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이란 거위의 배를 가르기
- 김태호 PD의 무모한 도전
지난 1월 신년 기자간담회에서 최승호 MBC 신임 사장은 무한도전의 변화를 예고했다. 그가 예고했던 변화는 단순히 시즌제로의 전환 같은 형식적인 수준에 머물지 않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왜냐하면 그 이후 김태호 PD의 하차 소식이 전해졌고, 연달아 무한도전 멤버들의 거취 역시 논의 중이라는 보도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13년간 줄곧 무한도전을 따라다니며 수식해왔던 위기에 또다시 직면하게 된 것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대부분의 언론들이나 여론이 무한도전이 찬란했던 역사를 뒤로 하고 이미 종영을 고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현재 무한도전을 놓고 어떤 논의가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으며 알고자 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이라면 한 시대를 개척했던 한 프로그램이 화려했던 무대를 내려와 쓸쓸히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약간의 아쉬움만 남길 뿐 각별한 의미를 갖지는 못할 것이다. 무한도전 역시 시청자들에게 변변한 작별 인사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수많은 다른 예능 프로그램들처럼 오랜 시간 지켜왔던 토요일 오후 시간을 다른 프로그램에 넘겨주고 예능 역사의 한 페이지 속에 박제되기만을 기다리면 될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련 보도들을 조금만 더 유심히 살펴보면, 무한도전이 우리 사회의 견고한 편견과 잘못된 가치들과 여전히 맞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김태호 PD와 무한도전 제작진이 우리나라의 열악한 예능 제작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투쟁해왔다는 사실이다. 김태호 PD는 언제든지 교체될 수 있는 소모품에 불과한 예능인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멤버제를 도입했고, 한두 대에 불과했던 카메라 숫자를 늘여 멤버들 각자에게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캐릭터를 부각시켜 캐릭터화된 쇼를 제작했고, 다양한 화면 구성과 개성있는 자막 사용을 통해 기존 예능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예능 문법을 개척했다. 그는 프로그램의 질적 향상을 위해 10년 전부터 시즌제 예능 도입을 주장했는데, 그것을 방송 환경에 실제로 정착시킨 사람은 KBS PD 출신의 나영석이다. 나영석이 KBS를 떠나 TvN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러한 실험을 실현시킬 수 있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냐하면 시즌제 예능은 현재 무한도전을 둘러싼 논의의 핵심 쟁점이자 김태호 PD가 하차를 불사하고 관철시키고자 했던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전에 MBC 사측이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떤 방식으로 취급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태호 PD의 하차 소식에 네티즌들의 반발이 이어지자, MBC 측은 김태호 PD가 무한도전에서 완전히 손을 떼는 건 아니며 크리에이터로서 계속 지원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권한과 역할이 명확히 규정되어 있지 않은 애매모호한 칭호인 '크리에이터'란 말로 꼼수를 부렸지만, 김태호 PD가 예전과 같이 주도적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나 혼자 산다', '우리 결혼했어요' 등을 연출한 최행호 PD가 후임으로 이미 낙점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MBC 사측이 자사의 대표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에 대한 이해가 전무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시청자들은 김태호 PD와 멤버들이 만들어 놓은 무한도전의 세계관에 공감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며 울고 웃어 온 것이다. 또한 무한도전은 작가주의 예능의 개척자로 김태호 PD 개인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프로그램에 스며들어 있고, 그의 개성적인 제작 스타일에 시청자들이 열광했던 것이다. MBC 사측은 이러한 사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유재석을 비롯한 기존 멤버들만 유지할 수 있다면 '1박2일'처럼 담당PD를 바꾸어 가며 시즌제 예능을 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1박2일'처럼 여행이라는 확고한 포맷이 존재한다면 그것도 가능한 선택지 중 하나일 수 있지만 특정한 포맷이 존재하지 않는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인 무한도전의 제작방식은 에피소드의 선택이나 자막 하나까지 담당PD의 개성이 강하게 발휘될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담당PD의 교체는 곧 무한도전이라는 이름만 남겨놓고 모든 것을 바꾸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운좋게 신임 PD가 김태호 PD 못지 않은 역량과 개성을 발휘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과연 무한도전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무한도전의 전신인 '무모한 도전'을 연출했던 MBC 권석 예능본부장은 새 예능 ‘전지적 참견 시점’ 제작발표회가 끝난 후 “김태호 PD는 좀 쉬는 기간을 갖는 시즌제를 원하는 것 같다”며 “KBS2 ‘1박 2일’처럼 바로 연결돼서 하는 것도 논의 중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 속에 김태호 PD가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며, 또 MBC 사측이 무한도전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 동시에 담겨 있다. MBC 사측은 '1박2일'을 모델로 삼아 시즌제를 주장하고 있고, 그래서 담당PD를 교체하는 일에 꺼리낌이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무한도전은 투자 대비 효율이 좋은 돈벌이 수단일 뿐이며, 그로 인해 프로그램의 정체성이나 특성이 훼손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김태호 PD가 요구하는 '쉬는 시간을 갖는 시즌제'는 곧 수익의 손실을 의미하기 때문에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 13년 간 변변한 휴식조차 없이 쥐어짜내듯 운영해왔어도 프로그램은 어떻게든 명맥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굳이 김태호 PD의 요구를 들어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김태호 PD의 입장은 다르다. 이미 캐릭터의 소모가 심하고 소재가 거의 고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에피소드를 개발하고 연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몇 달 간의 공백기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휴식하고 연구할 시간만을 요구하고 있지 않다. 그가 필요로 하는 시간 속에는 그 기간 동안 함께 소재 개발에 힘쓸 작가들 및 제작진에 대한 경제적 지원과 연구 개발에 필요한 비용 등에 대한 요구가 동시에 담겨 있다.
