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는 무한도전 리뷰 497회
- 2016 무한상사: 위기의 회사원들 3탄(160910)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음주운전 사고로 길과 노홍철이 연속으로 하차하고, 새로 들어온 광희가 아직 제 몫의 역할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형돈마저 공황장애로 하차 선언을 했을 때, 무한도전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기존 멤버들에 대한 공고한 팬덤으로 새로운 추가 멤버를 받아들이는 것도 여의치 않았고, 또 광희처럼 새로운 멤버가 제 역할을 못할 경우 무한도전의 시름은 오히려 더 깊어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남은 멤버들끼리 하차한 멤버들의 빈 자리까지 메워야 했지만, 날이 갈수록 비어있는 공백은 더욱 도드라지게 드러났고 프로그램은 눈에 띄게 발랄한 개성을 상실해갔다. 제작진은 그 대안으로 수많은 협업 프로젝트를 내세웠지만, 젝스키스의 재결합 프로젝트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비록 시청률은 매주 고르게 유지했지만, 멤버들은 물론 프로그램 자체가 바닥을 향해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리고 무한도전이 꺼내든 회심의 카드가 '2016 무한상사' 특집이다. 2015년에 방송 10주년을 맞아 발표되었던 5대 기획 특집 중 하나로 정두홍, 허명행 무술감독과 '액션 블록버스터 무한상사'를 찍기로 기획했다가 무산된 프로젝트였다. 이제훈, 김혜수, 쿠니무라 준, 지드래곤 등 수많은 스타들의 참여 소식이 알려질 때조차 기대만큼 우려와 걱정 역시 커져만 갔다. 이미 수많은 컬래버레이션 작업이 미진한 성과만 남긴 채 종료되었고, 더우기 캐릭터들 간의 합이 중요한 콩트에서 멤버가 3명이나 빠진 무한상사가 제대로 진행될 리 만무해 보였다.
'2016 무한상사'가 마지막 방송을 마친 현재 무한도전은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회생시키는데 성공했다. 근 두 달 간 불면증에 시달리며 노심초사했던 장항준 감독을 비롯한 영화 제작진과, 그들을 뒤에서 말없이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무한도전의 제작진, 그리고 개런티를 깎아가면서도 무한도전에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했던 배우들의 헌신과 열의가 사그라가던 무한도전의 불꽃을 다시 새롭게 일으켜세웠다. 물론 무더위와 싸우며 밤샘 촬영도 마다하지 않았던 무한도전 멤버들의 노고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번 특집이 갖는 의의는 무한도전이 무난하게 영화를 제작해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무한도전의 모토인 '도전' 정신이 무엇인 지를 제대로 보여주었고, 그들의 무모한 도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한 마디로 '2016 무한상사'는 무한도전의 존재 가치를 입증한 사건이었다. 더우기 이런 성과는 대부분의 이를 상실한 채 남아 있는 잇몸으로 거둔 성과여서 더욱 값지다. 이제서야 11년이란 세월이 노쇠함이 아닌 노련함의 표시로 다가온다.
패러디와 스릴러의 문법으로 재해석된 무한상사
영화 '곡성'에 출연한 아역배우 김환희가 등장해 유행어로 등극한 그녀의 대사 "뭣이 중헌디?"를 내뱉은 순간 앞으로 노골적인 패러디가 이루어질 것임을 짐작케 했다. 이후 극의 전개는 영화 '베테랑', '내부자들', 드라마 '싸인', '미생', '시그널' 등의 인용으로 가득 채워졌다. 돈과 권력 앞에서 나약하지만 소신있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샐러리맨들이라는 설정은 '미생'으로부터 차용한 것이다. 재벌가의 후계자가 자신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더 큰 범죄를 저지른다는 설정은 '베테랑'에서, 그리고 권지용 전무의 범행 일체가 담긴 블랙박스의 영상을 회사원들의 휴대폰으로 전송해 폭로한다는 설정은 '내부자들'로부터 빌린 것이다. 심지어 각각의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했던 배우들이 직접 출연해서 극중 연기를 펼치기까지 해서 패러디라는 사실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김은희 작가는 완전히 독창적인 서사를 창작하는 대신 기존의 익숙한 서사들을 가져와 스릴러 장르의 문법으로 재구성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녀의 이러한 전략은 작가적 태만의 소치로 치부될 수 없고, 오히려 그녀가 무한도전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미 무한도전은 수많은 분야에 걸쳐 다양한 패러디 작업을 해왔다. 특히 '쪽대본 특집'은 수많은 막장 드라마들을 패러디하는 한편 그것을 드라마 산업 전반에 대한 성찰로 승화시켜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게다가 아무리 무한상사의 영화화 작업이라 해도 그것이 전달되는 텔레비전 매체의 속성 자체를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양한 연령대의 시청자들을 상대로 한 시나리오 작업에서 무리하게 새로움을 추구하기 보다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비트는 작업이 오히려 더 적합할 수 있다.
