拓할 수 있을 것을- 하고 누구나 渴望하고 哀惜하지 않은이 없으나 嗚呼라 先生이 獄苦에 原因하야 逝去하신지 이미 거진 十年의 歲月이 흘렀다.
선생은 혁명가요 정치가인 동시에 교육가요 청년의 지도자였으니 四十有餘年革命生活에 ‘밥을 먹어도 獨立위해, 잠을 자도 獨立위해’ 그 畢生을 바치신 것은 민족정신의 化身이라 할 것이며 新民會와 美洲國民會의 조직 활동이며 上海臨時政府의 推進과 獨立運動方略起草, 大獨立黨의 創設 등은 그 政治的 守法의 非凡함을 證하며 그의 誠實 謹嚴 和暢한 생활태도는 靑年의 人格的 模範이었고 大成學校, 靑年學友會, 興士團 등의 業績은 國民敎育家로서의 面目을 드러낸 것이다. 政治家인 동시에 敎育家, 革命人인 同時에 道德人인 그의 人格은 길이 歷史上에 그 獨特한 光彩를 發할 것이요 民族代代의 師表가 될 줄로 믿는다.
先生, 이름은 昌浩, 號는 島山, 檀紀 4211년, 西曆 1878년 戊寅 11월 11일 大同江下流 도롱섬에서 農家의 次男으로 태어났다. 키는 중키요 體質은 수척한 편이었으나 얼굴은 威嚴과 溫和를 兼하였다. 입은 굳게 다물어 굳센 意志를 表明하고 빛나는 눈은 銳利한 觀察力과 明哲한 頭腦를 나타내었다. 항상 몸 가지기를 謹嚴하게 하야 姿勢를 허트리는 일이 없었으니 이는 後進에게 模範을 보이기 위하야 스스로 自制함이었다고 생각된다. 音聲은 明瞭하고도 부드러웠고 사람을 대할때에 實用 親切하고도 正肅하야 한번도 凡然스러움을 보지 못하였으며 無限한 感化力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의 周圍에는 恒常 助言과 判斷과 勉勵를 구하는 人士가 모여들었다. 年少者는 勿論이요 年長者라도 그에게 敎導를 받기를 원하였고 그럴때마다 先生은 그 誠心을 다하야 明哲한 理論과 深愼한 同情으로 자기의 所見을 披瀝하였다.
先生의 生活原理는 誠 과 愛와 奉仕의 세 가지라고 하겠고 一動一靜에 이를 表現化하고 實行化하고 人格化하기에 努力하야 마츰내는 그의 몸 自體가 이러한 情神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誠을 主로 하매 거짓과 남을 속이는 것과 虛張聲勢를 自他에게 警戒하였고 政治運動에 까지라도 權謀를 排斥하고 誠實 率直을 主張함으로 때로는 同志들과 意見이 어긋나기도 하였다. 愛 를 중심으로 하매 害치려는 사람을 미워함이 없고 서로 사랑을 공부하자로 主張하였으며 더욱이 政治에 있어서는 同族間에는 絶對 無抵抗을 실천하니 이 역시 同志政客間에 때로 불만을 사는 일도 있었다. 그는 심지어 日本을 打倒하는 것도 日本民族이 軍閥의 野望 때문에 自滅의 길에 들(-----)자는 人類愛의 精神으로 하는 것이라고 說明하였다. 奉仕를 주로함에 平生에 자신을 (------) 家族을 위해서라도 安快를 돌봄이 없었고 오직 同志와 團體와 國家를 위해 생각하고 말하고 몸을 바쳤다.
선생은 雄辯으로서 이름이 높다. 二十歲少年으로 이미 快哉亭 萬民共同會席上에서 處女演說을 하야 全國을 振動하였거니와 第1次 美洲서 歸國하는 때에 東京서 留學生을 앞에 놓고 一大演說을 하야 學生界를 感奮케 하였으며 그 소문이 서울에 喧傅(훤전)하였다. 己未年에 상해에 도착하야 북경로 예배당에서 吐한 熱辯도 당시 상해人士의 驚異였고 오늘날까지 그때 感激을 기억하는 인사가 많다.