무한도전이 예전만 못해졌다는 비난을 오래 전부터 받아왔지만 정작 그 이유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본 사람도 드물었던 것 같다. 무한도전이 겪어온 지난 10년은 이명박과 박근혜라는 희대의 극우보수주의 정권이었다. 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무한도전에 자갈을 물리고 프로그램을 폐지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보수단체를 동원해 억지 논란을 만들고, 방통위를 통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 파업 기간 동안 계약직 신분이었던 작가들 대부분이 떠났고, 함께 제작에 참여했던 PD들은 무한도전에서 예능 제작에 대한 노하우를 전수받고 다른 부서로 옮기거나 아예 방송국을 떠나기도 했다. 방송국에는 가장 많은 돈을 벌어다주는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변변치 않은 제작비 탓에 경위서를 쓰기도 하고 많은 PPL를 수주받아야 했지만 돌아오는 건 노골적인 PPL이 거슬린다는 비난 뿐이었다. 게다가 고정 멤버들의 연이은 음주 사고와 질병으로 인한 탈퇴는 김태호 PD의 고민을 한층 가중시켰다. 광고 수익 때문에 방송 시간은 늘어났지만 그것은 그만큼 촬영해야 할 분량이 늘어났다는 의미이기도 한데, 부족한 출연자의 수는 다른 출연자들의 사기 저하, 다룰 수 있는 에피소드의 제한, 무의미한 장면의 증가로 인해 프로그램의 질적 저하를 초래했다.
따라서 김태호 PD에게 '쉬는 시간을 갖는 시즌제'의 도입은 그간 노출된 문제점을 보완하고 프로그램을 질적으로 갱신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자, 그가 시청자들에게 약속했던 함께 늙어가는 방송을 만들기 위한 최후의 보루이다. 그래서 이 요구가 사측에 의해 관철되지 않자 그 누구보다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아낌없이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단호히 이별을 고할 수 있었던 것이다.
혹자는 김태호 PD가 MBC를 떠나서 나영석 PD처럼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해보길 희망하기도 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그것이 그에게 막대한 돈과 명예를 가져다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인 지 모른다. 하지만 김태호 PD는 무한도전을 그만두지만 여전히 MBC에 남는 것을 선택했다. 어쩌면 그는 MBC라는 방송국이 경직된 조직문화를 버리고 개개인의 창의성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제작 풍토를 마련할 때만이 조직의 미래가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MBC 사측에 대한 그의 요구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 대한 그만의 애정어린 조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그 협상이 결렬되어서 자신이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프로그램을 떠나게 되었지만 김태호 PD의 도전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현재 무한도전을 둘러싼 논쟁의 핵심이 무엇인지 극명하게 드러난다. 기존의 질서를 고수하며 수익성으로만 모든 것을 재단하는 근시안적인 방송국 측의 입장과 미래를 위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김태호 PD의 요구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는 게 문제의 핵심이다. 이것은 단순히 오래된 예능 프로그램이 그 수명을 다해서 존폐 위기에 놓였다고 볼 문제가 아니다. 변화된 미디어 환경 속에서 기존의 입장을 고수할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활로를 찾는 고민과 실험을 계속할 것인지, 지금 무한도전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이 기존의 패러다임에 갖혀 답보를 거듭하는 반면, 케이블 방송은 아낌없는 투자와 새로운 실험으로 신선한 프로그램을 속속 내놓으며 성공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개인적 바람은 MBC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리지 않길 바랄 뿐이다. 지난 10년 간의 엄혹한 세월 동안 MBC가 권력의 개가 되어 국민들로부터 외면 받을 때도 끝내 그들을 외면하지 못했던 이유들 중 하나는 그곳에 무한도전이 있기 때문이었다. 무한도전이 그 엄혹한 시절을 이겨내고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경영진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허망하게 폐지해야 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일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고 서글픈 사건으로 기억될 것 같다.
by ddolap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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