그 결과 장항준 감독과 김은희 작가 부부의 손에 의해 재탄생된 '2016 무한상사'는 프로그램의 특성을 살리면서도, 콩트에서 뮤지컬을 거쳐 스릴러 장르의 영화로 무난히 진화해 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것은 무한상사가 앞으로 연극이나 단막극의 형태로도 제작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번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인해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연기 장인들의 미친 존재감
'2016 무한상사'가 높은 완성도를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로 김은희 작가의 밀도 높은 시나리오, 장항준 감독의 재치있는 연출력 외에 초대된 배우들의 빼어난 연기력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장항준 감독이 일본에 직접 가서 섭외할 정도로 공을 들였고, 김태호 피디가 방송국에 식당이 있음에도 그가 한국에서 영화 촬영을 하며 반했다는 밥차를 따로 불러서 그가 좋아하는 삼계탕을 준비할 정도로 정성을 쏟은 배우 쿠니무라 준은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화면을 장악했다. 부드럽고 온화하지만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무게감과 깊이를 느끼게 하는 그의 표정과 음성은 세월을 깊이 있게 보낸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를 화면 밖으로 전달했다. 그의 대사를 통해 사건을 풀어가는 단서에 불과한 소품이었던 오르골이 단숨에 직장인의 삶을 빗댄 상징으로 둔갑하는 장면은 그의 섭외 의도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곡성'에서의 과장된 연기보다는 오히려 이번 프로젝트에서 선보인 일상 연기에서 그만의 개성과 매력이 더 잘 드러났다. 그로서도 무한도전에 출연한 것이 그리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등장만으로 촬영장의 공기를 바꾸어놓을 만큼 뛰어난 카리스마를 보여준 또 다른 배우는 김혜수다. 그녀는 눈빛 하나만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내공의 연기력을 선보였다. 정극 연기가 처음인 지드래곤을 능숙하게 리드하며 연기의 완급을 조절하는 모습은 그녀가 어떤 수준의 연기자인 지 짐작케 했다.
'2016 무한상사'의 후반분량을 책임진 지드래곤은 처음 도전하는 정극 연기인 만큼 때때로 미숙함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극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고, 특히 자동차 사고신이나 체포신에서는 특유의 광기 어린 강렬한 눈빛과 표정 연기로 배우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감정을 폭파시켜 전달해야 하는 뮤직 비디오 촬영에서 익힌 연기의 내공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입증했다.
'뮤지컬 무한상사'의 감동을 대부분 책임졌던 정준하는 하하와 함께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미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 등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그의 경험은 진지한 연기에서도 빛을 발하며 웃음에 페이소스와 깊이를 더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콩트에서 시작한 무한상사가 보다 입체적인 웃음을 줄 수 있는 극의 형태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정준하의 연기력에 전적으로 의존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모든 멤버들이 웃음기 없는 정극 연기에 도전한 이번 프로젝트는 이후 무한상사의 콩트를 더욱 풍부하게 할 자양분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어떤 배우보다 짦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시선을 집중시킨 배우는 따로 있다. 바로 정형돈이다. 김은희 작가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어렵게 출연을 결정한 정형돈은 등장 순간부터 '미친 존재감'을 보여주었다. 한 때는 웃기는 것을 빼고는 모든 것을 잘 했지던 남자, 유일한 단점인 웃기는 능력마저 갖추게 되었을 때 '4대 천왕'이 되어 그의 시대를 열었던 남자, 하지만 바로 그 순간 불연듯 찾아온 병마로 인해 작별 인사도 없이 시청자들의 곁을 떠나야 했던 그 남자의 예상치 못한 등장은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선물이었다. 사고를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있는 유재석에게 빨리 회복해서 다 함께 하자는 그의 대사는 시청자들에게 고하는 그의 작별 인사이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복귀할 것을 약속하는 그의 다짐이며, 그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전하는 위로와 격려였다.
'무한상사' 완전판을 기다리며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탐사하며 묵직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작업에 정통한 김은희 작가는 스릴러의 형식 속에 '무한상사'의 주제를 잘 녹여냈다. '2016 무한상사'의 부제인 '위기의 회사원들'에서 '위기'는 오르골처럼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이 선한 삶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의미한다. 하하의 대사처럼 '눈 한 번만 감으면' 손에 잡을 듯한 돈과 권력에 대한 욕구와 그들을 향한 유혹의 손길이 그들의 삶을 위태롭게 한다. 하지만 '쪽팔리게 사는 것보다는 바보처럼 사는게 낫다'는 유재석의 대사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선한 삶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고 올곧게 살아가려는 그들의 신념이자 평소 무한상사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다. 분리된 1부와 2부, 그리고 메이킹 영상까지 포함한 완결판을 빠른 시일 내에 방송해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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