선생의 음성은 그리 높지도 않고 그리 얕지도 않은 中音階로 깊이가 있고 부드럽고도 약간 悲壯調를 띤 것이며 그 辯辭는 美文麗句를 擇하지 아니하고 率直, 平明, 簡潔하면서도 獨創的인 表現과 構成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듣는 자가 몇 시간이라도 지루함이 없고 高聲叱呼하거나 탁을 치고 팔을 뽐냄 없이 沈着順坦한듯 하면서도 마치 大海의 속 물결처럼 不知不覺중에 高潮에 달하야 聽衆으로 하여금 손을 쥐고 呼吸이 가쁘며 萬歲를 저절로 高唱하게 하는 것이었다.
선생은 또한 座談에 能하야 옛날 希臘 哲人의 問答과 같은 방법으로 相對를 說服함에 능하였다. 論敵의 理論에는 滿腔(만강)의 敬意로 傾聽한 후 서서히 묻고 대답하는 가운데 論者로 하여금 不知中 自家理論의 矛盾을 깨닫게 하였으며 또 배움을 청하는 이에게도 結論을 注入하는 방법을 취하지 아니하고 묻고 대답하야 자기의 대답으로 스스로 怳然히 깨닫게 하였으니 선생은 천생의 敎師라 할 것이다.
선생은 또 많은 노래를 지어 靑年學徒로 하여금 부르게 하였다. 그 歌詞가 美文的으로 絢爛(현란)함이 아니고 그 着想과 表現이 肺腑를 찌르는 것은 선생의 人格이 그리함일 것이다. 저 유명한 去國歌를 위시하야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愛國歌도 선생의 作이요 그밖에 흥사단입단가, 점진학교교가, 牡丹峯歌 등도 선생 作中의 일부이다.
선생은 그 六十平生을 전반은 나라를 잃지 않으려고 싸우고 그 후반은 나라를 도루 찾으려고 싸웠으니 그 中心思想은 民族主義로 일관하였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다시 세분하면 첫째는 日本侵略 노력을 排擊하고 民族國家를 回復守護하려는 獨立思想이요 둘째는 그 민족국가를 理想的으로 建設하려는 大公主義요 셋째는 民族 永久繁榮의 基礎力量을 수립하려는 興士團理念이다.
淸日 俄日 兩戰爭을 겪고 泰西帝國主義의 脅威를 직면하던 韓末風雲時代의 憂國之士들의 基本思想이 民族主義 일색이요 다른 복잡한 理論아 없었으니 도산의 당시 思想도 민족주의로 중심을 잡고 富國强兵政策을 堅持함이 驚異치 않다. 나중에 俄羅斯革命이후 세계를 휩쓰는 社會改造理念에 逢着하야 그 민족주의가 내용적으로 建設理想을 갖추게 된 것이 大公主義다. 그러나 대공주의가 理想社會建設의 構圖를 포함하였으나 그 基本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에 둔 것이 사실이니 도산의 晩年思想은 부국강병이념에서 한걸음 나아가 왼편에 國制主義를 두고 바른편에 民族資本主義를 바라보면서 그 中庸을 취해 가는 進步的民族主義라 할 수 있다.
도산의 민족주의를 이처럼 前後二期로 갈라 볼 수가 있는 동시에 그것을 또한 革命勢力의 增長强化의 필요성을 主張한 점과 그를 위한 組織과 計劃의 重大性을 提唱한데서 特色을 취할 수가 있다. 도산은 悲憤慷慨만을 일삼는 感傷的 愛國主義와 어서나가서 죽자고 하는 無計劃的 急進論을 恒常戒心하는 입장에 섰었다. 秘密結社 新民會를 基礎로 敎育과 産業과 表現的 連結機關을 配置함도 도산의 計劃性의 표현이었고 상해에서 ‘獨立運動方略’을 先着手함도 同調이었다. 들먹이는 同志들의 興奮을 반대하고 伊藤과 寺內의 內閣組織提案을 拒絶한 것도 도산의 實力論의 發顯이었다. 도산은 國際政局의 전환을 위대한 眼光으로 透視하고 十年敎訓 十年生聚를 주장하였으나 多大數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美日戰爭의 好機를 朝鮮이 無準備로 맞이하여 금일의 他力解放의 비운을 겪게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大公主義란 말을 도산이 처음으로 사용하기는 1927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말은 도산의 獨創이니 그가 世界改造思想의 風潮를 깊이 考察하고 이를 消化하야 스스로 到達한 理想의 總稱을 이렇게 命名한 것이다.
大公主義의 精神的. 倫理的 意義는 “個人은 民族에 奉仕함으로써 그의 天職을 다한다”는 그의 國家第一, 民族至上의 人生觀을 총괄한 것이다. 여기서 大公은 곧 全民族의 福祉, 公共의 利益, 國家의 要請을 表示하고 그에 대하야 個體, 小我, 私益을 犧牲할 것을 要求하니 이는 功利主義 自由主義 個人主義에 대한 비판을 意味한다.
經世的으로 본 대공주의는 理想社會建設의 設計圖니 도산은 侵略主義에 대한 民族解放思想, 政治的 民主主義思想, 經濟的 搾取에 反抗하는 社會革命思想, 링컨의 民有.民治.民享, 손문의 民族, 民權, 民生, 내지 種族 相互扶助에 근거한 自由聯合社會思想 등을 綜合하여 그 모든 長處를 취하고 短點을 去한 調和的 建設理念을 세우려 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當面의 政策을 民族平等, 政治平等, 經濟平等, 敎育平等의 네 가지 平等을 主張하였다.
선생은 世界에 風行하는 모든 思想에 대하여 無條件贊同과 無條件排斥을 다 경계하고 科學的 態度로 이를 考究하여 그 長短을 取捨함을 주장하였다.
흥사단의 근본이념은 우리 民族性格의 革新向上이 民族解放과 繁榮의 기초가 된다는 것이니 이 또한 도산선생의 獨創的着眼이다. 세계 각국의 민족을 比較硏究할 때에 그 선천적 天禀과 知能에 차이가 없는 것은 학자들이 考證한 바다. 그러나 氣質의 차이와 傳統的 社會的 遺傳의 차이로 민족전체적 공동생활 營爲能力에 愚劣이 생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요 朝鮮民族이 封建文弱적 제도와 外人의 壓政으로 종종 劣敗的 習性을 가지게 된 것을 선생은 痛切히 指摘하고 전민족적 노력으로 이를 打破할 것을 主唱하였다.
打碎(타쇄)하여야 할 약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것은 虛僞와 空論과 公共生活訓練의 薄弱이다. 虛禮化한 君子之道, 空論化한 學問, 虛張聲勢化한 自尊心, 非生産化한 廉潔, 煩惱化, 女性化한 名分論, 自相踐踏的인 英雄心, 이 모든 것이 우수한 본질의 退化, 惡化의 결과를 가르치는 것이다.
일반 同胞는 이런 약점을 正視하려 하지 않고 오직 外廓的 變革만 단행되면 우리 민족은 일약 자유와 해방을 獲得할 줄로 생각한다. 그러나 도산은 이를 空想이요 僥倖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규정하였다. 또 어떤 이는 이런 弱點은 민족운동 진행 도중에 자연 消滅되리라고 막연히 믿는다. 그러나 도산은 전문적으로 이러한 民族性의 革新運動을 일으켜야 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몸소 實施한 것이 청년학우회였고 흥사단이었다.
이 운동을 실천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그는 獨特한 길을 取하였으니 곧 一般敎化團體와 같이 宣傳과 敎導에 그치지 않고 나부터 革新하여 민족을 혁신하자는 ‘同盟修鍊’의 방식을 採擇한 것이다. 民族更生을 목표로 안 청년과 成人의 자아혁신동맹 이것은 일방으로 童子軍이나 靑年會運動과 비슷한 듯 판이하며 他面 정치적운동과도 구별되는 것이다.
도산은 또한 農村改良이 조선에 중요한 당면과제라 생각하여 모범농촌계획을 품고 있었으니 이는 制度나 法令보다도 實際示範에 의하여 보수적인 농민을 啓蒙하자는 것이요 協同組合運動을 贊同하였고 직업학교설립을 기획하였다.
선생이 60년 혁명생애간에 직접 간접으로 혹은 指導 혹은 關與하신 사업은 政治, 言論, 文化, 經濟, 敎育 등 다방면에 뻗어 있다.
우선 정치방면으로 활동하신 조적을 살피건대---
獨立協會 - 갑오, 乙未경 청일전쟁 전후, 민족독립정신이 大發하야 徐載弼, 李承晩등이 獨立協會를 조직하고 뒤에 萬民共同會로 발전하야 경향각지에 愛國, 啓蒙의 一大運動을 일으키니 선생이 20의 소년으로 奮然, 이에 가입하야 平壤에서 關西支會를 發起活動하였다.
國民會-23세에 美洲에 건너가 僑居同胞의 권익옹호와 생활향상을 목표로 한 ‘공립협회’를 정재관, 김성무 등 동지와 함께 창립하고 이어서 이를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야 금일에 이르렀다. 失國후에 이 국민회는 僑居同胞의 유일한 보호기관이 되어 적어도 미주에 있어서는 정부아닌 정부 행세를 하야 그들은 일본영사의 구속을 아니 받고 태극기와 애국가를 지키며 국어학교를 경영하며 미국정부를 상대로 韓人證을 발행하며 신분의 보호와 권익을 代守하여왔다. 그 조직범위가 布哇(하와이), 멕시코, 큐바에 미쳤고 일시는 西佰利까지 연결하였으나 소련이 된 후 거기는 없어졌다.
國民會는 또한 三一運動을 전후하야 이승만을 와싱톤에 안창호를 상해에 派送하야 독립운동에 전념케 하였으며 상해와 중경시대의 임시정부의 유지재원도 다년간 국민회가 걷어 보내는 愛國金이었다. 해방이후 국민회는 다른 國體들과 연합하야 재미한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시대를 단장으로 한 15명의 대표단을 국내에 派遣하야 건국운동에 기여하였다.
新民會-제1차 미국행으로부터 귀국한 도산은 보호정치하에서 맹열한 배일구국활동을 振興하였으니 그 중심근거는 秘密結社 신민회였다. 그 중요분자는 선생과 및 전덕기, 양기탁, 안태국, 이갑, 이동녕, 이동휘, 김구, 유동열, 노백린, 양준명, 이회영, 이승훈, 유동작, 주진수, 최광옥, 조성환, 김동원, 이덕환, 등이었다. 그 조직이 周密鞏固하고 전국의 정예분자를 망라하야 秘中에 聲勢가 떨치니 일본이 가장 疾視하야 機密을 알려고 애썼다. 그 목적은 첫째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의 鼓吹, 둘째 동지결합 투사양성, 셋째 교육진흥, 넷째 국민경제진흥 등이었고 各道와 郡에 책임자를 두되 縱으로 연결하나 橫으로는 숨겨 秘密綻露를 방지하며 동지조직으로 하야 입회시에는 신용, 애국심, 단결심, 등을 엄선하였다.
신민회가 중심이 되니 정치, 교육, 문화, 청년, 산업 각 방면으로 운동을 추진하였으나 국운이 불리하야 망국의 쓰라림을 받게 되고 많은 회원은 해외 망명을 하게 되어 도산도 그 중에 들었다. 合倂末久에 소위 寺內總督暗殺陰謀事件을 日政의 警務摠監 明石元二郞이 造出하야 그를 구실로 전국의 지도인물을 대량검거하니 그 수가 칠백을 넘었고 기소된 자만이 百五人이므로 세칭 이를 백오인사건이라 한다. 악형으로 증거를 위조하야 공판에 부쳤으나 마침내 국제체면상 대부분을 무죄언도하고 윤치호, 양기탁, 이승훈, 안태국, 임치정, 옥관빈 등 6명을 복역케 하였다. 이 사건이 곳 일정의 신민회파괴공작이었던 것이다.
臨時政府- 상해임시정부에 있어서의 도산의 활동은 세간에 선전하는 바이거니와 선생은 우연히 상해에 먼저 도착한 관계로 초창시기에 다른 거두들이 미처 모이기 전에 내무총장으로 국무총리대리를 겸하야 그 출발을 거의 獨力으로 지도하였고 거두들이 모인 뒤에는 노동국총판의 한직에 있어 대동단결을 실시키 위하야 苦心焦思하였다. 국내연통제의 추진과 혁명사료편찬, 宣傳, 외교 등으로 백방활동 하면서 국민대표회의에서 최종적으로 통일이 분열될 때 까지 각 파간에 조화에 최대의 노력을 다 하였다.
韓國老兵會 - 상해에서 선생은 또 여운형, 이유필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였으니 청년에게 생산기능과 兵術을 같이 배우게하야 평시에는 해외교포의 생활을 향상하고 유사시에는 광복군으로 편성하자는 계획이었다.
韓國獨立黨 - 해외운동이 사상적으로 共産, 民族 兩主義로 분립이 되매 선생은 김구, 이동녕, 조소앙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야 민족운동전선의 대동단결을 도모하였다. 선생 피납후 이 당은 중경으로 옮겼다가 해방후 환국하야 금일에 이르렀다.
다음에 언론방면으로 남기신 족적을 살피면 독립협회시대의 ‘獨立新聞’이며 俄日戰役이후 환국활동시대의 ‘大韓每日申聞’, ‘皇城新聞’, ‘帝國新聞’ 등이며 삼일운동이후의 ‘東亞日報’, ‘朝鮮日報’ 등은 다 민족정신의 鼓吹와 民族文化啓發의 쟁쟁한 기관이니 선생은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에 참가하거나 혹은 동지와 후진을 연결하야 이에 협조케 하였다. 한말 언론계의 투사이던 양기탁, 유근, 박은식, 장지연, 신채호, 임치정 등이 다 선생의 동지였다. 미주에서는 친히 ‘共立新報’를 발행하였고 나중에 ‘新韓民報 ’로 改題하였으니 곳 國民會 의 기관지다. 신한민보는 순한글로 발행되어 금일까지 계속되고 있는바 현재 유일의 自動植字機 (인터타잎)를 사용하는 신문이다.
상해에서는 ‘獨立’(신문)을 창간하야 민족혁명사상을 국내외에 鼓吹하였고 또 혁명사료편찬회를 임시정부에서 主辧케 하였고 그 결과로 백암 박은식의 ‘韓國痛史’가 나왔다.
국내동지들을 시키어 발간한 ‘東光’잡지와 同社의 간행책자는 조선문화보전투쟁에 기여함이 있었다.
선생은 특히 교육방면과 문화진흥에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정치운동과 긴밀한 연결하에 각종 기관을 추진하셨다.
漸進學校 - 선생이 소년에 고향 땅에 점진학교를 일으키기 위하야 새로운 제도와 敎材를 채용하야 신문화를 攝取하였고 그 명성이 遠近에 퍼지어 수많은 신교육학교가 생겨났다.
大成學校 - 신민회를 중심으로 이종호, 오희원, 오치은, 김진후 등 有志와 함께 평양에 대성학교를 세우니 이는 중학정도의 학교로서 도산의 교육사상을 구현하는 동시에 정치, 군사, 과학에 注重하야 민족운동투사를 양성키 위함이었다. 선생이 친히 薰陶하니 교풍이 독특하고 정신이 철저하야 전국 각지에서 멀리 欽仰하고 진학하는 자가 많았다. 오늘날 解放戰上의 지도자 중에는 당시의 대성학교에 적을 두었던 영재가 많다. 학교는 전국대도에 다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미구에 時運이 기우매 閉鎖를 당하였다.
太極書館 - 신민회 사업 중에 태극서관이 있으니 일방으로 동지등의 비밀연락기관인 동시에 또 한편으로 圖書의 출판과 보급으로 민족의식의 鼓吹와 문화의 향상을 꾀함이었다. 이 書館을 경성과 평양과 대구에 두었고 각 지방에 증설하려다가 신민회와 운명을 같이 하였다.
靑年學友會 - 신민회의 표현기관이요 청년훈련운동으로 청년학우회를 세우니 그 宗旨와 조직이 뒤의 흥사단의 계승한바 되었다.
興士團 - 失國후 도산이 미국 加洲 客居地로 돌아가서 청도회담릐 약속을 지키어 청년학우회의 후신으로 흥사단을 조직한 것이 1913년이다. 발기인은 송종익, 황사선 등 8인으로 조선팔도를 망라하였다. 羅城에 본부를 두고 紐育(유육), 시카고 기타 각지에 지방회를 두어 청년유학생들이 많이 감화를 받았고 1919년 도산이 상해로 오메 임시정부 視務의 여가를 이용하야 同團원동위원부를 조직하고 純厚착실한 청년을 훈육하니 당시의 미주及중국의 유학생중 도산의 훈도를 받은자가 해방이후 금일에는 각 방면으로 건국사업에 복무하고 있다.
1922년에는 경성에 수양동우회가 생기고 평양에 동우구락부가 생기니 다 흥사단의 취지를 따른 단체다. 뒤에 양자가 합하야 동우회가 되었더니 1937년에는 중일전쟁나든해에 회원이 총검거되는 동시에 강제로 해산되었다.
해방이후 중경과 미주에 단우가 입국하야 국내동지와 협력하야 국내위원부를 조직하고 선생의 유지를 펴게 되었다.
東明學院 - 1925년에 중국 남경에 동명학원을 설립하고 서양으로 진학코저 하는 학생의 준비교육과 아울러 청년의 정신지도를 꾀하였다. 오늘의 학생이 후일의 지도자이므로 그들에게 바른 인생관과 민족관을 계발함이 크게 필요한 일이라고 선생은 믿었다. 이 학원기지가 중일전쟁으로 일본의 탈취한바 되었으나 해방 후 남경정부에 다시 찾기로 교섭중이다.
도산은 일찍부터 조선민족의 경제산업발전에 관심하야 이를 推獎하였고 해외에 있어서는 특히 혁명사업의 재정적 기초를 세우기 위하야 동지들로 하여금 실업기관을 경영케 하였다. 즉 신민회시대에는 국내에다가 이승훈, 김남호, 이덕환 등으로 하여금 ‘마산동자기회사’를 세워 도자기 공업을 창시케 하였고 북미에서는 임준기, 송종익, 김성권등으로 하여금 ‘북미실업주식회사’를 창립케 하였다. 상해에서는 ‘대생철공장’의 사업을 援助하였고 ‘공평합작사’를 발기하야 협동조합운동을 개시하였다.
이상은 형태적으로 드러난 사업을 대략 적은 것이요 선생의 참말 중요한 사업은 조선민족을 깨우치고 조선청년을 薰陶함에 있었다. 혹은 회의석에서 혹은 좌담지간에 동포를 향하야 청년학생을 향하야 단결의 중요성과 그 방법을 가르치며 ‘참’의 윤리와 ‘힘’의 실천, ‘사랑’의 도와 ‘믿쁨’의 덕을 론하고 ‘당신은 조선의 주인입니까?’ 부르짖어 민족의 총역량을 조선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집결하려는 不斷不休의 노력, 그것이야 말로 선생의 무형한 대사업이었다.
선생의 생애는 이를 대별하야 편의상 6시기로 나눌 수가 있다.
1. 소년시대 (21세 이전, 독립협회 가담으로부터 미주유학까지)
2. 미주유학시대 (22세로 29세까지, 국민회의 창립 발전에 헌신)
3. 신민회시대 (30세로 33세까지, 보호정치 밑에서 맹열한 排日復國운동을 전개함)
4. 미주망명시대 (34세로 41세까지, 국민회, 흥사단을 중심으로 실력을 양성함 광복대책의 기초를 닦은 시기)
5. 상해시대 (42세로 54세까지, 삼일혁명을 계승하야 임시정부를 육성하며 반일공작을 추진하던 시기)
6. 被囚(피수)순국시대 (55세로 61세까지, 대전감옥생활과 출옥 2년 만에 재검거되어 순숙하신때까지)
각 시대에 亘한 선생의 모든 행적은 본문각장에 나누어 詳述할 것이다. 약관으로 민족해방운동에 참가한 이래 선생의 환경은 날로 불리하였다. 그 기간은 일본제국주의의 繁茂期(번무기)에 해당하였다. 일본은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驅逐하야 이를 독립케 하고 다음은 보호국을 만들고 마츰내는 합병을 하였다. 조선을 기지로 하야 만주를 傘下에 두고 중국본토를 進攻하였다. 도산은 일본의 양자강진격을 모르면서 殞命하였다. 그의 일생의 사업과 誓願이 가장 暗澹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대한 정치적 透眼으로 일본제국주의의 破綻이 반드시 올 것을 豫觀하고 그 날을 위하야 민족의 혁명역량을 蓄積할 것을 가르쳤었다.
돌아가신지 10년이 다 못차서 조선해방의 날은 왔다. 이 날을 같이 즐기지 못함은 원통한 일이었다. 그의 동지와 제자들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엎드려 통곡하였다.
만일 선생으로 하여금 오늘에 생존함을 얻게 하였던들 그의 바다 같은 웅변이 얼마나 삼천만동포의 격려가 되고 慰勞가 되고 힘이 되었을까. 그의 沒我的 정성과 廣大한 포용력과 명철한 정치적 포부가 난국을 타개함에 얼마나 큰 위력을 발휘하였을까? 실로 민족의 불운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선생은 이미 가고 없다. 그러나 선생의 정신은 우리가운데 살아 있다. 우리는 선생의 애국지성을 본받고 선생의 高遠한 사상을 발전시키고 선생이 남긴 사업을 계승하야 무수한 도산이 이 땅에 생겨 독립을 戰取하고 민족의 영구번영을 확보할 것이다. 이것이 선생의 영을 위로하는 유일의 길이다. (1947. 2. 15. 編者 識)
[도산안창호 1947년 발행]
후기: 어떤 분이 이렇게 훌륭한 서문을 썼는지 오늘 우리는 알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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